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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30 평정심에 대해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8. 5. 07:04
이 글은 고베 대지진 이후를 다루고 있으니, 적어도 1995년 이후에 쓴 것으로 확인된다. 그때는 상당히 ‘평정심 있는 사람’을 우러러보았던 것이리라.
‘평정심을 유지하고서’라는 말이 곧잘 들려온다. 그러나, 이러한 교훈에는 때때로 터무니없는 함정이 존재한다.
고베 대지진 아침, 잔해 더미 가운데에서 양복과 가방을 갖추고서 종종걸음으로 ‘출근’하는 아저씨가 있었다. 그가 향해 가는 역은 이미 무너졌고, 어떠한 교통수단도 기능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평정심’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집 주변에는 무너진 주택 안에서 구조를 요청하던 이웃도 있었을 것이고, 안전을 확보하지 못한 유아나 노인도 있었을 텐데, 이 ‘평정심을 갖고 있는 아저씨’에게는 그러한 사태에 대처하는 것이 긴급하다는 사실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번 야마이치 증권의 폐업에 앞서, 하룻밤이 지나면 휴지조각이 될 자사주를 ‘저가로 매수해 물타기하자’던 사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회사가 망할 리가 없다는 신빙에 기초해 행동한 것이다. 그러나 ‘내일은 어제의 연속’이라던 그들의 신빙에는 유감스럽게도 충분한 근거가 없었다. 그들도 그저 내게 있어서는 ‘평정심을 갖춘 사람’이다.
생각지도 못한 재난이나 파국적인 사태에 조우했을 때 ‘평정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엉뚱한 행동을 취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을 상하게 하며 주위에도 폐를 끼친다.
재난 영화에서의 ‘클리셰’ 중 하나로, ‘지금이 위기적 상황이다’라는 것을 알아채고 초 법규적인 조치를 촉구하는 자(보통은 주인공이다)와, 규칙과 전례를 방패로 삼아 ‘루틴’ 안에서 처리하려 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자와의 대립이라는 구도가 있다. (<죠스>(1975)에서의 서장과 시장, <포세이돈 어드벤쳐>(1972)에서의 목사와 사무장의 대립 등이 그 전형. 시장 탓에 해수욕객은 상어에 잡아먹히고, 사무장 탓에 여객은 익사하고 만다.)
이 영화들에는 유익한 교훈이 담겨져 있다. 그것은 ‘파국적인 상황에서, 평정심을 가진 사람 옆에 있지 마라’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왕조나 제국의 흥망을 볼 때 어떠한 ‘루틴’도 반드시 파괴되는 날이 온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집이 무너지고, 회사가 무너지고, 나라가 망하고, 화폐가 휴지조각이 되고, 구중구궐이 잿더미가 되는데, 제행무상의 종만이 변하지 않고 울리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러한 파국이 ‘오늘 나에게도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평정심을 가진 사람’이다.
영국에 데이비드 흄이라고 심술궂은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오늘까지 매일 아침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랐다는 사실은 <내일도 태양이 동쪽에서 뜬다>는 것의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고보면 그 말이 맞다. 혜성이 충돌해서 지구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말 가능성은 항상 있고, 앞으로 수십 억년 뒤, 태양이 왜성이 되어 마지막 빛을 발산하고 ‘소등’해버리는 ‘내일’이 오면 틀림 없이 태양은 동쪽에서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흄의 말은 타당하다. 이것은 말하자면 ‘올바른 극론’이다.
세상의 종말을 의심하며 아침을 맞는 사람도,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것에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은 채 아침을 맞는 사람도 모두 태양의 운행에 관여할 수 없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파국에 조우했을 때, 양자에게는 서로의 상황판단에 있어서 그 ‘속도’에 미묘한 차이가 생겨난다. 그리고 그 상황판단의 자그마한 차이가 생명을 좌우하게 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일본의 현재 상황은 상당히 ‘파국적’이다. 파국적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여러분이 종종 재난 영화의 교훈과 흄의 시니컬한 지견을 떠올려주기를 바란다. ‘평정심을 가진 사람을 믿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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