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려읽기) 극우와 아노미, 아노미와 극우인용 2025. 2. 8. 14:10
내셔널리즘과 집단성
대학원에서 W 씨가 젊은 세대 사이에 만연해 있는 내셔널리즘과 격차 사회의 관계에 대해 발표하는 것을 들으며 생각을 좀 해봤다.
내셔널리즘은 '연비가 썩 좋은 정치 이데올로기'다. 현실적으로는 이해관계가 별로 일치하지 않는 사회집단을 '가상의 적'을 향한 증오심을 지렛대로 삼아 일시에 강력하게 뭉치게 할 수 있다.
유럽에서 배외주의적 운동이 반드시 이민자 문제 및 젊은이의 실업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국민적 통합이 해체될 조짐'이 보일 때 꼭 내셔널리즘이 기세를 올린다.
새로이 고양되는 내셔널리즘의 신봉자는 항상 '약자'다. 하지만 '약자'의 정의를 통해 미루어볼 때, 그들은 '국민적 통합을 이루지 못하면 현재 누리고 있는 이익을 놓칠 계층'은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수익 기회 자체'에서 소외를 당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정의에 부합하니까 말이다. 다시 말해 돈도 없고, 인맥도 없고, 기술도 없는, 한마디로 상승의 기회가 바늘구멍만 한 사람들을 '약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들이 내셔널리즘에 몸을 던지는 이유는 '국민적 통합을 이룩하면 자신에게도 수익의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현재 충분한 사회적 이익을 누릴 수 없는 이유를 꼽을 때, (자신의 무력함이나 무능이 아니라) '국민적 통합의 불충분함'을 첫 번째로 꼽는 사람이 내셔널리스트가 된다.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는 사회집단에 귀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수익 기회가 전혀 돌아오지 않는다'는 개인적 사정을 바탕으로, "내셔널리즘이 필요해, 국민적 통합이 이루어지면 내게도 상승의 기회가 반드시 찾아올 거야(이웃나라로 식민지주의적인 경제를 진출한다든가 '비국민의 추방'을 통한 '빈자리'를 대량생산하여)"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단순한(simple minded) 인간들이 내셔널리스트가 된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매한가지다. 프랑스의 내셔널리스트도, 이란의 내셔널리스트도, 한국의 내셔널리스트도, 일본의 내셔널리스트도, 그 점에서는 초록이 동색이다.
이에 반해 이른바 '강자'는 (국민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상 유지(status quo)에서 충분히 이익을 얻고 있다. 현상적으로 충분히 수익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강자'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래서 '강자'는 특별히 국민적 통합의 달성이 중대한 정치적 현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생각을 하는 '강자'가 있다면, 그것은 '내셔널리즘의 고양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얻기'를 바라는 '탐욕스러운 강자'일 따름이다.
내셔널리즘의 견고함은 여기에 있다.
국민적 통합의 달성이 '지금은 갖고 있지 못한' 수익 기회를 만들어내리라 믿는 '약자', 그리고 그것이 '지금 갖고 있는' 수익 기회를 더욱 증대시킬 것이라고 믿는 '강자', 이 둘의 연합에 의해 내셔널리즘은 증진한다.
자신에게 수익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 원인은 자기에게 책임이 있고, 국민적 통합을 이룸으로써 사태가 호전되지는 않는다고 여기는 '현명한 약자', 그리고 현상 유지를 통해 충분히 수익을 올리고 있으니까 더 이상 욕심을 부릴 생각이 없는 '뺀들뺀들한 강자', 이 두 종류의 인간만이 내셔널리즘에 저항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양쪽 다 소수파에 속한다.
오호통재, 중과부적(衆寡不敵)이다.
머지않아 일본은 온통 내셔널리스트로 득실댈 것이다. 그러나 그 주요한 원인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는 사회집단에 귀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수익 기회가 전혀 돌아오지 않는' 젊은이들을 구조적으로 대량 발생시켜온 현재의 사회 시스템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상적으로 볼 때 '내셔널리스트 강자'는 예외적인 존재다. 내셔널리즘의 고양을 어떻게 해서든 저지하고자 한다면, '젊은 약자'를 대량 발생시키는 사회 구조를 어떻게든 개선해볼 도리밖에 없다.
그게 어렵다. 왜냐하면 인습적인 상승 시스템의 신봉자인 부모와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이기적으로 사는' 길만이 수익 기회를 최대화시킨다고 세뇌를 시켜왔기 때문이다.
풍부한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은 지금도 태어나고 있다. 그러나 재능을 '모든 이를 위해 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무도 가르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너의 재능은 너를 위해서만 배타적으로 쓰라'고만 가르친다.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는 사회집단'에 귀속하면 어떤 점이 좋은가라는 유용성을 아무도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집단에 귀속하면 이익을 독점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자기 결정권도 제한받으며, 연대책임을 져야 하고, 집단 안의 약자도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등등, 손해만 보니까 '혼자서 해나가는 편이 낫다'는 논리만 전일적으로 주장해왔다.
이런 주장은 역사적으로 '정답'이었다. 사회 전체에 다양한 중간공동체(친척, 지역사회, 기업 등)라는 그물망이 펼쳐져 있고, 개인의 가동(可動) 범위가 지극히 좁았던 시대에는 누구와도 줄줄이 엮이지 않고 오로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타입의 개체가 이익을 독점할 확률이 분명 높았다.
아이들에게 '남의 일은 상관 말고 자기 이익만 생각해'라고 가르친 것은 기존의 일본처럼 '참견 사회'였던 곳에서는 확실히 유효한 생존전략이었다. 친족제도의 공동화, 종신고용제의 붕괴, 미혼의 증가, 저출산 문제 같은 것은 모두 '참견 사회'의 해체=자기 결정・자기 책임 시스템을 지향한 사회적 추세다.
그러나 사회는 변했다. 우리는 1960년대부터 중간적 공동체의 해체를 위해 전국적인 규모로 노력해왔고, 그런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한국 같은 경우, 1988년 올림픽 때부터 1998년 외환위기 사이 시점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 인용자)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될수록 집단에 속하지 말고 무엇보다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는 인간'이 엄청나게 사회의 다수자(majority)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태는 반전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집단 성원에 대해 세세한 배려를 보이는 사회집단'에 속하는 개인이 원자화된 개인보다 자기 결정의 선택 폭이 넓고 개인에게 허용되는 가동 범위도 넓다는 역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집단에 속하지 않아 자기 이익을 독점할 수 있는 인간'보다 '집단에 이익을 환원하고 집단에 이익의 재분배를 맡기는 기회가 많은 인간'에게 수익의 기회가 많이 돌아가는 '하이 리스크'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도래했다'는 말은 지나친 말일지도 모른다.
그래, 아마도 '도래하는 중이다.'
적어도 현대의 '강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집단에 깊이 참여하는' 대가로 풍부한 수익 기회를 누리고 있다. 반대로 현대의 '약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집단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그 결과 동일 집단의 동료들에게 수익 기회를 제공받아 본 경험이 없다. 그들에게 가정은 밑도 끝도 없이 간섭하는 곳, 학교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억압당하는 곳, 직장은 무의미하게 고생만 하는 곳이다.
그런 식으로 배우고 현재 그렇게 실감하는 젊은이들에겐 '상호적 관계로 맺어진 공동체'가 어떠한 것이며 어떻게 하면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고 그곳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한 지식이 없다. 오랜 기간 '남을 밀쳐내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유리함만 주입받아왔다는 것을 나중에 알아채고 당혹스러워할 뿐이다.
어쩔 줄 몰라 자기도 모르게 매달린 것이 바로 내셔널리즘이다. 어찌 되었든 우선 어떤 공동체에라도 귀속하지 않으면 '낙오를 면치 못한다'는 것만은 그들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적확한 지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복음주의 개신교는 미국과도 연계된 범 극우파 정치세력과 유착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종교 자체가 싫다는 한국인들도 많습니다만, 결국 결혼이나 육아 생애주기를 맞으며 개신 교회에 귀의하는 밀레니얼들의 사례를 저는 여럿 보아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회에 어느 정도 참여하고 있는 축들 중에는 친정 내지 처가, 즉 신부의 아버지 집 가까이에 살림을 차리는 사례도 심심찮은 듯하구요. - 인용자)
그때 그들이 구성원으로 등록하고자 하는 곳은 가족이나 동업자 집단도 혹은 정당이나 지역사회도 아니다. 왜냐하면 '상상의 공동체'는 간섭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고역 또한 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매우 광대한 공동체인 까닭에 다른 구성원과 얼굴을 마주칠 필요도 실명을 댈 필요도 없다. 아무도 귀찮게 기대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누군가의 밑을 닦아줄 필요도 없다.
상상의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 혼자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그들이 내셔널리즘을 선택하는 까닭은 '원자화된 개인의 불리함'을 공동체에 귀속하여 해소하고 싶지만, 공동체에 귀속함으로써 받아들여야 하는 개인적 책무와 부자유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에고이스트로서 자기 이익을 확보하면서, 또 공동체의 온전한 구성원(full member)이라는 '한몫'도 챙기고 싶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내셔널리스트가 된다.
얼마나 초라한 삶의 방식인지… 하지만 부모도 교사도 매스컴도 그렇게 살아야 '득을 본다'고 머리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를 해왔으니, 그들에게만 책임을 물은들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우선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기보다는 집단의 일원이 되는 편이 살아남는 데 유리하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것에 플러스 평가를 내려주자. 그런데 과연 '어떤 집단에 귀속해야 할까'라는 어려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어려워서 어찌할 바 모르는 젊은이들은 지적 폐활량이 부족한 관계로 국민국가 같은 정치 환상에 몸을 내어맡긴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귀속해야 할 공동체를 선택할까. 이는 오랫동안 풀기 어려웠던 문제이므로 오늘은 논하지 않겠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잘 이야기하지 않는 한 가지만 힌트로 제시해두고 싶다.
귀속해야 할 집단을 선택할 때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사이즈'다. 당연하지만 상호적 집단은 사이즈가 클수록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수익 기회는 늘어난다. 하지만 그런 집단도 어느 사이즈를 넘어버리면 집단의 유지가 자기목적이 되어 집단 구성원의 상호적 커뮤니케이션을 부차적으로 배려하게 된다. 그런 집단은 구성원을 그리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 조직인가에 따라 집단의 '최적 사이즈'는 변한다.
상호적이라는 점을 우선으로 삼으면 거대한 집단에 귀속하지 않는 편이 현명하고, 어떤 기능이나 지식을 공유하는 경우도 어느 정도 이상으로는 커지지 않는 편이 기능적이다. 그렇지만 집단의 '최적(optimal) 사이즈'에 대해 보편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만은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치다 선생님은 다른 곳에서 100명~150명 가량이 최대라고 얘기하심. 대략 일개 보병 중대Company 내지는 단독 작전 가능한 대대Battalion를 구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숫자로군요. - 인용자)
그러나 오늘날의 아이들은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어떤 사이즈의, 어떤 기능을 가진 집단에 귀속할까라는 물음, 아니 처음부터 그런 물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조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다.
주제를 알라
'주제를 안다'든가 '분수에 맞다'든가 '자기 그릇에 맞는 소망을 품다' 같은 겸손의 미덕은 이미 잊은 지 오래다. 그러나 내가 보는 바로는 '적절한 자기 평가'에 대한 고민의 결여가 현대 일본인의 불행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원인이 아닌가 한다.
우리 불만의 대부분은 자기 평가와 외부평가 사이의 '격차' 때문에 생겨난다. 대개 우리의 자기 평가는 외부평가보다 높다. 우리의 사회적 불만은 '왜 나 같은 탁월한 인간이 합당한 경의와 존중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라는 말로 나타낼 수 있다. 아마 누구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결과 '어째서 나만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는가?' 하며 두 눈을 치켜뜨고 입술을 앙다문 퉁퉁 부은 사람들이 사회의 다수자(majority)를 점하게 된다. '모두들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여러분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다. 일본인이 모두 비슷하게 원망스럽고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변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글로벌리제이션과 '불만스러운 얼굴'은 거의 동시대적으로 등장했다. …….
(우치다 다쓰루 『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 김경원 옮김. -- 이거, 일본어도 한국어도 절판이더라구요. 어째선지 헌책방에서도 구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책의 글들은 전부 인터넷에 일본어로 공개되어 있습니다. 🙇)
'인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려읽기) 인류는 어디로 향하는가? (0) 2025.03.03 (가려읽기) 미니 맥스 (0) 2025.02.16 (가려읽기) 꿈꾸는 마르크스 ゆめみるマルクス (0) 2025.02.04 (가려읽기) 미래가 어떻게 될지 나는 알고 있다 (0) 2025.02.03 (가려읽기) 괜찮은 남자, 꼭 잡아야 할 남자, 비장의 일격 (0) 2025.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