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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0 허이고주의란 무엇인가?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8. 20. 07:52

    ‘니시베 스스무도 격찬’이라는 띠지를 보고서 머뭇머뭇 미야자키 데쓰야의 <정의의 편>(1996년 출간 - 역주) 이라는 평론집을 사고 말았다. 니시베 스스무가 내린 평가의 객관성을 딱히 내가 높게 사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믿지 않는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 도통 니시베라는 사람이 쓴 책을 읽지 않으니 모른다. 옛날에 니시베의 책을 사고서 다 읽은 뒤 그 책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적이 있다. 읽은 뒤 그대로 책을 내버린 적은 이제까지 두 번밖에 없었는데, 그 가운데 한 번이니만큼 니시베와 나의 궁합은 좋지 않은 성싶다.

    그런 것도 있어서, ‘무서운 걸 봤지 뭐야’라든가 ‘쓴 걸 삼켜버렸다’든가 하는 네거티브한 호기심을 간직한 채 미야자키 데쓰야의 책을 사와서 쭈뼛쭈뼛 읽어보았다. 읽어보니 문장도 빼어나고 젊음에 어울리지 않게 박식하며 논리가 명쾌하고, 비꼬는 것도 잘하며, 싫어하는 것-우에노 치즈코라든가-도 나와 똑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가 없다.

    왜 재미가 없나?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평소에 ‘재밌다’고 생각하는 평론집을 열거해 놓고 그것들과 비교해보기로 했다. 참고로 한 책들은 다카하시 겐이치로 <이제 일본은 괜찮다>와 오다지마 다카시 <일본 문제 외론>. 그러자니 금방 알 수 있었다. 미야자키에게는 ‘허이고’가 없었던 것이다.

    ‘허이고’란 무엇인가?

    그것의 요는 ‘종범従犯 감각’이다.

    이를테면 일본의 정치 시스템을 비판할 때, 우리들은 금세 소극적 자세를 취한다. 왜냐하면 비판 당사자가 오랜 기간 동안 정치와 관련한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 등의 자유를 보장받아 선거권 혹은 피선거권을 행사한 결과, 그는 지금과 같은 정치 시스템을 만들어낸 장본인 중 한 사람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노력도 태만도 참가도 무관심도 전부 합한 총합이 지금의 정치체제인 이상, ‘대체로 일본의 정치 시스템은 이러저러하다’ 는 식의 외국인같은 스탠스로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아니, 허용될지도 모르지만, 부끄러워서 못 한다.

    일본의 정치 시스템이나 관료제도가 변변찮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변찮다’고 말할 적에 ‘그 변변찮은 제도라는 가마의 한 구석을 제가 짊어지고 있습니다만...’ 이라는 내면의 아픔과 수치에 대해 우리는 말꼬리를 흐리고 만다.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문학이나 문단에 대해 말할 때, 오다지마 다카시가 최첨단 기술이나 컴퓨터 업계에 대해 말할 때, 그 말들에는 ‘내면의 수치심’도 ‘함축’되어 있다. 그러한 현상의 출현을 저지하지 못했다든지, 때로는 저도 모르게 가담해 온 자신을 탓하는 기분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결국 우리들에게 맞지 않았어’라는 식의 자포자기 회심의 구석이 있다.

    이 ‘죄책감’과 ‘자기 면책’이 서로 얽혀 짜올리는 ‘꼿꼿하지 못함’을 내가 ‘허이고’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일본 중년 남자중에 이 ‘허이고’감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은 없을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 이래로, 이 ‘허이고’적 취약성이 다른 의미에서는 일본 아저씨들의 ‘자아를 지켜주는 방패’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게 아니다. 금방 굽실굽실 사과하는 놈이 가장 반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나는 모르는 바 아니다. (내가 그러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일본 아저씨들이 ‘허이고’적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한다. ‘허이고’란 자신이 ‘외부인’인 척 행세하는 발언을 하지 않겠다는 강한 각오이기도 한 동시에, ‘관계자’란 것은 ‘감옥 안’에 가둬져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결연한 단념이다.

    미야자키 데쓰야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이 ‘허이고’ 감각이다. 그가 일본의 상황이라는 함수식에 산입하는 것은 ‘자신의 무능력’이라는 데이터이다. ‘무능력’한 자로서 자신을 제시하는 까닭은,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사회’의 모든 제도를 심문하는 입장에서 채용하기에 더없이 유리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능력이 없고 권한이 없기 때문에 현상이 아무리 나쁘다 할지라도 거기에 자신의 책임이 있을 리가 결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미야자키가 비판하고 있는 페미니즘의 자기정당화와 동일한 논리다.) 나는 이것이 좋지 않다고 본다.


    경험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바이지만, 우리들은 자신이 ‘무능력’하다는 사실이 ‘자신은 약하고, 바보이기 때문’의 결과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고 싶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래서 이 ‘무능력’을 자신보다 한없이 강력한 것에 의한 ‘외부로부터의 금지’의 결과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이 ‘합법적인 자기 인식을 금지하는 외부의 존재’를 정신분석은 ‘가부장’이라고 이른다.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로부터 곧장 ‘외부에 내가 이해하지 못할 로직을 갖고 세계의 질서를 잡는 강력한 상위자가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거기에는 논리적인 ‘가교’가 필요하다. ‘가부장’이라든가 ‘신’이라든가 ‘도깨비’라든가 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러한 논리적인 가교 기능인 것이다.

    ‘강력한 악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이 <나>의 자기 실현이나 자기 해방을 저해하고 있다’는 말하기 방식은 결과적으로 ‘가부장’제 사회의 고유한 존재 양식이며, ‘가부장’제 사회의 재생산 프로세스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한 내러티브에 의존하는 한, 그것이 어떠한 이데올로기적인 겉모습을 취한다 할지라도 (마르크스주의든 페미니즘이든 역사수정주의든) 결국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동형적 이데올로기의 끝없는 반복에는 이제 신물이 난다.

    여기서 빠져나갈 길이 있는지의 여부를, 나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나는 무력하고 바보인데, 그 이유는 내가 무구한 것도 아니요, 또한 외부에 존재하는 <가부장>이 내 힘을 빼앗는 게 아니라, 단순히 내가 무력하고 바보이기 때문이다’라는 박정한 자기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게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약함을 근거로 삼으면서 그것을 결코 비참한 어법으로 말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나는 ‘허이고’라는 의성어에서 빌려왔다.

    ‘허이고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힘이 약해진 순간의 비참한 부유감에서 생겨나는, 가벼운 현기증과 유사한 곤란한 정신의 존재 양상인 것이다.

     

     

    출처: http://www.tatsuru.com/columns/simple/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