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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뒷북 치는 정치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4. 4. 14:59

    스가 요시히데 총리의 장남이 근무하고 있는 방송업 회사로부터 접대를 받아온 총무성(일본 정부의 방송통신 분야 담당기관 -옮긴이) 관료들이 줄줄이 처분되는 가운데, 야마다 마키코 내각홍보관이 사직했다. 야마다 씨의 경우, 애초에 '회식한 기억이 없다' 고 답변했지만, 총무성이 회식 사실을 밝히자 일변하여 사죄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회식의 상세 사항을 숨긴 채 감봉 조치로 얼버무리는 한편 스가 총리도 이를 거들려고 했으나, 그것마저 일변해 사임까지 몰리게 되었다.

    '일변하다'라는 단어가 스가 정권에서는 부쩍 눈에 많이 뜨인다. 당초에는 막무가내로 밀고 나가려 했던 일이었는데 여론의 비판에 직면해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며 이전 발언을 취소한 사례로는 Go To 캠페인, 징역 및 형사죄를 잔뜩 마련한 특별법안이 있어왔고, 이번 야마다 씨 인사 건은 이 상황을 지속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서 정권 기반이 취약한 탓이라는 분석 기사를 보았지만, 그것은 인과관계를 혼동한 듯한 기분이 든다. 오히려 스가 정권이 본질적으로 '뒷북' 체질이라서 입지가 좁아진 게 아닐까.

    인간은 운이 좋을 때 '선수를 취하고', 운이 나쁘면 '선수를 빼앗기는' 게 아니다. '선수를 빼앗기는' 인간은 반드시 선수를 빼앗긴다. 그것은 일종의 기질인 것이다. 말하자면 우선 '질문' 이 존재하는 차에 적절한 '대답' 을 하는 선후관계로 매사를 다루는 습관 그 자체가 '선수를 빼앗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어렸을 때부터 '선수를 빼앗기는' 훈련을 줄곧 받아오고 있다. '교사가 낸 문제에 정답을 써 내는' 학교교육의 기본 짜임새 그 자체가 실은 '선수를 빼앗는' 제도적 강요이기 때문이다. 교사의 물음에 옳게 답하면 보상이 있고, 틀리게 말하면 처벌받는 형식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것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그렇게 '구조적으로 선수를 빼앗기는 인간' 으로 자기형성한다. 그것은 회사에 들어간 뒤에도 변하지 않는다. 일이라는 것은 모두 상사가 낸 '과제' 나 '직무' 에 대해 적절한 '회신' 을 하는 형식으로 돌아가는 것으로써 그 달성 여부를 상사에 의해 검토받는 것이라고 믿는 샐러리맨들은 전부 '선수를 빼앗기는' 사람이다.

    어째서 일본 사회는 '선수를 빼앗기는' 훈련을 국민에게 이렇게나 열심히 주입시키고 있는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권력자에게 휘둘리는 것에 심리적 저항을 느끼지 못하는 인재를 육성하기 위함이다. '물음에 답하는' 방식에 꽉 잡혀 있는 채로 살아가면, '묻는 상위자' 와 '답해야만 하는 하위자' 사이의 비대칭적인 권력관계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다. 그래도, 그런 것이다.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오히려 자기가 상대편을 곤란하게 할 만한 질문을 되물어 기자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을 특기로 삼은 정치가가 있었다(지금도 있지만). 그들은 직감적으로 '질문을 하는 자는 선수를 취한 것이고, 정답을 궁리하는 입장에 몰린 자는 선수를 빼앗긴 것' 그리고 일단 선수를 빼앗긴 자는 이길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상대를 찍어누르는 데에는 제몫을 하지만, 그런 고식적인 기술을 숙달 해도 일국의 리더가 될 수는 없다. 리더란 자는 기자나 야당 의원을 상대로 이겨먹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상황의 '선수를 취하는' 역할을 맡은 자가 리더다.

    적절한 팬데믹 대책을 척척 세우고, 감염 확산을 미연에 방지하며, 권력자에게 알랑거리는 관료가 아닌, 간언을 무릅쓰는 유능한 관료를 중용하면 '그런 일' 은 일어나지 않는다. '안 일어나도 되는 일' 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통치자에게 있어서 '선수를 취'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총리는 끝까지 뒷북을 칠 수밖에 없다.

    (2021-04-03 07:40)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http://blog.tatsuru.com/2021/04/03_074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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