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 이후의 세계> 서문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8. 2. 14:44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책을 손에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서 <코로나 이후의 세계>는 ‘기존에 써둔 것’을 컴필레이션한 것입니다. 소재로써 블로그 글이나 여러 매체에 발표한 원고를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원형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가필했으므로 절반 정도는 새로 쓴 ‘세미 오리지널’이라고 봅니다.
상당히 시국적인 책 제목이기는 합니다만, 이번 팬데믹을 계기로 일본 사회를 깊이 잠식하고 있는 여러가지 ‘병독病毒’이 가시화된 바, 본서는 이러한 논고를 다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해 생각한 것을 쓰며 ‘서문’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나는 지금 일본 사회를 보며 정직하게 ‘무섭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이 차츰차츰 ‘불관용’적 자세를 취하기 때문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말이 날카로워졌습니다. 섣불리 닿으면 곧장 피부가 베여서 상처가 남을 것 같은 ‘날카로운 말’이 오갑니다. 그래서 상처입는 것을 경계하며 모두 몸이 굳어졌습니다. 혹은, 자신의 말이 얼마나 벼려졌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칼날’에 손가락을 대고서는 기묘하고도 학대적인 기분을 느낍니다.
그러한 ‘날카로운 말’이 오갑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어쩌면 스마트하고도 지적인 대화가 행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말들이 아무리 대량으로 유통, 축적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일본인 전체의 집단적인 퍼포먼스 향상과는 결부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현상이나 사물이 적절한지 아닌지의 여부를 ‘그것을 행함으로써 집단으로서 살아갈 지혜와 힘이 고양되는가?’라는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언명이 ‘올바른가 그렇지 아니한가’를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그것 이상으로 ‘그 말을 함으로써 당신은 이곳에 어떠한 <선함>을 가져다 줄 것인가?’라는 것을 신경씁니다. 말의 내용은 흠 잡을 데가 없어도, 발설된 그 말이 귀에 들어가 피부 가운데 스며들 적에, 주위 사람들이 살아갈 의욕을 잃어가며 지혜 또한 발동되지 않는다면, 나는 말을 꺼낸 사람이 그것에 대한 ‘가해 책임’을 느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가 한참 전부터 계속 말해오던 것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좌익의 말에 대해 그러한 불만을 느꼈습니다. ‘혁명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서로 상대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계급 의식의 결여를 노정한다’든가 ‘비웃어 마땅한 쁘띠부르주아성’이라든가 하는 비난을 다투어 행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런 행위를 아무리 반복해 보아도 얻을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혁명 투쟁을 짊어질 자격을 가진 자’의 조건을 엄격하게 하면 할수록 ‘혁명적 주체’의 머릿수가 줄어들 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기를’ 바라는 자격이 있는 인간의 조건을 엄밀화하는 자가당착으로 이 사람들은 어떻게 세상을 보다 더 나은 것으로 만들 셈인가 생각했습니다.
똑같은 감상을 훗날 페미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에게서도 느낀 것입니다. 이번에는 ‘무의식적으로 성차별 의식을 노정한다’든가 ‘식민지주의자의 가해자 의식을 느끼지도 못한다’는 식으로 표현은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진정으로 차별받고, 철저하게 소외된 인간만이 시스템을 비판할 권리를 갖는다(그 이외의 인간은 모두 무의식 가운데 차별을 행하고, 소외시키는 측에 가담하고 있다)’고 할라치면, 대단히 통쾌한 명제가 나오기는 합니다만, 그것도 역시 철저하게 하면 할수록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하는’ 사업에 참여할 동료의 머릿수를 줄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내가 수 년째 주장하고 있는 것은,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모두가 조금씩이나마 ‘십시일반’하고, 그것을 퍼블릭 도메인에 공탁해서, ‘티끌 모아 태산’을 목표로 하는 게, ‘모든 리소스를 바른 목적을 위해 쓴다’는 것을 목표로 할 때보다 얘기가 빠르게 진행되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조금이나마 살기 좋게 하는’ 사업에 있어서는, ‘동료의 수를 늘리는’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자신과 다소 의견이 맞지 않은 사람한테도 ‘뭐, 그런 사고방식도 있을 지 모르겠다’라고 여기며, 옳고 그름의 판단을 서두르지 않습니다. 엉거주춤하며 조금 참습니다(그리 오래 할 수는 없겠지요). 그리고, 아무튼 ‘마음 통하는 구석’이 있다면, 그것에 의지해 대화를 해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곧잘 ‘다이버시티&인클루전’이라는 표어를 사용합니다. ‘다양성과 포섭’. 물론, 멋진 목표입니다. 전혀 나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미묘한 ‘갑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신가요.
말하자면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기치를 내거는 사람은, 자신은 그 집단에서 ‘정통’에 속해 있으며 ‘멤버십’을 확보하고 있는 고로, ‘우리들하고는 약간 털 색깔이 다른 녀석들이 몇 명 있어도 상관없다’는 뉘앙스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포섭’도 그렇지요. ‘이방인을 포섭하자’는 사람은 ‘포섭하는 입장’에 애시당초 속해 있습니다.
아니, 그게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훌륭합니다. 하지만 살짝 ‘갑질’ ‘준 갑질’이 아닌가 합니다. 아주 살짝 말입니다.
물론, 나는 ‘갑질, 준 갑질’을 그만두라고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예요. ‘생각지도 못하게 무자각적으로 우위성, 내부성을 노정한다’등의 말을 하면 ‘도로아미타불’이니까요.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 부분을 벗어날 것인가를 논하려는데, ‘그러한 이야기’를 본인이 꺼내면 어쩌자는 말입니까. ‘당신들, 그런 우월적인 태도를 즉각 멈추시오, 반성하시오, 부끄러워하시오’라는 식의 말을 내가 하려는 게 아니예요. 착각하지 말아줬음 해요. 나는 ‘훌륭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니, 앞으로도 계속 그러한 태도를 유지해 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훌륭함’가운데에도 ‘더욱 훌륭함’이 있지 않겠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능한지 아닌지는 다른 문제인데, 만약 ‘더욱 훌륭함’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을 목표로 해도 좋지 않겠나 하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투시도법에 의한 무한 소실점과 같은 것입니다. 실체가 아닙니다. 작업상의 의제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없으면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으로서의 ‘다양성과 포섭의 고차원’이 있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너무 평범한 말이라서 힘이 빠질지도 모릅니다만, ‘친절’입니다.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는’ 일은, 상대보다 높은 입장이 아니어도, 상대방이 집단의 정회원이 아니어도 됩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들입니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한다든가, 짐을 들어준다든가,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타세요’ 하고 말을 건다든가 하는 겁니다. 심지어 그런 식의 ‘보이는 일’에 한정되지도 않습니다.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혹은 상대가 ‘친절함을 느꼈다’는 일이 없어도 됩니다. 아침에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 등교하는 아이들을 마주치고서 ‘오늘 하루도 건강히’라고 마음 속으로 손을 잡아준다든가, 그 정도면 됩니다. 딱히 상대로부터 구체적인 조력이나 지원을 요청받지 않아도 자신이 먼저 한 걸음 다가갑니다. 자신이 시작합니다. 자신이 기점이 됩니다. ‘마음 속으로 손을 잡아주는’ 정도만으로도 ‘한 걸음 나아가는’ 일에 집계되어도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나는 그러한 ‘친절’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지금 일본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친절해집시다’는 언뜻 보면 초등학교의 학급 목표 같은 것입니다만, 일본인으로서는 그것이 참으로 불가능해지지 않았나 합니다. ‘아이들조차 할 수 있는 일’을 어른들이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특히 ‘똑똑한’것 같이 보이는 어른들이 ‘친절해지는’ 것의 가치를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친절해질 수 있는가’라는 것을 계속 생각해왔습니다. 왜 생각하냐면 내가 ‘친절하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태어날 때부터 친절했다면, 구태여 ‘친절해지는’ 것의 의미를 몰라도 됩니다. 주위의 생물들이 모두 먹잇감인 티라노사우르스에게 ‘너는 강한 친구구나’라고 말해도 ‘응? <강함>이 뭔데?’ 라는 질문만 돌아올 뿐입니다(파충류는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만). ‘강함’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건 ‘약한’ 사람 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친절해지자’는 말에 리얼리티를 느끼는 사람은 ‘친절하지 않은 인간’ 뿐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친절하지 않으니 타인의 친절이 절절히 와닿습니다. 아아, 고맙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대접해 줄지는 몰랐거든요.
나는 친절한 인간이 아닙니다. 때때로 뭔가 계기가 돼서 ‘우치다 씨는 의외로 좋은 사람이네요’하고 사람들이 놀라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내 일상적 행동거지가 ‘좋은 사람이 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치다 씨는 의외로 친절하군요’라는 말도 듣습니다. 의외라는 것입니다. 나는 상당히 마음이 좁은 인간입니다. 금방 화를 내고, 사람에 대해 심술궂은 마음이 들며, 공격적 심리를 억누르려는 게 잘되지 않습니다. 금방 ‘심한 말’을 해버립니다. 그리고 ‘심한 말’을 할 적에는 말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솟아나옵니다. 이 책을 읽고서 ‘어이, 너 친절한 거 맞냐. 욕지거리만 잔뜩 써 놓았잖냐’라고 어처구니가 없어질 독자가 있을 겁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이 책은 읽어보면 욕이 엄청나게 쓰여져 있습니다.
도대체 이 서문부터가 ‘일본 사회를 깊이 파고들고 있는 병소’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상당히 무자비한 표현방식이네요. 그래도 그런 것들을 쓰면서 ‘아이고, 또 터뜨려버렸네’라고 생각은 합니다. 그렇게 여기저기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무한 소실점’으로써의 ‘친절’을 멀리 내다보는 것입니다. 그런 나의 뜻만큼은 믿어주었으면 합니다. 지금 불가능하더라도, ‘머나먼 목표를 지향하는’것은 가능합니다. 부디 그러한 못난 삶을 하해와 같이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런고로, 이 논집을 ‘날카로운 말이 횡행하는 현대 일본 사회를 근심하며, 사람을 친절하게 대하자고 주장하는 남자가, 생각지도 못하게 결국 <날카로운 말>을 입 밖에 내는’ 전형적인 사례로서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영문을 모를 내용은 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께는 어쩔 수 없습니다만, 뭐, 그런 분은 ‘친절한 마음’을 많이도 안 바라니 마음속에서 조금만 짜내서, 좀 어울려 주십시오.
2021년 8월
우치다 타츠루
(2021-08-02 09:35)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출처: http://blog.tatsuru.com/2021/08/02_0935.html
『コロナ後の世界』(文藝春秋)まえがき - 内田樹の研究室
まえがき みなさん、こんにちは。内田樹です。本をお手に取ってくださって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この『コロナ後の世界』は「ありもの」のコンピレーションです。素材になったの
blog.tatsuru.com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03-1|30 기린의 목 (0) 2021.08.14 02-3|30 평정심에 대해 (2) 2021.08.05 02-2|30 정보화 사회에 대해 (2) 2021.08.02 02-1|30 욕망에 관해 (2) 2021.07.30 01-3|30 우드스탁 (2) 2021.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