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가려읽기) 인기 없을 각오
    인용 2025. 7. 19. 10:01

    (...) 땅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땅은 우자와 선생이 사회적 공통자본 목록에서 첫 번째로 꼽은 항목이다. 땅은 정책적으로 관리되어서도, 시장에 맡겨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토지를 관리할 '전문가'는 누구일까. 토지의 관리는 우선적으로 '시민'에게 맡겨야 하지 않을까? 시민이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공동체의 통합 원리나 제도 설계에 대한 '지식을 갖춘 자', 그러면서 실제로 그 공동체에서 살아 숨 쉬는 자를 말한다. 시민은 '공동체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이념의 차원과 '내일 먹을 쌀'을 걱정하는 실생활의 차원에 동시에 속해 있다. '사회는 이래야 한다'는 논의에는 '그런데 그것이 내가 가진 시간과 여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인가?'라는 물음이 늘 따라붙는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옳다 해도 "그럼 너부터 해. 여긴 낭떠러지야. 여기서 뛰어"라는 다그침에 주저하게 된다면 그것은 목표로 내세울 만한 일이 아니다. 날것의 몸을 가진 자신이 맡을 수 없는 일을 남에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사회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려면 그 목표를 향한 첫걸음을 내가 지금 여기서 내딛을 수 있는지부터 자문해 보자. 그러게 생각하면 '사회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을 가볍게 뱉지 못할 것이다.

     

    그거면 됐다고 본다. 어느 정도는 꿈같은 말도 하지만 생계 걱정을 내려놓을 수는 없다는 '이도 저도 아닌 태도'야말로 시민의 장점, 곧 시민의 전문성이기 때문이다. 토지 관리는 그런 '이도 저도 아님'을 탁월하게 실천하는 시민이 우선적으로 맡아야 한다. 땅은 애초에 사회적 공통자본이며 사유해서는 안 된다는, 속세를 벗어난 '이념'을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생활인으로서 그 땅에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계' 요청도 함께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토지 사유의 최소한의 조건이다.

     

    까다로운 이야기를 해서 죄송한데, 아무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거품경제 시절에 토지는 화폐 대용품으로 매매되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아파트가 주식처럼 거래되고, 매매된 토지에 빌딩이 올라가고, 아무도 살지 않는 사이에 헐리고 또 빌딩이 들어섰다. 화폐 대용물로서 토지를 사고 팔면 그렇게 된다. 나는 내 집 소유에 대한 흥미를 그때 잃었다. 그러다가 땅을 사서 집을 지을 마음이 생긴 것은 땅을 살 돈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사회적 공통자본으로서의 토지 관리 및 운영'이라는 전망이 내 나름대로 섰기 때문이다. 토지를 사유화하거나 축적하지 않고 개방적・공공적 형태로 사용하는 방도를 놓고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증여된 것을 사유화・축적하지 않고 반드시 적절한 수탁자에게 패스한다'는 믿음은 '수탁자'라는 입장을 기초로 한다. 수탁자가 되는 것, 그것이 시민적 성숙의 요건으로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과해야 하는 조건이다.


    시라가와 시즈카가 '사상'이라 부른 것과 스즈키 다이세쓰가 '종교'라 부른 것은, 명칭은 달라도 내용은 다르지 않다. 둘 다 세계의 양태를 근원적으로 포착하여 인류에게 삶의 방향을 안내하고, 나아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살아가는 힘을 부활시키려는 말을 하고 있다. 사상이든 종교든 혹은 학술이든 예술이든,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것은 '부귀한 신분'이나 '향락주의'나 '현세 이익'으로부터는 나오지 않는다. 두 노스승은 우리에게 이런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하려는 이야기의 전제이다. 내가 문제로 삼는 것은 '진짜 혹은 진정한 재능'이다. '자기평가의 하향 수정'에 관한 원고를 '진짜 재능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한 이유가 뭘까? '진짜 재능'을 다른 한편의 극단에 두지 않으면 '재능'에 관한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소리 높여 논하고 그 성공과 실패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사실 '어떻게 되든 별 상관없는 재능'이다. '부귀'를 가져오고 '향락주의'나 '현세 이익'과도 궁합이 잘 맞는 것은 '어떻게 되든 별 상관없는 재능'이다. 그것은 사상과도 종교와도 관계가 없다. 나는 그런 재능은 '있든 없든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대인은 바로 이 '있든 없든 상관없는 재능'의 많고 적음에 집착하고 등급 매기기에 열심이며 우열과 승패를 소리 높여 말한다. 지금 이 세상에서 '재능'이라고 불리는 것은, 한마디로 '이 세상의 시스템을 숙지하고 잘 활용함으로써 자기 이익을 증대시키는 능력'이다.

    (뭐어, 지금 시점에서는 유튜브 채널 대박이나 앱 서비스 회사 창업이겠지요. 아, 무슨 무슨 투자도 그러려나요? - 인용자)

     

    재능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 지식을 이용해서 '좋은 것'을 취하려고 한다. 그들은 세상이 왜 이러한 구조가 되었는지, 어떤 여건에 의해서 만들어진 구조인지, 어떤 조건을 잃어버릴 때 그 구조가 와해하는지 탐구하는 데에는 지적 자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구조가 붕괴한다는 것은 부귀한 사람에게는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그들은 큰 건물의 와해와 함께 대지의 벌어진 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이 세상의 시스템은 언젠가는 붕괴한다. 장담할 수 있다. 언제 어떤 형태로 붕괴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붕괴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이 사실에는 예외가 없다. 250년간 지속되던 도쿠가와 막부도 붕괴했고 세계 5대 강국이던 대일본제국도 붕괴했다. 전후 일본의 정치 체제도 붕괴할 것이다. 그것이 언제 어떤 형태로 일어날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말이다.

     

    내가 '진짜 혹은 진정한 재능'을 중히 여기는 것은 그것만이 '그럴 때'에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재능'만이 '그럴 때'에 어디에서 멈추면 좋을지, 무엇에 의존하면 좋을지, 어디를 향해서 달리면 좋을지를 지시할 수 있다. '진짜 재능'은 세계의 양태를 근원에서부터 포착하는 훈련을 늘 해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두가 붕괴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붕괴된 것처럼 보이는 카오스적 상황에서도 국소적으로는 질서가 남아 있다. '진짜 재능'은 질서를 감지할 수 있다. (강조는 인용)


    비즈니스 현장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지금, 거기에 있다'. 학생들은 앞으로 반년 뒤에 거기서 일하게 된다. 비즈니스 현장은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가. 거기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적절한가. 이는 학생들에게 실로 절박한 물음이다.

     

    예전 같으면 '비정규직 노동자에 의한 고용 조정은 멈춰야 한다'거나 '여성의 노동환경을 정비하려면 돌봄 시설을 정비해야 한다'는 식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결론'을 내는 식이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학생들에게는 '바른 답을 술술 써서 끝'을 맺기보다 '왜 그렇게 되지 않는가'라는 원인을 묻는 것이 더 시급하다. 자본주의가 나빠서, 경영자가 부도덕해서 같은 포괄적인 결론으로는 사태가 크게 호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일반론으로 결론 내기보다 자신들이 실제로 일할 때 '비교적 이치가 통하는 노동 환경'과 '전혀 이치가 통하지 않는 노동 환경'을 개별적으로 식별해 내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아마 다들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런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시급한 지금 상황이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그들의 사회적 성숙을 재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성숙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살기 어려운 사회가 된 것이다.

     

     

    『목표는 천하무적』 (원제: 무도적 사고)


    오길비: 뭐어, 제가 영화 『레옹』 제작될 적에 태어났는지 어쨌는지 머리에 아직 피도 안 말랐습니다만, "여기 엄청 재밌는 글(めっちゃ面白いし、今頃で大事な話)이 있어!" 라고 저희 또래에게 (될 수 있으면) 동네방네 떠들기 위해 오길비의 자료기지를 시작한 면도 있습니다.

     

    그리고 도서출판 유유가 대단합니다. 한국에서 흔히 그러듯 판형을 키우거나 양장 (혹은 그 둘 다) 을 하고 싶을 텐데, 시집이나 일본 문고본 비슷한 물성의 책을 꾸준히 내고 있습니다. 이 말인 즉, 지하철(전철) 열차에서 꺼내 읽기 매우 좋다(具合がいい)는 뜻이죠.

     

    물론, 이렇게 세대와 국적을 초월해 '리더블(readable)'한 글을 써주신 우치다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