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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1-3|30 우드스탁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7. 27. 07:28

    (1991년경?)

    다음은 ‘영화에 대해서’.

    고베신문의 의뢰로 쓴 것입니다. 너무 긴 탓에 줄여서 발표했지만 호되게 당한 탓인지, 그 뒤로 원고 주문이 들어오지 않고 말았습니다.

     

     

    <우드스탁>(1970)이라는 영화가 있다. 플라워 칠드런과 히피 운동과 옛적 락 음악 시대의 유물이다.

     

    지친 중년 남자들이 밤중에 위스키를 마시며 무릎을 끌어안고 헤드폰으로 소리를 크게 해 들을 적에, 너무나 빨리 지나가버린 1970년대를 회고하며, 통절하게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좋은 영화이다.

     

    허나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다. 영화 얘기를 해 보자.

     

    이 영화를 보며 다시금 놀란 점은, 이 거대한 락 콘서트가 틀림 없이 ‘종교적’인 의례였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이제 20년도 전의 일이니 지겨울 정도로 들어온걸 갖고 뭘 이제 와서, 하고 모두는 생각하리라. 나도 그건 이해한다.

     

    내가 흥미를 느낀 점은, 이 종교 의례의 주술적 도구가 ‘기타’였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드는 것은, 알빈 리가 신들린 스피드로 치는 ‘아임 고잉 홈’과, 지미 헨드릭스가 거의 현이 발할 수 있는 극한까지 기타를 괴롭힌 ‘성조기여 영원하라’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을 덧붙이자면, 더 후의 피트 타운젠드가 기타를 무대에서 산산조각 부숴버린 것, 활처럼 등을 구부리며 기타를 치는 카를로스 산타나의 황홀한 표정도 굉장히 좋았다.

     

    이들 퍼포먼스의 공통점은, 이 ‘기타리스트’들이 20만 명이나 되는 집단 히스테리 상태의 관객 앞에서 어떤 종류의 ‘빙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하는 점이다.

     

    이러한 것이 일어난 것은, 기타리스트라는 것이 뮤지션 가운데에서도 특히 ‘유령’에 사로잡히기 쉬운 체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샤먼적인 성격이 기타리스트가 갖는 특권의 연원이기도 하다.

     

    RC 석세션의 나카이도 레이치 군이라는 기타리스트가 전에 어딘가에서의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나카이도 군에 따르면 히비야에서 여름의 석양, 한낮의 열기를 잠재우는 듯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스테이지에 등장해 ‘지잉----------------’하고 현을 울릴 때의 기타리스트의 쾌감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것이라는 모양이다.

     

    나는 기타같은 것은 치지 않지만, 이 도취감은 상당히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은 종교적인 ‘트랜스’ 상태에 가까울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드럼이나 키보드 연주자가 눈을 까뒤집으며 도취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를테면, 이시하라 유지로의 <폭풍을 부르는 남자>에 나오는 ‘드럼 대전’과 랠프 마치오의 <크로스로드>에 나오는 ‘기타 대전’을 비교해 보면(이 영화를 두 편 다 본 사람은 거의 없을 터이지만) 기타리스트의 기량이라는 것이, 테크닉의 문제가 아닌 ‘빙의’능력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유지로는 드럼의 기술적인 승부로 자신이 나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스틱을 버리고 ‘이 몸은 드러머’ 하고 의표를 찌르는 손으로 단숨에 승부를 맺는다.

     

    한편 랠프 마치오는 모차르트, 전설적인 블루스 기타리스트 로버트 존슨과 함께 동시에 ‘빙의’되어, 그 자신의 개성도 기술도 뛰어넘은 신들린 듯한 연주를 해 승부를 걸게 된다.

    (‘모차르트와 블루스 기타리스트에 동시에 빙의된 상태’라는 게 어떤 것인지 궁금하신 분은 부디 이 영화를 봐주십시오.)

     

    이 정도로 기타라는 것은 일종의 ‘비인칭적’인 악기인 것이다.

     

    더욱이 기타 플레잉의 진수는, 플레이어가 ‘악기의 정령’이라고 불릴 만한 것의 안내를 받아서, ‘내가 기타를 치고 있는’ 상태를 버리고 결국 ‘나의 신체를 매개로 해서 현이 하나로 울린다’는 상태를 성취하는 것에 있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대체 왜 유독 기타라는 악기에서 연주자의 빙의가 빈번히 일어나는 것인가.

     

    이것이 오늘의 주제이다. 서두가 길었다.

     

    생각해보면, 기타라는 것은 기괴한 악기이다.

     

    목제 통에 금속 혹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현을 당겨놓고 그것을 쳐 음을 내는 것이다. 조율이 어렵고, 충격, 습기, 열기에도 약하다. 좋은 음을 내기 위해서는 손가락에서 피가 날 정도로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더 저렴하고, 튼튼하며, 음이 튀는 일도 없이, 연주도 쉬운 전기 악기가 여러가지 나와있지만, 아직까지 음악 소년들의 기타 편애에 변화의 낌새는 없어보인다. 이것은 상당한 수수께끼다.

     

    그럼, 이제부터가 문제다.

     

    ‘목재부에 현을 매고 그것을 쳐 음을 낸다’는 원리적 메커니즘에 대해, 기타는 어떤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무엇일까.

     

    답은 ‘활’이다.

     

    사실 ‘활’은 사수를 고양시켜 트랜스 상태에 빠지게 하는 주술적인 힘을 갖고 있다. 그럼, 왜 활은 특별히 주술적인 무기가 되었을까.

     

    독일 철학자 오이겐 헤리겔은 도호쿠 제국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칠 때, 연이 닿아 희대의 명사수 아와 겐조 사범 곁에서 궁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의 일이다.

     

    헤리겔의 <마음을 쏘다 활>에는 그가 믿는 근대 서구적인 신체 훈련 방법과, 사범이 나타내는 일본적 ‘수행’의 문화적 낙차 가운데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헤리겔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헤리겔은 신체 훈련이라는 것은, 뭐가 어찌 되었든 신체를 의식으로 완전히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믿었다. 뜻하는 대로 신체를 운용하는 것, 신체를 ‘도구’로서 정확히 조작하는 것, 그것이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신체훈련이 추구하는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해 아와 사범은 우선 처음에, ‘당신은 쏘는 것에 있어서, 자신은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가르친다.

     

    헤리겔은 이를 듣고 몹시 놀랐다. ‘만약 <>가 쏘는 게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쏘는 것입니까’하고 그는 반문한다.

     

    사범은 이렇게 답한다.

     

    <그것>이 쏘는 것입니다.’

     

    헤리겔은 그 가르침의 의미를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쏘는 훈련은 계속된다. 그리고 시행착오의 수년을 거쳐, 어느날 헤리겔이 아무렇지도 않게 쏜 하나의 화살에 대해 사범은 깊이 일례한 뒤, ‘방금 전에 막 <그것>이 쏘았습니다’라고 고한다. 환희에 가득 찬 제자를 나무라며 사범은 훈고한다. ‘지금 쏜 것에 대해 당신은 아무 책임도 없습니다. 그 화살은 익은 과일이 떨어진 것과 같이 당신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고 조금 지나 헤리겔은 모종의 지속적이고도 집중적인 신체 훈련을 하며, 신체는 ‘자기 자신’의 통제에 속해있지 않은 초월적인 운동 능력(사범이 ‘그것’이라고 부른)을 발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습득하게 되었다.

     

    ‘그것’의 위력이 개인의 기량을 아득히 뛰어넘은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범은 어느날 밤 헤리겔을 도장에 불러, 어둠 속에서 과녁을 향해 두 발의 화살을 쏘는 것을 보여주었다. 헤리겔이 과녁을 보니, 처음 쏜 화살은 과녁 한가운데에 적중했는데, 두 번째 화살은 처음의 화살을 쪼개서 적중했다. 이러한 신묘함은 개인적 노력을 아무리 쌓아올려도 결코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활에는 ‘신령’이 깃들어 있을 때에만, 이로써 ‘신들린’ 것 같은 퍼포먼스가 가능한 것이다.

     

    활에 위대한 영이 깃들어 있다는 신앙은 물론 아와 사범의 독창적인 발상이 아니다. 고래적부터 일본에는 화살에 신령이 깃들어 있어서 그것이 사냥 능력을 비약적으로 높여준다는 신앙이 존재했다. 민속학자이자 국문학자인 오리구치 노부오에 따르면, 고대 사람은 사냥의 능력을 가져다주는 ‘짐승의 혼さち’이라고 불리는 신령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짐승의 혼’이 빙의한 사냥꾼은 초인적인 수렵 능력을 발휘한다. 고대어에는 ‘짐승의 혼이 깃든 활さつ弓’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활’ 그 자체에 ‘짐승의 혼’이 빙의되어 있다는 사고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오리구치는 쓰고 있다. 활시위가 격하게 웅웅거릴 때, 고대 사람은 그것을 ‘상위 차원에서의 혼의 발동’을 들었다. 활의 진동음은, 그것이 가져다줄 풍성한 사냥감의 기대와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들이 갖고 있는 신체의 태고적인 층에서는, 활시위의 웅웅거림을 외경과 기대가 섞인 감정으로 들었던 고대인의 기억이 지금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몸체에 현을 매고, 그것을 튕겨서 진동음을 발하는 작동원리에 의해 기타는 현대에 있어서의 활과 같다. 그 덕분에 기타는 현대에 있어서의, 옛적의 활을 대신하는 액땜破魔除霊의 주술적 도구가 될 만하다.

     

    그 진동과 함께 신령이 도래해, 주술적 도구를 조작하는 자에게 빙의한다. 그리하여 그는 초월적인 기교를 발휘한다. 고대에는 그 기교가 사냥감을 풍성하게 가져다주었다. 현대에 있어서는 음악산업에 규모의 경제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기타의 매혹은 그러한 계량 가능한 가치와 같이 말로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까 예로 든 지미 핸드릭스의 전설적인 기타 플레이는 악기의 연주라기보다는 오히려 샤먼이 주술적 도구를 다루는 것과 같다. 그는 선율이나 리듬을 무시하고 오로지 줄을 진동시키는 것, 그 진동을 가능케 하는 한 잡아 늘리는 것만 고집했다(나카이도 레이치 군이 기타의 음을 멜로디가 아닌, ‘지잉------------’하는 진동음으로 나타낸 것을 기억해보기 바란다.)

     

    지미 헨드릭스는 치아로 줄을 튕긴 적도 있다. 여러분도 스스로 기타줄을 치아로 튕겨보면 알 것이라고 생각하지만(딱히 해보지 않아도 됩니다요) 치아로 튕겨보면 명백히, 손가락으로 그렇게 하는 것보다 진동이 다이렉트로 신체의 깊은 곳까지 전해진다.

     

    <우드스탁>에서 더 후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젠드는 연주를 끝내며 기타를 스테이지에서 마구 내려쳤다. 악기가 애초의 형태에서 벗어나 조각조각이 된 뒤에도, 전기적으로 증폭된 줄의 웅웅거림만큼은 무대에 남는다.

     

    이 장면은 우리들에게 어떤 종류의 전율을 선사한다. 그것은 주술적 도구에서 벗어난 다른 형태의 ‘어떤 것’이 드러나는 것을 우리들이 공포와 황홀 가운데 그 자리에서 감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http://www.tatsuru.com/columns/simple/01.html

     

    Simple man simple dream

    : updated 10 February 1999 Simple man simple dream -1 「研究史」に書き記したとおり、この10年ほど、あちこちに書き散らした「バカ・エッセイ」が100篇以上あります。ほんらいは、そのまま反古とな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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