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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습합론> 중국어판 서문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5. 15. 19:50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일본 습합론> 을 손에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10여년 간, <일본변경론> 과 <사가판 유대문화론>,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공저) 등의 세 권의 책이 중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번에 마오단칭(毛丹青) 선생의 번역으로 <일본 습합론> 이 출판되면 4권 째가 됩니다. 마오 선생을 비롯하여, 여태껏 중국어판 번역과 출판을 위해 힘써주신 분들께 우선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내가 낸 책이 130여권 정도 되는데, 그 가운데 4권이 중국어로 번역된 것에 대해서 흥미진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 네 권인가? 그것에 대해 약간 개인적인 해석을 써 보는 것으로 서문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 네 권은 <일본변경론> 과 <일본 습합론> 이 '일본문화론' 이라는 점에서 동일선상에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매책입니다. <사가판 유대문화론> 과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는 모두 유럽의 종교, 철학, 정치를 다루는 '입문서' 입니다. 이 책들이 꼽힌 이유는 중국에 '이러한 책' 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째서일까요. 그 가설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우선 <사가판 유대문화론> 입니다.
    유대인은 소수민족임에도 불과하고, 송나라 때부터 1000년 이상 중국에 정착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중국에도 역시 '유대 문화론' 의 전문가가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에 대해서는 거의 중국인보다 일본인의 관심도가 높습니다.

    이를테면, 일본에는 메이지 시대부터 '일유 동조론' (일본인과 유대인은 이스라엘에서 생겨난 형제 부족이라는 설) 이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으며 지금도 '헤브루 어와 일본어는 동족어' 라든가 '교토의 우즈마사는 유대인 도래민들이 살던 곳' 과 같은 설을 제기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습니다. 일본인은 대단히 유대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유대인 측에서는 일본인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만). 어쨌든 일본인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유대인에게 흥미를 느끼는' 집단인 것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역사적 경위로 형성된 멘털리티인지는 얘기가 길어지므로 생략(<최종 강의> 제 6강에서 논하고 있으므로, 흥미가 동하시는 분은 참조 바랍니다).

    <마르크스> 책은 좀 더 복잡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중국 공산당 중앙기율 위원회의 추천도서로 선정되었습니다. 중국 공산당 중앙은 당원들에게 일본인이 쓴 마르크스 입문서를 읽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상당히 이상한 이야기이지 않나요. 뭐가 어찌 되었든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걸고 있는 정당이니까요. 마르크스에 관해서는 중공이 일가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탓에, 중국에서는 그다지 마르크스 연구가 자유롭게 행해지지 못한게 아닌가 나는 상상합니다. 마르크스가 '정전正典' 인 이상, 반드시 공산당 공인의 '마르크스 연구가' 가 마르크스 해석을 전관하게 됩니다. 덕분에 비공인 연구자가 '저는 마르크스를 이렇게 읽었습니다만' 하고 자유롭게 마르크스를 해석하는 일에는 상당한 억압이 가해집니다. 그러한 사정이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국학' 인 이상, 9200만 명의 공산당원 가운데 그만 흥미를 잃고 마르크스를 전혀 읽지 않게 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큰일났습니다. 그 와중에, 마르크스를 읽지 않게 되어버린 공산당원에게 '마르크스는 재밌다구!' 열변을 토하는 책을 소개한다... 는게 사건의 전모가 아닌가 필자는 상상해 보았습니다(아니라면 미안합니다).

    어찌 되었든, 유대문화론과 마르크스론에 대해 '중국에는 <이런 책> 을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는게 내가 추리해낸 것입니다. 아마 그게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럼 <일본변경론> 과 <일본 습합론> 은 어찌 된 일일까요?
    <일본변경론> 이 꼽힌 이유는 비교적 간단히 풀이됩니다. 이는 단지 일본 문화론이 아니라, 중국 대륙/한반도/일본 열도/인도차이나 반도를 포함하는 광대한 화이질서권 가운데, '중화 제국의 변경민' 으로서 민족적인 정체성을 형성한 일본족 문화로서의 일본 문화를 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참으로 보기 드문 논지 전개 방식이었습니다.

    물론, 그건 내 독자적 의견이 아니라 같은 내용을 떠올렸던 선인이 많았기 때문입니다만,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아시아의 변방이다' 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강한 심리적 억압이 일어나, '변방의 문화' 로서 일본문화를 정면으로 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국 독자가 '화이질서 코스몰로지를 이루고 있는 두 개의 인접 문화' 로서 중국과 일본을 나란히 논하는 접근법에 신선함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일본 습합론> 은 <변경론> 발간 10년 후에 쓰여진, 말하자면 '속편' 입니다. 그저 이번에는 중국과의 관계라는 논점이 저 멀리 물러나 있습니다.

    <습합> 이란 토착 문물과 외래 문물이 '서로 뒤섞이는'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 고대로부터 근대까지 '외래 문물' 이란 거의 예외 없이 중국이나 인도에서 기원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토착 제도문물과 원융회통하여, 독특한 성질의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를테면, 중국의 통치 시스템은 거의 그대로 일본에 수입되었습니다만, 어째서인지 일본인은 '과거' 와 '환관' 제도만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 두 제도는 '국풍과 맞지 않다' 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시스템의 일부를 변경해 채용한 것도 '습합' 의 한 가지 방식이라고 말해도 좋을 겁니다.

    <일본 습합론> 에서는 '신불습합' 이라는 일본 고유의 종교 형식을 그 중심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내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신불습합이 '어떠한 것인가' 에 대한 것보다도, 1300년 지속된 종교적 전통이 메이지 정부가 발령한 '분리령' 이라는 일개 행정명령으로 인해 소멸한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1300년을 이어온 종교적 전통이 이제 막 생겨난(심지어 정치적•군사적 실력이 검증되지 않아 불안정했던) 정부가 발한 단 하나의 행정명령으로 사라지는 일은 보통 일어나지 않습니다. 종교생활이라는 것은 한층 깊이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것일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일본인은 말끔히 불교를 치워버렸습니다. 불상을 부수고 경전을 태우며 불교용품을 버렸습니다. 조직적인 저항은 일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묘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신지요?
    그리하여,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모르게 불교가 귀환해서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절에 가고, 불교식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기묘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신지요?
    이것은 일본인의 종교성이란 그렇게까지 깊이 그것을 내면화하지 않고, 외압이 있으면 비교적 간단히 '시스템 전수교체' 가 가능하다는 가설을 세우면 아귀가 맞습니다.

    실은 얼마 안 있어 일본은 1930년대에 '천황교' 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의 정치화된 종교에 빠져들고서, 패전과 동시에 그것을 말끔히 치워버렸습니다만, 딱히 그것이 트라우마적인 경험이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이렇다 할 심리적인 저항 없이, 외압에 따르며, '믿는' 대상을 주저 없이 전환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 일본인은 그러한 능력을 집단적으로 갖고 있는 게 아닐까요. 신불 습합을 버리고 천황 일신교로 전환한 것도, '시스템의 일부를 고쳐서 받아들였다' 는 의미에서는 일종의 '습합' 입니다. 패전 후에, 그때까지 열광적으로 받들었던 천황 신앙을 폐기하고 '천황보다 더 위에 미국 대통령이 있다' 는 속국 고유의 신앙 시스템으로 전환한 것도 일종의 '습합' 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인은 집단적으로 '전환' 할 때가 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스무스하게 이제까지 믿어왔던 신앙 대상을 버릴 수 있습니다. 이 빠른 적응력은 확실히 경탄할 만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인의 '습합 능력' 이 아닐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유한 것' 을 깊이 내면화해 혈육화하는 일이 없습니다.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고유한 것' 이라고 생각되어왔던 것이, 실은 표층에 부착해 놓았을 뿐인 '빌린 것' 이었다고 깨닫게 되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그래서, 상황이 바뀌면 주저 없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망설임 없는' 작법 그 자체 가운데 어쩌면 일본인의 '고유한 것' 이 깃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을 요즘 들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제까지 논의되어 왔던 일본문화론이(예를 들어 마루야마 마사오가) 상술한 것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내 책을 계기로 해서, 중국인 여러분이 마루야마 마사오나 가와시마 마사타케, 스즈키 다이세츠 그리고 니토베 이나조의 일본문화론을 접하게 될 수 있다면, 이 책을 쓴 보람은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중국인 여러분의 이웃 나라에는 '이런 사람들' 이 살고 있고, 중국 입장에서는 어지간해서 이해하기 힘든 독특한 집단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주실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중일 상호 이해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2021-05-06 16:18)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http://blog.tatsuru.com/2021/05/06_161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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