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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 로서의 <1984>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4. 30. 17:57
<월간 일본>(2021년 5월호)에 <1984>와 관련한 긴 인터뷰가 게재된 것을 옮겨 적어둔다.
— 우치다 님은 이번에 새로 번역 출간된 조지 오웰의 <1984> 해설을 쓰셨습니다. 이미 고전이 된 작품입니다만, 코로나 이후에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1984> 는 1948년에 발표된 디스토피아 소설입니다. 아시다시피 스탈린 시절 소련이 모델입니다. '빅 브라더' 라는 독재자가 군림하는 관리국가•감시사회에 살면서 체제에 의문을 품은 주인공이 경험하게 되는 위기와 몰락을 그린 것입니다.
나는 반세기 전쯤, 고등학생 때 처음 읽었습니다. 당시에는 솔직히 말해, 그다지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미 스탈린 비판이 이루어진 후이고, 전 세계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났던 시대였으므로, 이 판국에 선진국이 독재화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읽어보니, 소설 속 세계와 현실의 일본이 서로 경계가 흐릿해져서, 예전에 읽었을 때보다 오히려 공포감을 느꼈습니다.
<1984> 와 같은 사회는 지금 전세계에 생겨나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그 첫 발을 내딛은 국민 감시 테크놀러지는 급격한 진화를 이룩하여,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국가에 의한 국민통제가 점점 강화되는 <1984> 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1984> 에는 각 가정에 설치된 거대 TV '텔레스크린' 이 감시활동을 함과 동시에, 프로퍼갠더나 빅 브라더의 화면을 온종일 송출합니다. 고등학생 때는 '이런 TV가 있다손 쳐도 갑갑할 뿐이지 효과가 있을리 없다' 고 생각했었지만, 그게 그렇지도 않습니다. 동일 인물이 TV 화면에 반복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단순 접촉 효과' 에 의한 호감도가 늘어난다는 사회심리학 개념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정치가들은 정책을 성공시키려 하기보다도, TV에 자주 얼굴을 비춰 '정책이 성공하고 있는 척' 을 하는 게 지지율을 높이는 데 유효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도쿄와 오사카의 수장은 이 수법으로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근대 시민 사회는 '모든 개인이 자기 이익을 최대한으로 추구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를 전제로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이익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원이 규칙을 어기고 타인을 밀쳐가며 오로지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공공적인 것에 일정한 권력을 이양하여 공공재로 하여금 자산의 재분배를 맡기는 쪽이 낫겠다... 고 추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기적 동기를 기반으로 삼는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권을 부분적으로 양보하고 사재의 일부를 공공에 위탁하는 일을 받아들이리라고 로크와 홉스는 논지를 세웠습니다.
그랬을 터인데, 지금 세상을 지켜보고 있자면, 아무래도 인간은 자기이익 실현을 저해시키는 정책을 펴는 정치가를 대해도, 단순히 끊임없이 TV에서 흘러나오는 그 인물의 얼굴이나 목소리를 듣고서는 친근감을 느끼고, 그 정책을 지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우둔한 존재였습니다.
— <1984> 에는 일본의 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듯한 장면이 많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지경입니다.
'단순 접촉 효과' 는 바꿔 말해 '지금 여기서 자신이 접하고 있는 자에게 지배당함' 입니다. 어떠한 경위로 지금 여기서 이런 게 일어나고 있는가, 앞으로 자신에게는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 그런 것들에 관해서 과거와 미래에 걸친 시간의 흐름 가운데 생각하는 일을 방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1984> 속 세상은 과거와 미래가 없고, 현재밖에 없습니다. <1984> 에는 '진리부' 라는 관청이 그때그때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과거의 기록을 위조하고 있습니다. 당장 편의주의적으로 역사를 바꿔쓰는 것, 말하자면 '역사수정을 담당하는 부처' 입니다. 그런데, 지금 좋을 대로 바꿔쓰는 과거는 '과거' 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과거형으로 일컬어지는 현재' 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수정주의자라는 것은 '현재' 에 고착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고서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 라는 정점에 못박혀 과거를 기억할 수도,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는 인간들, 그것이 <1984> 적 사회의 주역입니다만, 그것은 현대 일본인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984> 에는 '이중사고(doublethink)' 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거짓임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거짓말하는 것, 바람직하지 않은 여러 기억을 망각하는 것, 필요하다면 다시금 망각의 저편에서 일시적으로 불러들여 기억하는 것' 을 이릅니다. 사고를 2중 바닥으로 구축해, 자기 편의대로 '망각' 또는 '상기' 하는 능력입니다.
모리토모•가케학원 의혹, 벚꽃을 보는 모임 스캔들, 그리고 총무성 접대 문제 등을 대하는 관료들은 일제히 기억을 상실하는 한편, 명백한 증거에 의해 추궁당하면 갑자기 기억을 되찾는 언행을 반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각한 것' 과 '말한 것', '예전에 말한 것' 과 '지금 말하고 있는 것' 이 뚜렷하게 모순되어 있는데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듯 합니다. 이는 참으로 '이중사고' 입니다.
'이중사고' 하에서는 언행의 앞뒤에 모순이 생기므로 논리가 파탄날 터입니다만, 그들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한 말이 논리적으로 파탄났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듯 보입니다. 그것도 당연히, 모순이란 '전에 말했던 것을 기억함' 을 전제로 합니다만, '전에 말한 것' 을 잊어버리는 인간에게는 모순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공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는 의미의 옛말로 '윤언여한(綸言如汗)' 이 있습니다. 한번 흘린 땀은 몸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만, 참으로 지금의 정치가나 공무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오자마자 땀이 되어 증발해버리는 것 같습니다.
— <1984> 에서는 독재정권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기 위해 '전쟁은 평화다' 라는 슬로건을 내걸기도 하고, 진실을 날조하는 관청을 '진리부' 로 칭하는 등 '언어의 파괴' 에 골몰합니다. 작중에서는 기존의 언어를 파괴하고 '뉴스피크(newspeak; 신어)' 라는 새로운 언어까지 개발해냅니다.
아베와 스가 정권도 '신어' 의 운용능력은 <1984> 못지않습니다. 일본을 전쟁가능 국가로 만드는 데 관련된 법안을 '평화안보법제' 라고 부르고, V-22(미군 수송기 -옮긴이) 의 오키나와 추락을 '불시착' 으로 바꿔 말하며, '모이기는 했으나 모집은 하지 않았다' 라든가 '정치책임이란 말의 정의는 없다' 든지... 아베, 스가 양대 정권 아래 정치가가 읊는 말은 전부 경조부박해졌으며 동시에 무의미해졌습니다. 그런데도 언론은 '신어' 를 있는 그대로 비판 없이 흘려보냅니다. 국민도 점점 정치가의 '신어' 를 흉내내기 시작했습니다. '개별 사안에 대해서는 대답을 유보하고자 한다' 든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다' 등의 상투구를 아이들마저 따라 할까 봐 걱정됩니다.
— 코로나 이후, 정부와 국민 모두 국가에 의한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만, 일본은 <1984> 와 같은 관리 국가가 될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일본이 <1984> 적인 관리 국가가 될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그러기에는 정부가 상당히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일본 정부는 IT와 관련해서 거의 모두 제도 설계에 실패했습니다. '마이넘버' 로 국민의 개인정보를 관리하려고 했었지만, 코로나 확진자 동선 관련 정보 앱인 'COCOA' 정도의 심플한 프로젝트조차 운용할 수 없는 정부가, 마이넘버같은 복잡한 시스템을 운용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설령 국민 감시 시스템을 만들려고 해도, 어차피 '파소나' 나 '덴쓰'* 가 정부로부터 전부 하청을 받고, 이문을 취한 뒤 다른 곳에 재하청하고, 그곳에서 또 구전을 취한 뒤 재하청... 하는 일을 계속 반복하고 나서, 최종적으로는 이름도 없는 작은 회사가 시급 1500 엔에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고, 그들이 야근과 마감 압박에 시달리며 만든 버그 투성이 국민감시 시스템을 납품하게 된다... 고 생각합니다.
(* 파소나는 비정규직 알선 회사, 덴쓰는 거대 광고대리점. -옮긴이)
그보다도 일본이 감시 사회를 만들고자 하면, 예전에 이미 활용한 바 있는 '도나리구미(隣組)*' 에 의존하는 체제로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웃의 사생활을 몰래 훔쳐보며 (수상한 행동을 발견했을 때 -옮긴이) '윗선' 에 신고하는 시민의 상호 감시는 관리비용이 가장 싸게 먹히기도 하고, '모두 다 함께' 를 너무나 좋아하는 일본인에게 딱 맞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에는 중국과 같이 '도나리구미隣組'라는 5호戶에서 10호씩 묶은 소단위 조직이 있었다. (...) 메이지의 정치가들은 처음에 이 조직을 폐지했다가 후에 다시 부활시켜 '도나리구미'라 이름 붙였다." 루스 베네딕트, 김윤식·오인석 옮김, 『국화와 칼』(을유문화사, 2008), 117~118쪽 -옮긴이).
— 애초에, 어째서 세계적으로 <1984> 화가 진행되는 것일까요.
국가에 따라 사정은 다르다고 봅니다. <1984> 의 모델은 스탈린 시대 소련입니다만, 스탈린은 그가 끌어내린 러시아 황제의 통치 스타일을 모방했고, 푸틴은 스탈린의 통치를 모방합니다. 중국이나 터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로부터 '제국' 이었던 나라들은, 공식적인 정치체제가 바뀌어도 독재적 지도자가 철권을 휘두르는 기본 스타일이 바뀌지 않습니다. 시진핑, 푸틴, 에르도안은 각국의 '빅 브라더' 입니다.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에는 '빅 브라더' 가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1984> 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포스트모던의 퇴락' (미치코 카쿠타니) 인데 이는 서구 독자적 문맥에서 나온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서구는 세상의 구조를 설명하는 '거대담론' 을 추구해 왔습니다. 일신교 신앙에서 뉴턴 역학까지, 그 이론이 무엇이 되었든 '무작위적으로 보이는 현상 뒤에 수리적인 질서가 존재한다' 는 직관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섭리', '절대정신', '역사를 관통하는 철의 법칙성' 등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곧 전 역사를 그 기원에서 미래까지 뒤덮는 '성스러운 창궁' (피터 버거) 이고, 우리는 그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는 한편 편하게 보호를 받기도 합니다. 그것을 거스르든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은혜를 받든지간에, 이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는 것은 '거대한 무엇' 이며, 그것을 정신분석은 '아버지' 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 '거대담론' 을 부정했습니다. '직선적인 이야기로서의 역사' 는 비웃어 마땅한 민족지(民族誌)적 편견임으로, 역사의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객관적 현실로 보이는 이 세상은 사실 주관적 편향으로 일그러진 세계상에 불과하다는 포스트모던의 지견은 매우 자극적인 것이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의 진실성과 정합성에 회의를 품을 것' 이라는 엄격한 지적 긴장을 우리들에게 요구했습니다.
그 요구 자체는 정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리 장기간에 걸친 지적 긴장을 배겨낼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인내력의 한계가 찾아옵니다. 포스트모던의 긴장을 버티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기어코 나그네쥐처럼 '반지성주의자' 의 무리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1)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인식활동에는 계급, 성별, 인종, 종교적 편향이 관련되어 있다 (맞는 말입니다).
(2) 인간의 지각으로부터 독립해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음, 그럴 지도 모릅니다).
(3)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관은 모두 주관적 망상이며, 그 점에서 각자의 옳고 그름은 구별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 못씁니다).
(4) 결국, 만인은 '객관적 실재' 같은 건 상관 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망상 속에 자신의 염려와 걱정을 놓아버릴 권리가 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림자 정부' 라든지 큐어넌 등의 음모론이 횡행하는 지금의 '포스트 트루즈 세상' 이란 (4)의 명제가 지배적인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반지성주의적인 세계관은 하루아침에 출현한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의 역사적 필연성이 있었습니다. '커다란 이야기' 를 부정해버린 이상, 이제는 '작은 이야기' 들의 분열로 귀결할 것이라는 예상은, 실제로 충분히 가능했을 터입니다.
8~90년대에 대학 수업에서 데리다나 리오타르를 읽고 나서 '뭔가 어렵고 잘 모르겠다' 고 생각한 작자들이, 자기들 수준으로도 이해할 수 있도록 포스트모던 철학을 다운그레이드해본 것이 '포스트 트루즈' 였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일본에서 진행되는 <1984> 화의 연원은 무엇입니까.
일본에서도 디스토피아가 확실히 현실화하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제국' 의 전통으로부터 유래한 것도 아니고, 서구처럼 '포스트모던' 에서 유래한 것도 아닙니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일본의 <1984> 화는 통치자와 국민을 포함해 일본인 전체가 집단적으로 '유아화' '우둔화' 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빅 브라더' 가 작위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일본의 경우는 말하자면 자연발생적인 <1984> 적 사회입니다.
유아는 '단순접촉' 한 자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현재' 라는 협소한 시간 의식 속에 갇혀있습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미래의 일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어째서 일본인은 이렇게까지 '유아화' '우둔화' 했는가입니다. 역시 원인은 2차대전 이후의 미일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 우치다 님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와 관련해, 부권제의 문제를 지적하는 맥락에서 "'아버지' 라는 존재에 의해 나는 지금 이런 인간이 되었다' 고 설명하는 이상, '아버지' 로부터 자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이는 전후 일본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인이 '유아화' '우둔화' 한 것은, '아버지' 로서의 미국에 계속 종속해 온 것과 상관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일본의 경우 조금 복잡한 얘기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일본의 권력구조는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영적 권위로서의 천황과 세속 정치권력의 '이중 초점' 구조입니다. 그리고 이 두 권력구도 가운데, 천황은 여성젠더화됩니다. (집안의 실권을 쥔다는 의미에서의 어머니와 같이 -옮긴이) 천황이 좀 더 근원적인 권력자입니다. 그래서, 일본인은 권력관계라는 것을 '부자관계' 라기보다는 '모자관계' 에 가깝게 이해합니다.
(* 야마다이고쿠 히메히코제邪馬台国のヒメヒコ制, 간파쿠 정치摂関政治, 막부정권武家政治, 평화헌법 아래의 입헌군주제戦後の天皇制立憲デモクラシー. 초대 진무천황은 기원전 660년 즉위로 알려져 있음 -옮긴이)
아베 정권이 그 전형입니다만, 그는 '인간관계에서의 거리감' 으로 사람을 판별하는 정치가였지요. 2007년 내각 때는 '끼리끼리 내각' 으로 불리기도 했고, 2013년부터는 모리토모•가케•벚꽃을 보는 모임 등으로 대표되는 연고정치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다시말해, 아베 신조에게 있어 권력관계란 자신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의 응석받이가 되는 한편, 자신의 곁으로 바싹 다가오지 않는 인간에게 냉담하게 대하는 이상 그 무엇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극우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세상의 모든 현상과 원리를 설명해줄 수 있는 '아버지 원리' 보다는, 어떤 인간이 얼마나 자신과 친한가를 따져보기 위한 '사상 검증'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흠칫할만한 위험한 얘기를 '믿사옵나이다' 신앙고백하며 가까이 붙는 인간을 '프렌즈' 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아베와 스가는 '빅 브라더' 가 아니라, 기능적으로는 '아주머니' 였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자유착 모델의 권력관계는 미일관계에도 꼭 들어맞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시라이 사토시 씨는 저서 <국화와 성조기> 에서, 일본이라는 나라의 본질이 "통치자가 국민을 어여삐 여긴다" 는 신빙으로 지탱되는 현상을 지적합니다. 메이지유신 후 얼마간은 '천황폐하는 자식 되는 억만창생을 가엾게 여긴다' 고 믿었고, 1945년부터는 '미국 대통령은 속국 백성인 일본인을 가엾게 여긴다' 고 믿어왔습니다. 일본 국민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것은 '어머니에게 사랑받는다' 는 안도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이 미국에게 바라고 있는 역할은 '아버지' 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미국을 '아버지' 로 간주했다면, 아들 일본은 '아버지' 를 흉내내어, '아버지' 가 참가하고 있는 게임에 자신도 어른스러운 선수로서 자리매김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는 미일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친밀한가' 를 염두에 둡니다. '아버지' 의 뜻을 헤아리려고 하기보다는, '어머니' 에게 사랑받는 것을 우선시합니다.
그래서 미일 정상회담에서는, 일본의 국익을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 일본의 의견을 얼마나 설득시킬 수 있는가보다도, 총리와 대통령이 골프를 친다든가, 밥을 먹는다든가, 서로 성(姓)을 떼고 부른다든가 하는 소식을 전하는 뉴스거리밖에 없습니다.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미국에게 일본의 이해를 관철하려는 것보다 미국에게 사랑받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일본 언론은 백악관이 한국 대통령과 일본의 총리를 어떻게 서로 달리 '대접' 해 주었는지를 요란하게 보도했습니다. 일본은 한국과 '워싱턴의 참된 맏딸' 자리를 놓고 암상스런 싸움을 걸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미관계가 잘 안 풀린다 치면, 일본인은 고것 참 쌤통이라며 이를 보도합니다.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에서도, 미국이 '아버지' 였다면 우선 미국의 세계 전략을 이해한 뒤에, 일본에게 있어서 최적의 국방 전략을 구상할 터입니다만, 실제로는 센카쿠에 대해 일본이 주안점을 두는 곳은, '미국이 일본을 지켜줄 것인가 아니면 버릴 것인가' 뿐입니다. 그것은 미국 의회가 결정할 문제라서, 일본인이 발을 동동 굴러 봤자 소용 없는 일입니다. 그보다는, 여러가지 시나리오 가운데 일본이 취할 만한 것을 이성적으로 시뮬레이션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마 '미국이 군사력을 지원하지 않는' 상황이 되면 일본인은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게 될 거예요. 그리고, '안보 조약 즉시 철폐' 혹은 '미군기지 즉각 철수' 를 외칠 겁니다. '버림받았다' 는 걸 알게 되면, 사랑은 불타는 증오로 바뀌게 되니까요.
'미국에게 사랑받는' 것을 최우선적인 국가전략으로 삼는다는 전제에 입각하면, 현재 일본의 정치상황을 훤히 알 수 있습니다. 스가 정권이 코로나 대비에 실패해 일본은 4차 유행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가 정권의 지지율은 40% 전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은 국민이 '스가 총리는 미국에게 사랑받고 있다' 고 믿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단지 '일본의 국익보다 미국의 국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정치가' 가 일본의 지도자가 되면 만사형통이므로 '스가 정도면 됐다' 고 생각할 뿐입니다. 이는 미국 측의 쿨하고 리얼한 계산으로부터 도출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그것을 '미국이 좋아해주고 있다' 는 식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야당의 지지율은 전혀 오르지 않습니다만 그것은 야당이 '미국에게 사랑받는' 노력을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더 리얼리스트가 돼라' 는 비판이 야당을 향해 날아듭니다만, 그것은 '그런 짓을 하면 미국이 좋아해주지 않는다구' 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 '유아화' '우둔화' 의 원인은, 모자 유착 멘털리티에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버지' 는 자식에게 '성숙' 을 요구하지만, '어머니' 는 아닙니다. '아버지' 의 억압에 복종할지 말지 갈등하는 사이 자식은 성숙해나갑니다만, '어머니' 가 요구하는 것은 어리광 그리고 착한짓입니다.
일본의 경우, 1945년 이전에는 천황을, 그리고 그 이후에는 미국 대통령을 '어머니' 로 삼으며 이들에게 부리는 병아리같은 응석을 통한 정서적 유대가 국민적 정체성의 기반입니다. 그것이 일본인의 시민적 성숙을 가로막고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일본만이 갖고 있는 대미 종속의 특수성도 여기에 존재합니다. 일반적으로 강대국에 종속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수탈당하고 굴욕감을 맛보는 경험인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은 미일 지위 협정이라는 불평등조약을 맺고서 국부를 강탈당하는 한편 속국 취급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가나 관료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들이 굴욕감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미국에 '복종•예속'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어리광•착한짓' 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군사적 정복자에 대해 '자신을 아껴주는 어머니' 로 착오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미친 짓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2차 세계대전의 경험이 결정적이었기 때문이겠지요. 너무나 처참하게 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본인은 자신의 손으로 나라를 재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쓴 게 아닌 미국이 써 준 시나리오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아성이란 무력함•수동성입니다. 유아는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하고 수동적인 존재입니다. 그 수동적 경험에 방점을 찍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멋대로 '태어나버리게 된' 근원적 사실입니다. 전후 일본은 정말이지 완전히 무력한 상태로 미국의 강권에 의해 '세상에 던져진' 트라우마적 경험으로 그 막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낳아준 부모' 인 미국에게 오로지 의지하고, 미국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밖에는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 주권이란, 자국의 운명을 스스로가 결정하는 자기결정권입니다만, 주권을 박탈당한 상태로부터 이 세상에 던져진 전후 일본이 주권국가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차 대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예전에 대일본제국이라는 주권국가의 국민이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권국가를 재건해야만 한다' 는 의무감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전후 세대는 태어날때부터 한 번도 주권자였던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권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통감할 기회가 없습니다.
— 심리학적으로 '아이' 는 '부친 살해' 로 인해 자립할 수 있습니다만......
그런 것입니다. '부친 살해' 는 있어도 '모친 살해' 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미국을 '어머니' 로 여기는 이상, 일본의 대미 종속 해방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한 고통스러운 사실을 포함해,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1984> 적 디스토피아로 가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구동하는 것은 '어리광' 에 기반한 권력구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도이 다케오가 <어리광의 구조> 에서 말한 그대로이군요.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따지고 보면,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의 사상>, 가와시마 다케요시 <일본인의 법의식>, 기시다 슈 <게으름뱅이의 정신분석>, 야마모토 시치헤이 <공기의 연구> 등의 고전적인 일본인론이 지적하고 있는 사항들은 대부분 현상에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명확한 분석이기는 하지만, 이 많은 책들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자신의 본질적 약함과 미성숙함을 극복해내지 못했습니다. 왠지 희망 같은 건 없는 결론이 나와버리고 말았네요.
(3월 29일 인터뷰어•구성 스기하라 히사토)
(2021-04-27 08:44)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http://blog.tatsuru.com/2021/04/27_0844.html'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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