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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려읽기) 러시아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인용 2025. 12. 27. 12:38

    러시아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현상이 있다. 이건 정말 눈에 잘 띄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를 깊이 다루고 싶다. 또한 좀 더 잘 이해될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편지에 있는 구절 가운데 내가 여러번 읽은 것이 있다. 그 구절은 사람을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 이런 구절이다. “많은 것들이 낡아져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지금 진부해 보이는 수많은 것들이 궁극적으로 새롭고 강력하며 영원한 것이 될 수 있다.”

     

     

    자기 전문 분야에서 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 회의에 참석하여 결정을 짓고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현상이 생긴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런 건달들이 드디어 행정적인 직위에 오르게 되면 온갖 권력을 동원하여 자기들의 하찮은 작품을 선전하면서 뛰어난 음악을 질식시키고 매장해버리는 것이다.

     

    글라주노프의 경우는 이와 완전히 반대였다. 그는 자기 이익을 챙기지 않았다. 그는 원장이자 교수로서 자기 봉급을 가난한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그가 보낸 저 유명한 추천서가 몇 장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추천서는 사람들에게 직장과 빵, 어떤 때에는 생명까지도 구해주었다.

     

    지금 회상하는 이야기가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구태여 생각하려고 들지 않는 복합적인 정신적윤리적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추천서에서 글라주노프는 추천 대상에 관한 자기의 솔직한 판단을 털어놓은 적이 상당히 많았고 충분한 근거를 들어 그 사람을 칭찬했다. 그가 오로지 동정심에서 사람들을 도운 경우는 그보다 더 자주, 훨씬 더 자주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낯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때로는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 사람들은 절망적인 처지에 빠져 있었고 인생의 무게로 짓눌려 있었지만 그는 지체 없이 그런 희생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보살폈다. 글라주노프는 몇 시간씩이나 그런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그들의 처지를 헤아렸다.

     

    그가 한 일은 청원서에 서명하는 것 이상이었다. 즉 그런 사람들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거물들을 만나러 다닌 것이다. 글라주노프는 남편도 없이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어떤 여자 성악가가 목소리는 별로 좋지 않더라도, 그녀를 오페레타 악단의 합창단에 취직시킨다고 해서 위대하고 성스러운 예술에 그다지 큰 피해가 가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대인 음악가라면 글라주노프가 자기들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 거주 허가서를 얻어주려고 함께 쫓아다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글라주노프는 불쌍한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자기 앞에서 연주해보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 살 권리가 있으며 예술가가 어디에 살든지 그로 인해 예술에 피해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글라주노프는 이런 행동을 두고 생색을 내거나 거룩하고 정의로운 분노를 느끼는 척하지도 않았다. 그는 소소하고 비참한 사람들의 문제를 다룰 때 최고의 행동 원칙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런 고상한 원칙은 더 중요한 인물이나 더 중요한 사건들을 위해 유보해두었다. 길게 보면, 결국 인생에서 모든 일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일로 나뉠 수 있다. 중요한 일이 닥치면 원칙을 지켜야 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면 그냥 넘어가도 된다. 이런 것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열쇠일지도 모른다.

     

     

    조셴코가 해준 이야기 하나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사건이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 그는 그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조셴코는 티냐코프(Tinyakov)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시인을 알고 있었다. 그는 괜찮은 시인이었고 재능도 꽤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배신과 출세와 눈물에 대해 상당히 정교한 시를 썼다. 그는 미남이고 멋쟁이였다.

     

    혁명이 일어난 뒤 조셴코가 그를 다시 만났을 때 티냐코프는 자기의 최근 시집을 한 권 주었다. 거기에는 사랑이나 꽃이나 기타 고상한 소재에 대한 시는 하나도 없었다. 뛰어난 시들이었다. 조셴코가 보기에 그 시들은 천재적인 작품이었다. 조셴코는 비평가로서는 까다로운 편에 속하는데도 말이다. 아흐마토바조차도 조셴코에게 자기 산문을 읽히려고 줄 때는 불안해한다. 티냐코프의 새 시들은 시인의 배고픔을 다루었다. 그것이 중심 주제였다. 시인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먹을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어떤 저질적인 행동이라도 하겠다.”

     

    그 말은 직접적이고 솔직한 선언이었는데 단지 선언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시인의 행동이 걸핏하면 자기 말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티냐코프는 그렇지 않은 드문 예외였다.

     

     

    보로딘의 아파트는 미치광이 소굴이었다. 이건 과장이 아니다. “우리의 공동 아파트는 미치광이 소굴이야라는 말처럼 우리 시대에 한창 유행했던 시적인 비유도 아니다. 아니, 보로딘에게 집은 직유도 은유도 아닌 말 그대로 미치광이 소굴이었다. 그의 집에는 언제나 한 떼거리의 친척들 아니면 혈연 관계도 없는 일반 빈민들 또는 병이 들었거나 심한 경우에는 미쳐버리기까지 한 방문객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 일은 다반사였다. 보로딘은 그런 사람들을 안달복달하며 돌보고 병원에 입원시키고 병문안도 갔다.

     

    이것이 러시아의 작곡가가 살고 작업하는 환경이다. 보로딘은 짧은 토막시간에 틈틈이 작곡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방마다 소파 위 아니면 마룻바닥에서 누군가가 자고 있다. 그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피아노도 치지 않았다.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보로딘을 찾아가서 이렇게 묻는다. “쓴 게 좀 있는가?” 보로딘은 대답한다. “그래, 있어.” 그런데 그 썼다는 것은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는 또 다른 편지다. 이런 종류의 농담이 이고르 공을 오케스트레이션할 때도 나왔다. “자네, 그 부분을 옮겼는가?” [‘옮기다는 뜻의 이 transpose라는 단어에는 편곡하다는 뜻도 있다.] “그래, 피아노에서 책상 위로 옮겼어.” 이런 형편인데도 사람들은 러시아 작곡가들이 왜 작곡을 그렇게 소량으로 하는지 궁금해한다.

     

     

    지금도 나는 자문한다.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그때의 미국 여행이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내 생각으로는 영화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가끔 나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베를린의 함락이나 잊을 수 없는 1919같은 그렇고 그런 영화의 음악을 맡을 수 있습니까? 게다가 그런 어울리지 않는 영화로 상까지 받다니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음악을 만들어준 그런 부끄러운 사업의 리스트를 더 길게 댈 수도 있다. 예컨대 실전 훈련 사상자라는 제목으로 레닌그라드 음악홀에서 열린 레뷔[revue, 다양한 종류의 프로그램을 뒤섞은 시사 풍자 코미디] 같은 것도 있다. 또 대공 방어를 격려하기 위해 노래와 춤이 활용되었는데, 나는 그런 데에도 노래를 쓰고 폭스트롯 같은 것도 지어주었다. 그 밖에도 더 있다. 체호프는 흔히 말했다. 자기는 밀고 투서 외에는 어떤 글이든 썼다고. 아시다시피 나는 물론 그의 말에 찬성한다. 나의 입장은 전혀 비()귀족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