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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성의 토대는 취약함이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6. 11. 07:08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이야기 반쪽 라디오’를 녹음하며 이데올로기와 생활감각의 유착과 괴리에 관해 히라카와 가쓰미 군과 그의 자택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비망록에 남겨둔 문장이 <무도론> 에 재수록되었다. 조금 짧은 버전을 ‘예고편’으로써 여기에 올려둔다.

     

     

    공리공론에 불과한 이데올로기는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제어하기 위해 신체와 일상생활이 있는 것이다.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대의명분을 내걸고 잘난 듯이 말해도, 그것을 말하는 자기 자신의 신체가 발하고 있는 비언어적 표현을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말은 힘을 잃는다. 아무리 뛰어난 구변이라 할지라도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 라고 말했던 고향의 도발에는 대항할 수 없다*. ‘그렇게 잘났다면 여기서 보여줘봐라’ 하는 말에 공리공론은 가장 취약하다.

    (* 헤겔과 마르크스 등이 이솝우화에서 원용해 현실감각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의미. 라틴어 원문은 Hic Rhodus, hic salta. 허풍꾼 운동선수가 자신은 로도스라는 타지에서만큼은 괄목할 만했다고 떠벌리자 그 말을 듣던 그의 고향 사람이 이러한 일침을 가했다고 한다 – 옮긴이)

     

    예로부터 일본의 보통 사람들은 어떤 말에 실제적인 신체 감각이 있는지를 지적 변론에 대한 비평적 준거로서 몸에 익혀두어 왔다. 히라카와 가쓰미도, 다카하시 겐이치로 씨도, 하시모토 오사무 씨도, 오다지마 다카시 씨도, 마치야마 도모히로 씨도**, 그것을 비평성의 근거로 삼아왔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 각각 기업가, 문학평론가, 소설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 – 옮긴이)

     

    그렇지만, 이런 보통 사람들의 비평관에는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신체화해버린 인간에게는 이렇다 할 반격을 할 수 없었다 점이다.

     

    인간은 이데올로기를 신체화하는 일이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일본 군국주의를 구동한 것은 이른바 ‘청년장교’적인 정념이었다. 이것은 이시하라 간지 류의 망상적 세계 전략과, 빈한한 도호쿠 지방 출신 어중이떠중이 총각들의 빈궁, 기아, 그리고 열등감이 만들어 낸 르상티망의 아말감이다. 그래서 도시의 좌익적 지식인이나 리버럴들은 청년장교들의 ‘전략’을 비판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기근 때문에 딸을 기생으로 내보낸 빈농의 고통을 당신들이 알 리가 있으리오’ 하고 일갈하면 그때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러한 예사로운 실제적 신체감각을 갖춘 말과 함께 정치적 환상이 유착한 타입의 발언에는 누구도 당해낼 수 없었다.

     

    본인이 맛본 괴로움을 너희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느냐, 느껴볼 수 있겠느냐, 이해할 수 있겠느냐, 아마 못 하겠지... 이런 ‘피해자의 육성’ 앞에서는 누구든지 할 말이 궁해진다. 이것은 우리 일본인들의 정치문화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전통적인 협박의 어법이다.

     

    일본의 지식인은 이러한 읊조림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 방안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비대한 정치적 야심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정치적 주장의 끄트머리에 ‘너희들처럼 뻔뻔하게 지내는 인간이 내 괴로움을 알 턱이 있겠는가’ 를 덧붙인다면 아무도 효과적인 반론을 제기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학습한 것이다.

     

    이 변설이 ‘최강’이었던 것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실제적인 신체 감각’이라는 것이 페이크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실제로 느끼고 있다고 칭한 ‘몸뚱이’ 그 자체가 이념적인 구축물이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육체라는 것은 비정형으로서 밀도의 농담이 있고 구멍이 숭숭 뚫려있으며 흐물므물한 가운데 ‘여유 공간’을 갖고 있다. 그래서, 참된 육체는 디지털적인 경계선을 갖고 있지 않다. 상대방이 한 말에 대한 부정이나 진위의 기준으로써 따져보게끔 한다든가 입 다물게 할 수는 없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은 ‘잘 모르겠는데 그냥 싫다’ ‘아, 이건 좀 아닌데’ 정도의 리액션 뿐이다.

     

    신체는 본질적으로 아날로그적인 연속체이기 때문에, 디지털적인 절단에는 능숙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들이 실제적 신체 감각을 비평성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설령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아슬아슬하고도 최종적인 기반이 될 만하다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언어가 달라도, 종교가 달라도, 생활습관이 달라도, 정치적 신념이 달라도 육체를 기반으로 하는 한 우리들은 간신히 공통의 플랫폼을 세울 수 있다.

     

    그렇다 함은, 육체란 병들고 굶주리며 상처입고 부서지기 때문이다. 프래자일러티, 유한성, 취약성이 ‘육체의 주특기’이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올바른 계획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하루 8시간 취침과 삼시세끼 식사, 때때로 목욕을 즐기며 지기지우와의 폭음, 고담준론, 또는 밥벌이로 가족을 부양해나가며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어떠한 일을 육체를 입은 인간은 할 수 없다. 일시적으로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오래 할 수는 없다. 육체의 유약함, 취약함이 이데올로기의 폭주를 억제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실제적 신체감각에 의거한 보통 사람적 비평성에 기대 판단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은 좀 더 복잡한 상황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목도하고 있는 것이 자신의 실제적 신체 감각을 관념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기나긴 자기기만 훈련이 가져다준 이데올로기 주도의 히스테릭함, 격앙, 눈물 터뜨리기가 가능한 인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페이크 육체’를 조종해 이데올로기에 실제적 신체 감각이라는 담보를 붙이는 데 성공했다.

     

    2차 세계대전 이전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압도적 성공은 이러한 ‘관념적으로 조종된, 만들어진 고통’을 종횡무진 구사해 온 데에 기인했다. ‘프롤레타리아의 비참함을, 빈농의 아픔을, 열악한 전선에 나선 병사들의 괴로움을 너희같이 맘 편히 지내는 중산계급이 알 리가 있겠는가’ 하는 비수를 급소에 꽂아넣으며 절규하면, 소위 교양 있는 반론이라는 것을 봉쇄할 수 있다. 이 성공적 경험은 집단적 체험으로서 사회의 문화 아카이브에 등록되었다. 그리고, 때때로 눈치 빠른 작자가 그것을 취해 효과적 사용을 모색한다.

     

    60년대 일본에는 이른바 ‘육체의 반란’으로 명명된, 그간 군국주의 측이 가진 전가의 보도였던 어떠한 것을 좌익적으로 탈환하려던 시도가 있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 탈환전은 분명히 국지전적 측면에서는 승리를 거두었다고 본다. 허나, 그 승리는 까다로운 ‘페이크 육체’로 하여금 정치적 비약을 담지하는 도구로써의 정성분석이나 실무 기술 연마라는 학술적 재발견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로부터 30년 정도 신체성이 희박한 시대가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들이 육체의 정치학에 대해 잊어버릴 때 즈음, 그것은 다른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포퓰리즘은 ‘육체를 위장한 이데올로기’이다.

    예사로이 소박한 어조로, 논리적 정합성이 없는 언설을 감정적으로 잠꼬대하듯 하면, 우리들은 그것을 ‘신체의 깊은 곳에서 솟아오른, 어떤 종류의 인류학적 예지가 담보하는 실제적 감각’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것을 일부 정치가와 학자들이 학습했다.

     

    만만찮은 자들인 것이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필자나 히라카와 군으로 치면 표면적으로는 비슷해 보인다. 예사로우며 산뜻한 문체로 학술적인 아이디어나 정치적 이념을 농한다. 허나, 그들이 말하는 방식은 훨씬 알기 쉽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의 고통’대신 ‘보통 사람이라면 갖고 있을 자기 자신의 이기심과 욕망’을 기반해 채용했다.

     

    뭘 그리 내빼고 그래. 너도 돈이 좋잖아? 멋진 옷을 입고, 맛난 걸 먹고싶잖아? 고민할 것 없어. 본능에 충실해.

     

    그러한 ‘리얼한 실감’ 의 바탕에는 ‘당했으니 배로 갚아주마’ 하는 중학생적인 허장성세와 시장원리주의, 약육강식의 능력주의의 변설이 실려있다.

     

    이들은 마치 ‘육체에서 나온 말’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다시말해, 그런 종류의 말에는 인간의 육체가 오래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필자의 육체는 견디지 못한다. 어지간해서는 육체를 입은 인간이라면 오랫동안 참을 수 없는 구린내가 나는 말을 내뱉고 또 내뱉는다. 왜냐하면 그 말이 ‘페이크’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말을 수백 번 되풀이해도 끄떡없는 것은 그것이 신체 속에 스며든 것을 발한 게 아닌, 바깥에서 갖고 들어온 ‘기성품’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로부터 나온 말이 되풀이되는 상황에 청자는 배겨낼 수 없다. 격정에 휩싸여 일시적으로는 공격적, 단정적으로 굴 수는 있으나, 오래 해먹지는 못한다. 인간의 신체라는 토대에 기반한 말은 아주 약하다. 보다 휘청휘청거린다.

     

    <쥐라기 공원>에 등장하는 맬컴 박사(제프 골드블럼 분)는 유전자 변형으로 만들어진 공룡들이 만약 정말로 생명체라면, 상상도 못할 방식으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불길한 예언을 한다. 이 맬컴 박사의 대사가 ‘생명은 길을 찾아낸다(Life finds a way)’이다.

     

    살아있는 말은 반드시 생각 외의 방식으로 이제까지 누구도 말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약동하는 말은 그렇지 않은 말과는 달리 ‘반드시 이길 수 있는’ 동어반복을 하지 않는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한다. 생물은 고착적인 일을 할 수 없다. 더욱 복잡한 것이 됨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페이크 신체를 지지기반으로 하는 말과, 펄떡이는 육체를 그것으로 하는 말의 차이점은, 후자가 취약성을 띠고 있는 것에서 비롯한다. 이데올로기의 밀어붙이는 힘은 ‘할 수 있음’의 다양함으로 나타난다. 육체의 머뭇거림은 ‘할 수 없음’의 다양함으로 나타난다.

     

    분명히 머뭇거림은 무기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최종적인 인간성을 담보하는 것은 그 취약함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히라카와 군(가라테 사범 - 옮긴이)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2021-06-01 16:18)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
    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

    출처: http://blog.tatsuru.com/2021/06/01_16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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