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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주의와 억제주의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6. 8. 12. 10:21
김만리 씨가 주재하는 잡지 『이마주』 측으로부터 '야마유리 복지원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이 지난 시점에서의 의견을 요청받았다. 다소 긴 글을 기고했다.
사가미하라에서 발생했던 사건으로부터 10년이 흘렀고, 다시금 이 사건에 대해 논평해 주기를 김 씨가 부탁했다.
전에 쓴 바와 같이, 이 사건에서 필자에게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지점은, 사형수 우에마쓰 사토시가 범행을 일으키기 전에 아베 신조 총리와 오시마 다다모리 국회의장 앞으로 범행 성명서를 보냈다는 데 있다. 이는, 자신이 앞으로 행할 행위가 현 정권의 방침에 부합할 것임으로, 정권의 승인과 보호를 얻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담은 것이었다. 체포 후에도 우에마쓰는 '권력자가 지켜줄 것이므로 자신은 사형을 면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다.
물론, 이러한 행보는 그의 머릿속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는 비장애 시민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이므로, 없는 게 낫다는 우생 사상이 10년 전에 비해 오히려 더욱 깊이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미국에서 발상한 '가속주의(accelerationism)'라 하는 사조가 일본에서도 발양하고 있다.
가속주의라는 건 역사의 진도를 서둘러, 하루 빨리 '세상의 끝장'을 보고자 하는 초조감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세상의 끝장'이라는 어감이 다소 강하기는 하나,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이라는 책에서 '대홍수'라 부른 사태와 진배없다.
자본주의는 인간에게서 한없이 빼앗고, 자연을 한없이 파괴하는 시스템이다. 이렇게 계속 가다 보면 머지 않아 인류는 망하고, 지구는 생물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 인류가 망하면 자본주의도 살아남지 못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본주의에는 '생존 전략'이라는 게 없다. 자본주의는 단순한 시스템이지,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살아남는 것'을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는 생명체의 '제1 원칙'을 결여하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통찰했던 마르크스는 이 시스템이 끝내 세상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 예언했던 것이다.
사실, 장본인인 자본가들 스스로, 이러한 비인도적인 경제 시스템이 오래 못 갈 것임을 직감했다. 따라서 '홍수여, 내 차례 뒤에 오너라(Après moi, le déluge)' 하고 빌었던 것이다.
'홍수'의 임박은 19세기 영국에서도 이미 감지되었다. 그러나 홍수는 오지 않았다. 이는 인도적 활동가와 민주주의자 등의 노력으로 인하여 '공장법'이 제정되고, 노동시간에 제한이 부과되고, 아동 노동이 금지되며, 사회복지 시스템이 도입되고, 사회적 약자도 공교육과 의료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비교적 인도적인 제도'가 도입된 덕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에 약간의 '생명체'적인 요소가 가산되었다. 그리고, 참으로 공교롭게도, 자본주의를 다소간의 인간적인 요소로 가장함으로써, 자본주의는 명줄을 이어버렸다는 것이다. 21세기가 되어도 아직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살아있는 이유는, 그러한 인도적인 제도가 자본주의의 생명유지장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이 가속주의의 견해이다. 따라서, '생명 유지 장치를 떼라'고 그들은 주장하는 것이다. 인도적인 활동을 전부 관두라, 는 것이다. 사회보장제도, 공교육, 공공성 의료, 다 폐절하라는 것이다. 이따위 것들이 있으므로 사회적 약자가 목숨을 잇고 있다. 없어지면, 약자는 스러진다. 약자가 다 사라지면 수탈의 대상을 잃은 자본주의는 스러진다. 이제 수탈할 대상도 없고, 상품을 구입하는 소비자도 없어진다. 시장이 해체된다. 자본주의가 어떤 식으로 끝장날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불문곡직 '대홍수'가 모든 것을 쓸어낸다. 그러고 나면 한 줌의 '초-강자'만이 살아남고, '포스트 자본주의' 단계에 들어간다. 이로써 새로운 인류사가 개막한다.
정말이지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하여 대박나고, 천문학적 개인 자산을 획득한 인간들의 마음에 쏙 들만한 아이디어이다. 그런데 이런 망상적인 정치 사상에 갈채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심지어 사회적 약자 가운데에). 그들은 또 그들대로 울상이다. "이런 세상은 이제 지긋지긋해." 이딴 세상이 이어질 바에야, 전부 무너져 내려라. 그러한 절망적인 심상이 현재 일본 사회에 상당히 넓게 만연해 있다는 점은 누구나 불안감을 품으며 감득하고 있을 터이다.
전쟁을 쉽게 보는 분위기도 그렇다. '중국 상대로 일전을 불사한다' 하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은 미군 측이 '재래병기만으로 인민해방군과 전쟁하면 진다'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2017년부터 항시 공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모르는 척 하고 있다. 세계 최강 미군이 핵무기를 쓰지 않으면 중국에게 이길 수 없다고 명언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핵전쟁 승리의 대가로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의 몇 도시를 잃게 되지만).
일본은 망해도 된다는 각오가 (무의식적으로라도) 없으면 '전쟁 가능한 국가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내버려두지 못한다.
사실, 1930년대 대일본제국 전쟁 지도부에게는 '메이지 유신 체제를 일소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1928년까지 육군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끄는 조슈 군벌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 권력을 잃음과 동시에, 보신전쟁에서 반란군으로 몰린 자제들이 물밀듯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조 히데키, 나가타 뎃잔, 아이자와 사부로, 이시하라 간지, 이나가키 세이시로, 아라키 사다오, 고이소 구니아키... 모두 옛 반란군이거나 막부 신하의 자식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단호한 성격을 띤다. 1921년 바덴바덴 밀약에서 확약받은 대로, 유신 일등공신이 행하던 관료주의 폐절이었다. 다시말해, 만주사변부터 패전까지 육군 상층부는 전쟁을 도구적으로 끌어대, 메이지 유신 이래 형성된 일본의 통치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을 일단 제 1원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도쿄재판에서 '전쟁 목적'을 묻는 검찰관에게 25명의 A급 전범들은, 단 한 명도 그 질문에 답할 수가 없었다. 전쟁은 그냥 시작되어 버린 것이라고 그들은 서로 짠 듯이 말했다. "국책이 적어도 결정된 이상, 우리는 그 국책에 따라 노력하는 게 우리에게 부과된 종래의 관습이며, 또한 존중되는 방식입니다" 하고 고이소 구니아키는 변호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를 '기성 사실에의 굴복'이라고 불렀다. "이미 현실이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결국 현실을 시인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군국지배자의 정신형성』)
그러나 필자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감춰둔, 말할 수 없는 '전쟁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목적이 마루야마 마사오가 보기에 "기성사실에의 굴복"이었던 건, 그들이 야기했던 것이 너무나 거대한 운동이며, 통제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동기의 왜소화와 결과의 거대함 사이에 존재하는 압도적인 비대칭성에 있었던 것이다. 제방에 약간만 칼집을 냈더니, 문득 발목께에서 제방이 결괴하여, 탁류에 집어삼켜져 버렸다...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시면 알지도 모르겠다.
전쟁지도부 사람들은 결코 현실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던 게 아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결국 현실이 통제불가능해질 것이다 하는 예측을 가진 채로 현실에 손을 뻗쳤던 것이다. '대홍수의 도래를 재촉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전쟁목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그정도로 허무적인 전쟁목적에 따라 움직였다는 사실을 그들 자신이 절대 떠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위대의 핵무장을 검토할 때라고 발언하는 사람이 총리실에도 있고, 국무위원 가운데에도 있다. 이들 역시 '대홍수'를 바라 마지않는 가속주의자이다. 다카이치 사나에처럼 무능하고 성악한 정치가를 총리 자리에 앉힌 사람들 (자민당에 투표한 2700만명의 유권자들과 당대표 선거에서 다카이치에게 표를 던진 당원과 의원들) 역시 태반은 잠재적인 가속주의자일 거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다카이치 사나에라면 뭔가 바꿔줄 것 같다'고 지지 이유를 표명했던 유권자가 산재해 있는데, 이 경우 '바꾼다'는 것은 '부숴버리는' 의미 외에 달리 아니다. 사실 다카이치는 중일 관계를 부수고, 화폐 가치를 부수고, 정치 윤리를 부쉈으며, 의회제 대의민주주의를 부쉈다. 다카이치는 '변화'를 바랐던 유권자들에게 그들의 기대대로 보답해준 것일 테다.
앞으로 일본이 어떻게 될지 필자로서는 모르겠다. 중국 상대로 전쟁을 정말로 벌일 속셈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진다. 미군도 안 오고, 한국군도 안 오며, 나토도 지원하러 안 온다. 두 번씩이나 패전한 일본인이 얼만큼 되는 손실을 입을지, 필자로서는 상상조차 안 간다. 필자가 확언할 수 있는 건 '중국을 전쟁으로 손봐주겠다' 하고 부추긴 인간 가운데 단 한 명도, 패전 책임을 지지 않으리라는 것뿐이다.
아니면 다카이치 정권을 보고, 일본의 정치문화가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걸 자각한 사람들이, 다시금 제대로 된 민주주의로 고쳐 세우는 데 앞장설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 다만, 그렇게 할 때도 '홍수의 도래'와 같은 메타포를 구사해 과장된 정치적 변화로 표현하지 않기를 간곡히 바란다. 제발 극적인 변화를 추구하지 말았으면 한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앞에 놓인 우선적 정치 과제는 '과정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극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가속주의적인 심성을 가라앉히는 데 있기 때문이다.
될 수 있다면, 나직하고 차분한 언어로, 초조감에 있는 돈 없는 돈을 몽땅 걸다시피 하려는 사람들에게 '그와는 다른, 좀 더 천천히 살아가는 법도 있다'고 전하고 싶다.
가속주의에 대항하는 것은 '억제주의(prudentialism)'이다. 과학적 억제주의(techno-prudentialism)란, 생성형 AI처럼 그것이 가져다 줄 혜택보다도, 그것이 초래할 리스크가 큰 그런 첨단 기술의 개발에는, 가급적 억제적이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지금 유럽을 중심으로, 생성형 AI 개발의 억제, 학교 교육 현장에서의 태블릿 사용 억제, 연소자의 SNS 금지 등 명백히 시장의 요청을 물리치는 정책이 채택되고 있는 것은, 그 조짐이다.
억제주의가 지금 가장 필요한 태도라고 필자 역시 생각한다.
잠깐 기다려. 머리를 식히도록 해, 이다. 그러한 '어른의 언어'를 말해주는 사람이 너무나 적다.
(8월 2일)
(2026-08-02 09:23)
글쓴이: 우치다 타츠루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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