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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자유여행 애호가들의 모임: 안티-투어리스티피케이션인용 2025. 6. 4. 16:44
・ 새에게 날아가는 법을 가르친 효과(Lecturing-Birds-How-to-Fly Effect): 기술이 제도권 과학에게 실제보다 더 많은 신세를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지식의 화살의 방향을 바꾸어서 학계→실행 혹은 교육→부로 간다고 주장한다.
・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 삶에서 무작위성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사커 맘, 워싱턴의 공직자, 전략 계획가, 사회공학자, 슬쩍 조작하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 반대 의미는 합리적인 산책가다.
・ 합리적인 산책가 혹은 산책가(Rational flâneur or just flâneur): 여행가와 달리 스케줄(혹은 목적지)을 수정하기 위해서 매 단계마다 자기중심적으로 결정을 내린다. 따라서 새롭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대상에 동화될 수 있다. 연구자 혹은 기업가로서 산책가는 옵션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화술에 의존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경마에서 이기려면
경주마는 자기보다 열등한 경주마와 경쟁하면 지고, 자기보다 더 우수한 경주마와 경쟁하면 이긴다는 말이 있다. 스트레스 요인이 없을 때(즉 호르메시스의 반대로서 도전정신이 결여된 상태일 때) 나타나는 보상 부족(undercompensation)은 가장 뛰어난 경주마에게 최선의 결과를 주지 못한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Baudelaire)는 신천옹이 거대한 날개 때문에 걸어다니지 못한다고 했다. 또 많은 학생들이 기본 미적분보다 심화 미적분에서 더 좋은 점수를 얻는다.
이런 과잉보상의 메커니즘은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하곤 한다. 장거리 여행 이후에 피로를 느낀다면, 휴식을 취하기보다 헬스 센터로 간다. 또 긴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사무실에서 가장 (혹은 두 번째로) 바쁜 사람에게 주는 것도 널리 알려진 방법이다. 시간이 남아돌면 게을러지고 동기를 잃게 되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바쁠수록 다른 일도 더욱 능동적으로 처리한다. 과잉보상은 바로 이런 경우에 발생한다.
나는 강연을 하면서 한 가지 요령을 발견했다. 컨퍼런스 주최자는 강연하는 사람이 텔레비전 아나운서처럼 분명하게 발음해야 하고, 심지어 필요하다면 청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춤도 춰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저자에게 스피치 스쿨에 다닐 것을 권하기도 한다. 나도 이런 제안을 처음 받고 화가 나서 강연장을 떠나며 출판사를 바꾸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다. 나는 시끄럽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조용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약간은 알아듣기 힘들게, 그리고 덜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곡물 트레이더(경매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사람)로 일하던 시절, 나는 목소리는 서열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피아의 거물처럼 가장 힘 있는 사람은 조용하게 말한다. 이렇게 해서 청중으로 하여금 집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런 집중의 역설은 어느 정도 확인된 바가 있다. ‘어눌함’이 갖는 효과가 이를 경험적으로 입증해준다. 이때 우리는 정신을 집중하면서 두뇌를 더욱 활발하고 분석적으로 움직이려고 한다.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와 심리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발음을 정확하고 깔끔하게 하는 텔레비전 아나운서와 대조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청중이 집중할 수 있도록 능숙한 솜씨로 최면을 걸었다.
우리가 소음이 약간 있을 때 더 잘 집중할 수 있는 것도 이런 과잉보상의 메커니즘 때문이다. 마치 소음에 대항해 집중력을 연마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웃고 떠들고 있더라도 우리는 휴식을 취하는 동안 소음을 걸러내고 신호를 분간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과잉보상의 메커니즘에 따라 행동할 뿐만 아니라 소음이 필요할 때도 있다. 나는 다른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카페에서 일을 한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듣거나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청할 때를 생각해보라. 또 깊이 잠들 수 있도록 백색 잡음(white noise)을 일으키는 전기 장치도 있다. 이처럼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작은 요인들은 호르메시스적 반응(hormetic response)과 마찬가지로 일정 수준에서만 효과가 있다. 아직 시도해보지는 않았지만, 히스로 공항(Heathrow airport) 활주로에서 글을 쓰기란 확실히 불가능할 것 같다.
아이들에게 죄를 범하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몹시 싫어하고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변성과 변화를 제거하기 위해서 인생, 생활양식, 과학, 지혜에 대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나는 미국 성인 10명 중 1명이 프로잭(Prozac)과 같은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와 좌절감을 느낀다. 실제로 감정의 기복이 심하면 왜 약물치료를 받지 않는지 해명해야 한다. 병이 심각하다면 약물을 사용해야 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우울, 슬픔, 근심은 지능의 2차적인 요소다. (어쩌면 1차적인 요소일 수도 있다). 비가 올 때면 나는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몸이 축 늘어지면서 베를렌(Verlaine)이 ‘가을의 흐느낌(sanglots)’이라고 했던 것을 천천히 적는다. 어떤 날에는 시흥이 넘칠 정도로 우수에 잠겨든다. 이런 상태를 포르투갈어로 사우다데(saudade), 터키어로 휴쥰(hüzün)이라고 한다. 또 다른 날에는 활력이 넘친다. 글을 쓰기보다는 많이 걷거나 다른 일을 한다. 연구자들과 토론하고 이메일에 답장을 하고 칠판에 그래프도 그려본다. 그럼 나는 식물인간이 된 것인가, 아니면 행복한 멍청이가 된 것인가?
지난 세기에 프로잭이 있었다면 보들레르의 울분,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en Poe)의 분위기,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의 시를 비롯해 많은 시인들이 불렀던 슬픔의 노래는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거대 제약 회사가 계절의 변화를 없앨 수만 있다면, 돈을 벌기 위해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인용자: 정직을 위해 첨언하자면, 저도 아이들에 대한 리탈린 네이션Ritalin Nation에는 꽤 반대하지만, 저 자신은 현재 시점에서, 항우울제를 칵테일요법으로 복용하고 있습니다.)
위험은 또 다른 곳에서도 발생한다. 우리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사회와 미래에도 해악을 끼치고 있다. 아이들의 삶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줄이려는 시도는 아이들을 이른바 ‘문화적으로 세계화된 위대한 사회’에 가두고 다양성과 차이를 줄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통역의 응징
스트레스의 또 다른 특징은 언어의 습득에서도 나타난다. 나는 교과서를 통해 문법을 시작하고 3개월에 2번씩 시험을 보고 정해진 원칙에 따라 단어를 채워 넣는 방식으로 자신의 모국어를 배웠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야 할 때(특히 열대 지방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통증이 찾아왔을 때처럼 신체적 문제가 생겨 절실하게 도움을 청할 때) 언어를 가장 잘 익힌다.
공부벌레가 되지 않고도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다. 바로 실수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야만 하는 상황에서 대화를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성공, 부, 기술은 이런 방식의 습득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몇 년 전, 내가 유명세를 타지 않았을 때다. 해외의 세미나 기획자는 나에게 영어에 능통한 가이드를 붙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는데, 어린아이처럼 사전도 없이 손가락으로 가리켜가며 시행착오를 통해 단어를 습득했다.
지금 나는 명예와 편안함 때문에 응징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런 편안함을 거부할 수도 없다. 이 응징은 영어에 능통한 사람이 공항에서 나를 반기며 잘못된 철자를 지적해주고 불편하고 애매한 상황을 겪지 않게 해주며, 따분한 교과서에서는 배우지 않은 러시아어, 터키어, 크로아티아어, 폴란드어에 전혀 노출되지 않도록 해주는 식으로 다가온다. 더구나 그 사람은 아주 상냥하고 수다스럽다. 그런데 시차적응으로 피로를 느낄 때 이런 수다는 오히려 고통스럽다.
한편, 외국에 갇혀 지내는 생활을 해보는 것도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내 친구 차드 가르시아(Chad Garcia)는 모스크바의 어느 병원에서 가상의 질병 때문에 본의 아니게 격리된 생활을 한 덕분에 러시아어를 배울 수 있었다. 그것은 병원이 개입된 아주 교묘한 방식의 납치 행위였는데, 구소련 붕괴 이후 혼란기에 성행했다. 당시 병원은 여행자들의 서류에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고액의 수수료를 내지 않으면 강제로 입원시킬 수 있었다. 그때 차드는 러시아어를 잘하지 못했지만 톨스토이의 원전을 읽어야 했고 덕분에 상당히 많은 단어를 익힐 수 있었다.
투어리스티피케이션
내 친구 차드는 이런 혼란으로부터 혜택을 보았다. 그러나 이런 혼란은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이라는 현대적인 질병 때문에 점점 사라지고 있다. 투어리스티피케이션은 인간을 매뉴얼에 따라 간단한 기계적 반응을 보이는 세탁기처럼 취급하는 현대 생활의 한 측면을 나타내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낸 용어다. 투어리스티피케이션은 사물로부터 불확실성과 무작위성을 체계적으로 제거해 아주 작은 부분까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모든 것들이 편안함, 편리함, 효율성을 위해서 진행된다.
여행가와 모험가(혹은 산책가flâneur)와의 관계는 투어리스티피케이션과 인생의 관계와 같다. 투어리스티피케이션은 여행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배우가 대본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만들어버린다. 앞으로 우리는 투어리스티피케이션이 불확실성을 좋아하는 시스템이나 유기체에게 혜택이라는 환상을 주면서 이들로부터 무작위성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들여 이들을 거세시키는 방법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예로 교육 제도, 목적론에 입각한 연구비 제공, 프랑스 학사 학위, 운동기구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전자 달력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더 나쁜 투어리스티피케이션은 쉬는 동안에도 현대인들을 구속하는 생활양식이다. 예를 들어 금요일 밤의 오페라, 예정된 파티, 예정된 웃음 말이다. 다시 말해, 황금의 감옥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목적을 지향하는 태도가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실존적 자아를 병들게 한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말 알고 계십니까
토마스 아퀴나스(Saint Thomas Aquinas)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은 앞으로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종류의 저작으로, 신학을 종합적으로 집대성한 기념비적 책이다. 이 책은 그 전에 교회 당국이 부여했던 구조로부터 신학을 자유롭게 했다. 『신학대전』의 주제는 물론 신학이다. 모든 것이 철학적이고, 자신의 주장과 관련한 지식의 모든 부분을 논평한다. 그리고 중세의 사상을 반영하고 이끌어간다.
이제 간단하면서도 제한적인 주제를 가지고 이 책의 주제로부터 벗어나보자. 학구적인 사람들이 안티프레질을 비방하는 내용은 『신학대전』을 지배하면서 여러 번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문장에 가장 잘 집약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행위자는 목적을 위한 의도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행위자는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는 목적론적 주장(teleological argument; 목적에 근거를 둔다는 ‘telos’에서 유래했다)이다. 회의주의자들을 제외한(스토아 철학자들을 포함) 모든 사람들이 이런 목적론적 주장에 지적으로 빠져들었지만, 행동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아퀴나스가 인용했던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아베로에스(Averroes)로도 알려져 있는 아랍 철학자인 이븐 루슈드(Ibn Rushd)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정리한 사람이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유일한 철학자(the Philosopher)라고 불렀고, 이븐 루슈드를 해설가(the Commentator)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해설가는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중세 이후의 아랍인들이 중세의 합리주의에서 벗어나는 동안 서구 철학은 일반적인 인식에 비해 훨씬 더 아랍 철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행위자는 목적을 위한 의도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문장에 근거한 사상적인 유산은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광범위한 오류와 함께, 2세기가 넘는 동안 과학적 지식이 절대적이라고 믿게 만드는 환상을 일으켰다. 이것은 가장 프래질한 오류다.
목적론적 오류
이제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과거에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성공했던 사람들도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환상을 목적론적 오류라고 부르자.
합리적인 산책가는 여행가와 달리 일정을 지속적으로 수정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네로의 여행에서 보았듯이, 새로운 정보를 바탕으로 새로운 장소에 동화될 수 있다. 때로는 장소가 주는 분위기에 이끌리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계획의 포로가 아니다. 여행가는 목적론적 오류에 빠져들 수 있다. 계획의 완벽함을 가정하고 자신을 수정 불가능한 프로그램에 가두어버린다. 반면, 산책가는 새로운 정보를 얻으면서 자신의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수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한 가지 경고하고 싶은 것은 산책이 갖는 편의주의(opportunism)는 인생과 사업에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생활이나 다른 사람이 관련된 문제에서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 편의주의의 반대는 충성이다. 그것은 숭고한 의미를 갖지만, 인간관계나 도덕적 의무처럼 옳은 곳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지금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내일 무엇을 좋아하게 될지 오늘 알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서로 연관된 오류다. 또 다른 사람들도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당신이 묻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지, 어디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더 나쁘게 내일 무엇을 원하게 될지 묻지 말라. IT 기업가였던 스티브 잡스의 장점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데 바탕을 둔 시장 연구와 포커스 그룹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상상력을 따랐다는 데 있다. 잡스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줄 때까지 사람들은 스스로 그것을 원하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용자: 긴 글이라서 죄송하지만, 제발 위 챕터만이라도 PC/노트북/태블릿을 통해, 앉아서 읽어주십시오. 출력해서 읽거나 더 좋게는 책을 구매하시면 더 좋겠지만요.)
게으른 친구들
책은 안티프래질하다
네로는 수도승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밤 9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고, 겨울에는 훨씬 더 일찍 잠을 청했다. 모임에 가더라도 술에 취한 사람들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더 나쁘게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흘러가면 일찍 나와버리곤 했다. 또 낮에 활동하기를 좋아해서 아침 햇살이 창가를 부드럽게 비출 때 일어났다.
네로는 주로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해서 읽었다. 뱃사람이 신밧드와 베네치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의 격동의 모험을 마치고 나면, 자기만의 조용하고 평온한 삶으로 되돌아온다.
네로는 미학적 고통의 희생자였다. 플리플롭을 신은 사람, 텔레비전, 은행업자, 정치인(좌파, 우파, 중도파 할 것 없이), 뉴저지, 토니처럼 뉴저지에 사는 부자, (샌들을 신고 베니스에서 내리는) 크루즈 여행을 하는 부자, 대학교 직원, 문법을 따지는 사람, 유명인과 친한 척 하는 사람, 엘리베이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말쑥하게 차려입은 세일즈맨과 비즈니스맨을 보거나 떠올리면 극도의 혐오감과 공포감을 느꼈다.
네로는 레 벨 레트르(Les Belles Lettres)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지금까지 발간되지 않은 그리스어, 라틴어, 아람어(시리아어) 고전을 공동으로 번역하는 60인의 번역가 그룹에 속해 있었다. 이 그룹은 자유주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토론을 할 때는 학위나 출신 학교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또 파리에서 매년 두 번 열리는 위엄을 갖춘 기념식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원칙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11월 7일 열리는 플라톤의 기일이며, 다른 하나는 4월 7일 개최되는 아폴로 탄신일이다. 네로가 활동하는 또 다른 모임은 역도 동호회였는데, 매주 토요일에 개조한 차고에서 모였다. 이 동호회는 주로 뉴욕의 도어맨과 수위, 그리고 여름에 민소매 티셔츠 차림으로 어슬렁거리는 조직 폭력배처럼 보이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네로는 고풍스러운 도시를 지도 없이 오랫동안 거닐기를 좋아했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투어리스티피케이션을 제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따른다. 먼저 첫 번째 목적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여행 가이드가 짜증을 낼 때까지 다음 목적지를 결코 결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일정에 무작위성을 주입한다. 예를 들어 자그레브(Zagreb; 크로아티아의 수도 - 원주)에 있다면, 다음 목적지는 그곳에 있는 동안 자신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결정한다. 주로 장소가 주는 분위기가 네로의 마음을 끌게 되는데, 이런 분위기는 여행 책자에 나와 있지 않다.
네로는 대부분의 시간을 뉴욕에서 보내면서 주로 창가에 있는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그리고는 가끔씩 멀리 허드슨 강을 지나 뉴저지 해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곳에 살고 있지 않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스스로 느끼면서 말이다.
생태학적 영역과 루딕 영역
사커 맘이 추구하는 투어리스티피케이션
지적인 생물학자 윌슨(E. O. Wilson)은 무엇이 아이들의 발육에 가장 방해가 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는 주저하지 않고 사커 맘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개념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또한 그는 사커 맘들이 생명체에 대한 아이들의 자연적인 사랑을 억누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더욱 일반적인 데 있다.
사커 맘은 아이들의 삶에서 시행착오, 즉 안티프래질을 제거해 생태학적 영역에서 벗어나도록 함으로써 아이들을 이미 존재하는 현실의 지도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멍청이로 만들어버린다. 멍청이는 좋은 학생이지만 느리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컴퓨터와 같다. 게다가 그들은 애매한 상황에 부딪히면 어쩔 줄을 모른다.
내전 시기에 태어난 나는 틀에 박힌 교육을 신뢰하지 않는다. 실제로 나는 목적은 없지만 합리적인 산책가처럼 학교보다는 사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도서관 안팎에 존재하는 무작위성으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사람이라면, 멍청이가 되지 않고 지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올바른 형태의 엄격함을 지니려면 틀에 박히거나 감추어진 삶, 알람시계와 미리 정해진 계획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공허한 정장 차림의 CEO들의 삶의 아니라 무작위성, 혼란, 모험, 불확실성, 자기 발견, 충격에 가까운 사건으로 가득 찬 삶이 필요하다. 후자는 인생을 살 만한 가치가 있도록 해준다. 이에 반해 CEO들은 여가를 보낼 때도 시간표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4시부터 5시 사이에 밀어넣은 여가 시간이 약속들 사이에 끼어 있다. 우리 삶에 내재된 가변성과 무작위성의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쥐어짜내는 것이 근대의 임무처럼 보인다. 그러나 5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아이러니하게도 우연의 여신이 마치 최후통첩이라도 하듯이, 세상은 훨씬 더 예측하기 힘든 곳으로 변해버렸다.
독학을 추구하는 자들만이 자유롭다. 그리고 그들은 학교 문제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상품화를 추구하지 않고 투어리스티피케이션을 제거한다. 기분 전환을 위해서 틀에 박힌 생활에 무작위성을 부여해보라(어쩌면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근대의 임무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이해하고 당신의 실존적 우선 순위를 이해하려면, 야생 상태의 사자와 감금 상태의 사자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된다. 감금 상태의 사자는 더 오래 산다. 그리고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이 부와 직업의 안정성이라면, 이런 사자들은 더 부유하고 직업도 더 안정적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세네카는 문제점과 차이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는 인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학교를 위해서 공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끔찍하게도 이 말은 순수성을 잃고서 미국 대학교의 입맛에 맞도록 변형되어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공부한다.”라는 표어를 낳았다.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긴장의 대부분은 정책 담당자처럼 무엇인가를 축소시키고 프래질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합리성에 호소할 때 나타난다.
안티프래질한 교육(바벨 교육)
교육의 효과에 관한 나의 생각을 바로잡고, 표준화된 교육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인 태도를 갖게 만들어준 것이 있다. 나는 학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순수하게 독학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레바논에서 나의 아버지는 ‘지적인 학생인 학생 지식인(Intelligent Student Student Intelligent)’으로 통했다. 아버지의 이름은 ‘나지브 탈레브(Nagib Taleb)’이다. ‘탈레브 나지브 나지브 탈레브’는 아버지의 고등학교 졸업시험 성적이 레바논 전국에서 가장 우수했을 때 언론에서 붙여준 이름이었다. 그해 아버지는 전국의 고등학교 졸업생을 대표해 고별 연설을 했다.
(…) 아버지 자신은 학교 교육에 큰 가치를 두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겪었던 일을 내가 겪지 않도록 나를 예수회 학교에 입학시키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런 결정은 확실히 내가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자아를 실현하도록 했다.
나는 아버지의 삶을 곁에서 바라보면서 졸업생을 대표해 연설하는 것의 의미, 그리고 ‘지적인 학생’의 의미를 대체로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이 두 가지 의미는 지적인 학생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와 함께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다가왔다. 그것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트레이더로 일할 때도 그랬고,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 사람들이 술집에 있을 때, 혹은 마피아 조직원이 주변을 어슬렁거릴 때에도 그랬다.
나는 사람들을 채용할 때 그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애매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당신도 지원자들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능력을 보고 뽑을 수 있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어슬렁거리는 능력이 떨어진다. 그들에게는 분명하게 정의된 일을 주어야 한다.
나는 열 살 때 좋은 성적이 학교 밖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성적에는 부작용이 따른다. 좋은 성적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의 지적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실제로 아버지는 자신이 겪었던, 좋은 성적을 얻는 데 따르는 문제를 계속 나에게 넌지시 알려주려곤 했다. 반에서 성적이 꼴찌였던 친구(아이러니하게도 와튼 스쿨 동기의 아버지셨다)는 나중에 자수성가한 사업가가 되어 반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혔다. 그 분은 자신의 이름을 커다랗게 새긴 대형 요트를 갖고 계셨다. 또 다른 분은 아프리카에 땅을 사서 큰돈을 벌고는 40세 전에 은퇴해 지중해 지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아마추어 역사가로 변신했다가 나중에 정계에 입문했다. 아버지는 교육에 가치를 두지는 않았고, 문화와 돈에 가치를 두셨다. 그리고 나에게 이 두 가지를 추구할 것을 자극했다. 나는 처음에 문화를 추구했다. 또한 아버지는 박학다식한 사람, 기업가, 졸업장에 의지하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을 아주 좋아했다.
내 생각은 공개 시장에서는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교과 과정을 따르지 않는 지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생각을 집중했다. 그는 독학을 추구하는 사람 혹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만이 자신이 가진 지식의 전부인 사람을 레바논식 표현으로 ‘집어삼키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과 대비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약간의 변화가 성적에서 커다란 차이를 일으키는 공식적인 학위 프로그램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ー 나심 탈레브, 『안티프래질: 불확실성과 충격을 성장으로 이끄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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