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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생한테 받은 질문 6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6. 4. 28. 12:34
'자신'이라는 틀에 저 자신을 박히게 하려는 힘이 주위에서 발생될 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감각이 무척 두렵습니다.
'틀(型)'이란 것은, 상당히 다루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틀은 사람을 해방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속박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틀에 박히게 됨에 따라 능력이 높아지거나 행동범위가 넓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의사선생님은 모두가 똑같은 틀에 박혀있습니다. 연기하는 것이지요. 하얀 가운을 입고, 화면을 바라보며, 청진기를 가지고서요. 국가시험에 갓 합격한 신참 의사도, 50년 임상 경험을 가진 명의도 환자 눈에는 '똑같은 의사'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환자는 진단을 진지하게 듣고 처방에도 따릅니다. 신참이나 베테랑이나 '틀'을 잡고 있으면 '똑같은 수준의 의사로 보이는' 탓에, 의료는 높은 수준을 지닐 수 있습니다. 환자는 의사의 수준을 자기책임으로 판정할 의무에서 해방됩니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환자 입장에서는 긍정적입니다. 한창 병이 나서 정신이 없는 때에 '자, 당신 앞의 의사는 과연 수준이 얼마나 될까요. 당신을 치료할 만한 기술과 지식을 갖고 있을까요. 치료를 받아도 괜찮을까요. 자, 자기책임으로 결정하세요. You have the choise' 같은 말은 듣고 싶지 않죠?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는 게 틀에 박힌다는 것의 효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공감'을 표하는 말에는 empathy와 sympathy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엠파시는 '상대의 내측에 들어가서 상대의 몸이 되는 것', 심파시는 '바깥에서 상대의 몸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아픔을 같이 한다'와 '아플 것 같다고 생각한다'의 차이입니다.
'틀에 박히는' 것은 엠파시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엠파시를 달성한다'는 것은 '자신이 아닌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요? '상대의 몸이 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그정도로 '무서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야, 엠파시와 심파시는 종이 한 장의 차이니까요.
무릎을 다쳐서 아파하는 사람을 보고서 '엠파시를 느끼는 사람'과 '심파시를 느끼는 사람'은 대체로 양쪽 모두 '밴드를 꺼내주는' 리액션을 취하지요. 굶주리는 사람을 보고서 양쪽 모두 '빵 먹을래?' 하는 유형의 리액션을 취하지요. 양쪽 모두 바깥에서 보면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틀'이라는 것에, 조금 유연하게, 다의적으로 접근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저는 무도 도장을 주재하고 있습니다. 도장에서 수련을 할 때, 반드시 도복으로 갈아입습니다. 그리고, 정면에 절을 하고, 사범에게 절을 한 다음 수련을 시작합니다. '의식'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허례만은 아닙니다. 이는 '자 여러분. 지금부터 "수련 모드"로 전환해 주세요' 하는 지시입니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이 '의식'을 행하면, 모두의 마음이나 신체가, 그때까지의 '일상생활 모드'에서 '수련 모드'로 바뀌는 것입니다. 호흡하는 방법도 바뀌고, 오감의 감도도 바뀌며, 눈매와 움직임도 바뀝니다. 그런 식으로, 평소 그대로였으면 상당히 접근하기 어려웠을 심신의 상태로 이행할 수 있습니다.
수련 중 제가 하는 지시는 상당히 관념적입니다. '풍운을 타서 자재를 얻어라', '장을 호령하는 기의 흐름에 타라', '아집을 버리고 자재를 얻어라'등. 이것이 대체 무엇인지 보통 일상생활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입니다. 이것이 그래도, 신기하게도 '도장이라는 액자틀' 속에 있으면, 의미가 통하게 됩니다. 왜냐면, 실제로 모두가 움직임이 싹 바뀌니까요. 하지만 수련이 끝나고 도복을 벗고 도장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을 때는 '액자틀'은 이제 벗어나 있고, 평범한 감각으로 돌아갑니다.
이 '전환'의 실마리로서 '틀'을 이용하는 건, 매우 유효합니다.
질문하신 분은 '틀에 박힌다'는 수동태 표현이 아마 신경쓰이시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틀'은 자기가 골라도 되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가 고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활동 영역이나 감정 생활을 넓히고, 깊게 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유효한 수단인 겁니다. '틀에 박힌다'는 건 그런 겁니다.
문제가 되는 경우는 외부에서 무리하게 강제된 '틀'이지요. 이쪽 사정은 듣지 않고서 맘대로 '이 틀에 박혀라' 하고서는 '낑' 넣어버리지요. 이 경우의 '틀에 박혀라'라는 명령이, 자신을 넓힌다든가 깊게 한다든가, 활동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한정시키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주술'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틀에 박히게 됨으로써 살아가는 힘을 잃습니다. 그러한 '틀'에 대해서는 똑부러지게 '싫다'고 대응해야 한다고 봅니다.
'틀에 박히는 것' 그 자체에 옳고 그름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틀에 박히므로서 자유로워지고, 사는 힘이 높아지는 경우도 있고, 틀에 박히므로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사는 힘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입니다.
도장에서 도복을 입고, '가타 수련'을 하는 것 역시 '틀에 박히는' 것이며,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는 것도 '틀에 박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따라 그때 시점까지의 자신의 모습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생기고, 그 이전보다 활동영역이 넓어지며, 깊은 삶의 방식이 가능해진다면, 이것은 '틀에 박혀서 다행이다' 하는 선택이 됩니다.
반대로, 동료들 내부에서 자신의 몫으로 배분된 '캐릭터'를 강요당해서, 주어진 '캐릭터'에서 벗어난 언동을 하면, '너답지 않은 말을 하지 마', '너답지 않은 행동 하지 마' 하는 식으로, 활동영역을 좁히고, 살아가는 자유를 잃게 만드는 것이라면, 이는 '틀에 박혀서 나쁜 일이 일어났다'는 사례가 됩니다.
하지만, '캐릭터' 그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삐뚤어지는 경우입니다. 중학생까지는 얌전한 우등생이었던 애가,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을 계기로 '나 상당히 불량하다.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 하고 가짜 자기소개를 하고, 그대로 그 재학중에 그 '캐릭터'로 밀고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꽤 많습니다). 주위에 있는 반 친구가 '아, 그런 애구나' 하고 그만한 대접을 해주면, 그떄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신을 연기할 수 있습니다. 이거, 꽤 즐겁습니다(사실 저도 해봤습니다).
그런 고로, 부디 '틀'을 자유자재로 다루어서, 자신에게 가장 즐거운 방향을 찾아보세요.
(2026-04-28 10:35)
글쓴이: 우치다 다쓰루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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