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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이디엇크러시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4. 22. 19:00
로마법 격언 중에 "법에 대한 무지를 변명으로 삼을 수 없다" 가 있다. 어떤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은 죄를 면피할 도리가 될 수 있으나, 그 행위를 벌하는 법률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그 행위를 한 자에게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는 의미이다.
국회에서 행해지는 장관이나 공무원들의 답변을 듣자면, 그들이 이 법격언을 숙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민이 의혹을 품을만한 행위에 대해 '그런 일이 있었다' 고 말하면 그 책임을 져야만 한다. '없었다' 고 하면, 훗날 사실이 판명되었을 적에 허위답변을 한 것이 밝혀진다. 이러한 가운데 그들이 궁여지책으로 채택한 것이 '국민이 의혹을 품을 만한 행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라는 '사실의 무지' 로 하여금 변론의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
사실을 알지 못한 것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으니, 발뺌으로써는 유효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정치가나 관료가 변명을 반복해 농하는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중대한 사실에 언제나 여러번 기억을 상실하는 인간이 과연 국정의 요직에 앉을 수 있겠는가' 라는 우려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우려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걱정을 일소하기 위한 논리적 해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지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정치가나 관료의 직무 수행상 결격조건이 될 수 없다' 를 정부가 룰로써 공인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공인할 것도 뭣도 없이, 이 나라는 훨씬 전부터 이 새로운 규칙을 채용해 왔다. 기억을 점차 잃어버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으며, 사전에 인지한 질문에만 답변할 수밖에 없고, 불편한 질문에는 항상 노코멘트한다... 지금은 이러한 지적 무능이 공인으로서의 활동에 엄청난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곤란하게 할 만한 질문에는 아무것도 답변하지 않고 정면돌파하는 행동거지 그 자체가 '권력' 또는 '권력에 대한 충성심' 의 표징으로써 높이 평가받고 있다.
지적 무능이 지도자의 자질로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통치 시스템을 '이디엇크러시' 라고 부른다. '어리석은 자의 지배' 이다. 데모크러시가 과잉화되었을 때 출현하는 변이종이다.
프랑스의 청년 귀족 토크빌은 200년 전에 앤드류 잭슨 미국 대통령과 접견한 뒤, 그 인상을 이렇게 썼다. "잭슨 장군은 미국인들이 두 번이나 뽑아준 인물이지만, 성정은 포악하고 능력은 범용하며, 모든 경력을 검토해 보아도 자유로운 시민을 통치하기 위한 필수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그 무엇조차 찾을 수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
미국인은 종종 지도자 선택을 그르친다. 그것은 지성 면에서도 덕성 면에서도 자신들과 비슷한 인간을 지도자로 뽑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토크빌은 생각했다. 동류인 것이므로, 국민의 이해와 지도자의 이해가 일치한다. 만약, 지성과 덕성을 국민 수준보다 아득히 뛰어넘은 리더를 뽑아버리면, 그가 '이것이 국익을 최대화하는 길' 임을 믿고 어떤 정책을 단행한 경우에, 국민은 거기에 반대해도 중단시킬 수가 없다. 힘있는 리더는 민의에 반하는 정치를 할 수 있다.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범용함에도 불구하고 인민과 이해를 공유하는 리더를 뽑는 게 낫다. 범용한 통치자는 인민과 대립할 정도로 관철하고자 하는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밀고 나갈 실력도 없다.
"만약 통치자와 민중의 이해가 다른 경우, 통치자가 유덕한 것은 무의미하며, 유능한 것은 오히려 유해하리라." 그렇게 토크빌은 논했다.
과연, 일리가 있는 말이다.
데모크러시를 폄하하는 표현이 '중우정치' 인데, 그것은 '지도자와 국민이 똑같은 정도로 어리석음' 을 일컫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국인의 시선에 의해 정치가의 부족한 지력을 지적당할 수 있다 해도, 국내적으로는 지도자와 국민의 이해가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일본의 상황은 어떠한가.
위정자는 '어떻게 국력을 향상시키고, 국민의 건강과 안전, 유복함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 하는 방도를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최우선시하는 것은 자기 권력의 유지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의 지지가 필요한데, 어떻게 해야 공공복리에 이바지할 수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일단 뭐라도 해야겠기에, 사회에 이익이 되는지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부랴부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밖에 없다.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생각하는 게 불가능하므로 결국 자기 주위에 있는 인간의 이해득실만을 따지게 된다.
이것이 '이디엇크러시' 이다. 지도자도 유권자도 지성과 덕성이 그리 훌륭하지는 않으나 꼭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게 데모크러시와 비슷하지만, 지도자가 국민의 이해를 고려하고자 하는 노력을 방기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놀랍게도, 그것을 지지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
왜 지지하냐면, 이디엇크러시의 작동방식이 심히 심플하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국민보다 '권속' 의 이해를 고려한다. 그래서 '식객' 이 되면, 자기에게 돌아가는 떡이 생기고, 권력의 은택을 입을 수 있게 된다. 권력자의 연고자가 그대로 '공인' 으로 대접받고, 그들에게 공금이 투여되며, 공적지원이 집중된다.
'벚꽃을 보는 모임' 문제가 불거졌을 때 초대 기준을 추궁받은 당시 관방장관 스가는, '각계에 공적이 있는 사람을 폭넓게 초대했다' 고 설명했다. '각계에 공적이 있는 사람' 가운데에는 후원회 회원이나 아베 지지를 공언한 언론인, 연예인들이 대량으로 포진해 있었다.
그리하여 '권력자와 가까운 인간=공인=공적인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간' 이라는 새로운 기준이 확정된다. 예전에는 '국민의 이해' 라는 독립된 개념이 존재했다. 이제는 이미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다수의 이해' 같이 복잡하면서 큰 규모의 것을 구상할 지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개인의 이해' 를 우선한다. 이러면 얘기가 간단해진다.
나라가 망해도 자신의 사욕을 채울 수 있다면 딱히 난처해질 일이 없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늘어나, 과반을 넘을 때 일본의 이디엇크러시는 완성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1984> 적 디스토피아와는 정말이지 별종의 디스토피아다.
(2021-04-21 12:40)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
출처: http://blog.tatsuru.com/2021/04/21_1240.html'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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