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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도 카즈토시 <읊어나가는 일본의 모습> 문고판 해설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6. 12. 11:25

    한도 카즈토시 씨의 <읊어나가는 일본의 모습>이 문고화된 것을 계기로 해설을 부탁받았다. 이 책이 애초에 단행본으로 나왔을 때의 담당 편집자로 말할 것 같으면 또한 내가 쓴 <거리의 부모자식론>기획자와 같은 야나기 씨였기 때문에 연이 닿은 것이군, 하며 수락했다.


    이 책은 한도 카즈토시 씨 최만년의 저술을 집성한 논집이다.

    필자로서는 한도 씨와 만나본 적이 없다. 저서는 상당히 많이 읽어보았지만, 결국 존안을 뵙는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한도 씨는 불귀의 객이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분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한도 씨처럼 동경 대공습을 경험했고, 전쟁이 끝나는 순간을 목도했으며, 편집자가 되어 옛 군인들의 구전을 채록했던 보기 드문 체험을 가진 이가 한 분씩 사라져간다. 그리고 전쟁을 직접 경험해본 세대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전쟁에 관한 기억은 흐릿해지고, 혹은 왜곡되며, 뒤바뀌고, 덧씌워지게 된다. 전쟁을 증언하는 말은 시간과 함께 불가역적으로 관념적으로 변하는 한편 가볍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이 사실을 한도 씨가 돌아가시기 전에 적잖이 염려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이 행간에 스며들어 있다.

    해설을 쓰는 필자는 1950년 도쿄 출생이다. 전쟁으로부터 이미 5년이 지난 후였지만, 어렸을 적에는 여기저기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었다. 1956년에 이 책에서 한도 씨가 쓰고 있는 바와 같이 ‘이제 전쟁같은 것은 없다’는 말을 사람들이 자랑스레 입에 담기 시작했을 때, 폭탄에 불탄 흔적이나 방공호는 적어도 생활권에서는 이제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이제 전쟁은 끝났다’라는 말에는 ‘그러니 더는 전쟁 얘기를 하지 말자’는 수행적인 메시지도 동시에 품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때까지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일상적이면서도 너무나 심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집 근처에 ‘아아야’로 불리는 상이 노파가 있었다. 아이를 좋아하는 친절한 할머니였지만 공습 때 한쪽 팔을 잃었다. 모친이 할머니에게 뭔가를 빌리러 가면 ‘우리는 가난하니 줄 수 없다’고 일축했다. ‘어째서 가난하지요’ 하고 물으면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라는 판에 박힌 답변이 돌아왔다. 친하게 지냈던 시게오의 아버지는 전 헌병 부사관이었는데 휴일에 낮술을 마시며 눈이 풀려서는, ‘되놈’을 일본도로 처치했던 얘기를 했다. 필자의 ‘다쓰루樹’라는 이름은 <교육 칙어>에 나오는 ‘황조황종의 덕이 넓고 깊이 뿌리내려樹ツル...’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름을 지어준 마쓰이 씨는 아버지의 친구인데 나카노 학교(정보 요원 양성 기관 – 옮긴이)를 나온 직업 군인이었다.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는 야위고 창백한 사람이었는데, 필자로서는 그렇게 ‘허무적’이라는 형용사가 어울리는 사람을 본 적이 전무후무했다. 아버지가 집에서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자면 때때로 전쟁 당시 얘기가 나왔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전쟁에서 졌으니 오히려 다행이잖은가’하는 때가 있었다. 그러자 좌중은 잠시 조용해졌다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초등학생 때 담임이었던 데시마 선생님은 쾌활하고 다정한 남자선생님이었다. 필자는 항상 선생님 곁에 붙어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선생님은 전쟁터에 나갔었나요?’하고 필자는 물었다. 선생님은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으응’했다. ‘선생님,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나요?’하고 거듭 물으니, 선생님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더는 말이 없었다.

    전쟁은 필자 세대에게 ‘당면한 현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엇인가의 결여’로서 다가왔다. ‘결여’라는 것은 노파의 한쪽 팔이기도 했고, 집안의 가산이기도 했고, 청년의 패기이기도 했고, 전쟁의 기억이기도 했다. 필자 세대에게 있어서 전쟁의 경험이란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는 느낌’인 것이었다. 그것은 현실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정도로서의 리얼함이었고, 또한 형태가 있는 결여였다.

    일본인은 가까운 사람들 중 많은 수를 전쟁 경험자로 두고 있다. 중국이나 한반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에 가담한 사람들이 있다(외조부가 그러했다). 특별고등경찰의 고문을 받은 사람이 있다(장인이 그러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심리적 부담감을 짊어진 탓에 특정 시기에 있었던 일에 대해 차마 말할 수 없게 된 인간이 있다.

    이 ‘결여’는 그것을 목도하는 일본인에게 있어 리얼한 것이었다. ‘리얼한 결여’라는 것이 있을 터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말로 전달하기는 어렵다. 지극히 어렵다. 그리하여 전달방식은 눈 앞에 있는 사람이 갑자기 ‘입을 굳게 다문다’든가 ‘안색이 새하얘진다’든가 하는 결여적 성격이 되어서, 그 육체를 입은 신체가 눈 앞에서 사라지면 리얼리티를 잃는다.


    1980년대부터 전쟁 경험자들이 사회의 제일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그들의 침묵은 일종의 ‘무게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전장에서, 점령지나 식민지에서, 혹은 후방의 일본 국내에서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꺼려지는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있었다는 것이 전후 세대에게 말 없이 전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몸소 보여주던 사람들이 죽기 시작함과 동시에 ‘무게감’은 효력을 상실해갔다. 그리고, ‘그때 그 장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해 알 리가 없는 연령의 사람들이 득의양양 떠들어댄다.

    역사수정주의자가 등장하게 된 것은, 일본도 그렇고 유럽 또한 그러한데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마치 전쟁 경험자가 죽기 시작한 것을 줄곧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전쟁에 대해 ‘본 것처럼’ 얘기를 하는 인간들이 슬슬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수정주의는 전쟁경험자들의 집단적인 침묵의 귀결이다. 어느 나라든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꺼려지는 일’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을 개인적 기억으로 마음 속에 묻어둔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말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조심스러운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의 형태로 받아들이자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했다. 다만, 거기에는 기간 한정적인 효과밖에는 없었다. ‘무덤까지 갖고 갈 기억’을 품고 있는 사람이 죽으면 동시에 기억도 사라진다. 그리고, 드디어 ‘없었던 일’이 된다. 그것은 독일도, 프랑스도,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한도 씨의 ‘역사 탐정’으로서의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본다. 한도 씨는 전쟁 경험자들이 상술하지 않은 채 무덤까지 갖고 갔을 터였던 기억의 귀중한 조각을 주워서 기록하는 것을 개인적 사명으로 여겼다.

    필자는 한도 씨의<노몬한의 여름>과<일본의 가장 긴 하루>를 이러한 유형의 다큐멘터리로서 더없이 뛰어난 작품이라고 여기고 있다. ‘뛰어난 작품’같은 비평적 형용 자체가 예의에 어긋나니, 오히려 ‘감사히 받아들여야 할 작품’으로 언급해야 하리라. 한도 씨가 이러한 책들을 쓰기 위해 얼마나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생각해 보면, 확실히 필자를 포함한 모든 독자들은 ‘감사히 읽겠습니다’ 하며 고개를 숙이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의 가장 긴 하루>는 애시당초 ‘오야 소이치 편저’ 명의로 출판되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한도 씨가 ‘저자명은 문제될 게 없다’고 결단한 이유는 한도 카즈토시의 문명을 떨치기 위해서가 아닌, 여기에 채록된 역사적 사실을 될 수 있는 한 많은 일본인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범용한 이가 할 만한 일이 아니다.

    이 책에서 한도 씨는 우리들에게 몇 가지 역사적 자료를 소개하는 한편 잊기 어려운 사람 몇 명(무쓰 무네미쓰, 이시바시 단잔, 시바 료타로, 고이즈미 신조)의 풍모를 전하고 있다. 그러한 기술이 체계적인 것은 아니다. 떠오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쓴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한도 씨는 여기서 결코 단순한 트리비아적 일화를 나열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글꼭지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것은, 한도 씨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귀로 들은 것을 자신만의 경험으로 끝내지 않고, 이것이 자신의 죽음과 동시에 망각될 것이라는 사실에 저항하기 위해 글로 남겨서 뒤에 올 세대에게 건네주려는 강한 의지이다. 그것은 한도 씨가 앞선 세대 사람들이 ‘몸소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고 전하지 않은 채 죽은 것이 현대 일본의 정치적 위기를 불러왔다는 통렬한 반성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필자는 본다.


    한도 씨는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은 40년 정도의 주기로 국운의 상승과 추락이 반복되고 있다는(시바 료타로가 <일본의 모습>에서 세운 가설)입장을 받아들여, 러일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비참한 패전까지 이를 때까지의 40년이라는 ‘추락’의 국면이, 1992년의 버블 붕괴로부터 40년을 앞두고 지금 다시 한 번 되풀이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예측을 말한다.

    “국가에 목표가 사라져가고, 국민이 중심을 잃어가는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또다시 망국의 40년째를 맞게 됩니다. 다음 세대가 그렇게 되지나 않을지 필자는 깊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33~34쪽)

    한도 씨의 계산이 옳다면, 다음 ‘패전’까지 앞으로 10년 정도밖에는 남지 않았다. 다시말해, 지금 일본은 1935년경의 다키가와 사건(교토대에서 발생한 사상 탄압 사건 -옮긴이)이나 국체명징운동 시국처럼 언론과 학술 영역이 ‘자기검열’ 분위기로 침잠해갔던 것에 부합하게 된다. ‘후기’ 에서도 한도 씨는 ‘일본의 리더’들이 “전후 70년여에 걸쳐 힘껏 쌓아온 의회제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를 희구하는 국민의 염원을 없던 것으로 만들고 있”는 상황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299쪽)

    10년 후에 닥칠 ‘두 번째 패전’을 막기 위해서 우리들은 과거의 실패를 교훈삼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의 실패로부터 배워라. 역사를 거울삼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는 한도 씨의 ‘유언’을 우리들은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2021-06-03 11:4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http://blog.tatsuru.com/2021/06/03_114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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