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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꿈꾸는 마르크스 ゆめみるマルクス인용 2025. 2. 4. 08:55
마르크스는 약간 꿈을 꾸듯이 이렇게 쓰고 있어요.
"이 코뮌주의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투쟁에 대한 참된 해결이며, 현실 존재와 본질, 대상화와 자기 확인, 자유와 필연, 개(個)와 유(類) 사이의 투쟁에 대한 참된 해결이다." (349쪽)
이 단계에서 '개와 유의 투쟁'은 해결된다고 마르크스는 썼어요. 바꾸어 말하면 '사인'과 '공민'의 대립이 해결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곧 자신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채우는 행위가 그대로 공공의 복리로 이어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논어』에도 나와 있듯이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는 경지가 그것이죠. 공자는 '일흔이 되었을 때' 라고 연령의 조건을 붙였지만, 인간이 아무리 분방하게 욕망을 품어도 타인과 자연과 공생하는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 것을 인간적 성숙의 목표로 들고 있다는 점에서 공자와 마르크스가 하는 말은 그다지 다르지 않아요.
마르크스는 그러한 인간의 성숙을 '사회적'이라는 술어로 나타냅니다.
이 말은 '사(私)'가 아니라 '공(公)'에 중심축을 놓는 인간의 모습을 가리킨다고 보면 돼요. 인간은 사회적일 때 인간적이며, 인간적일 때 사회적이라는 이치를 마르크스는 이런 식으로 기술해요.
"나는 인간으로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이다 (……)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든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사회를 위해 만드는 것이며, 나아가 내가 한 사람의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만든 것이다." (352쪽)
자기의 이익을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은 사회적이지 않고 사회적이지 않은 인간은 인간적이지 않다고 마르크스는 말하고 있어요. '나를 위해 만드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라고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l'un pour l'autre"도 아마 같을 것이다. - 인용자)
젊은 시절 읽을 때는 몰랐었는데, 『경철 수고』를 이번에 다시 읽고, '어이쿠, 마르크스가 이런 말까지 했구나' 하고 놀란 것은 유적 존재의 신체성에 대해 언급했다는 점이었어요.
인간이 사회적이라는 것은 신체적으로도 사회적이라는 말이겠지요. 이론적으로는 그래요. 이 말은 곧 자기가 생각한 대로 행동하면 그것이 한 치도 틀림없이 사회 전체의 복리를 위한 규범이 된다는 말이니까요. 유적 존재, 즉 뛰어난 사회적인 인간에게는 개인의 눈으로 보는 것이 사회적으로(즉 타자들과 함께) 보는 것이고, 개인의 귀로 듣는 소리는 타자들과 함께 듣는 음이며, 개인의 손가락으로 만진 것은 타자들과 함께 만진 것이 된다는 말이지요. 마르크스는 이 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해요.
"타인의 감각이나 정신도 내 자신이 내 것으로 삼는 것이라고 하자.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직접적인 기관 외에 사회적인 기관들이 사회라는 형태에 입각하여 형성된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과 직접 공동으로 수행하는 활동 등은 내 삶을 표출하는 하나의 기관이 되고 인간적인 삶을 내 것으로 삼는 방법의 하나가 된다." (356쪽)
젊은 시절 이 구절을 슬쩍 넘어갔던 이유는 "타자의 신체와 함께 형성되는 공동의 신체"라는 생각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잘 알 수 있어요.
30년도 넘게 무도(武道)를 수행해오면서 '천하무적'이라는 터무니없는 과제에 대해 실천적으로 내릴 수 있는 해답은 '적을 만들지 않는' 것밖에는 다른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거든요.
"모든 병법자(兵法者)는 승부를 다투지 않고 강약에 구애되지 않으며 한 걸음 나가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지 않는다. 적은 나를 보지 않고 나는 적을 보지 않는다." (택암沢庵, 『태아기太阿記』)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망상을 부풀리고 있는 중이랍니다.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마르크스에게서 20대의 열정을 배우다』
우치다 선생은 합기도 수련을 하는 것이나 난해하기로 유명한 철학자 레비나스의 저작 읽기를 시작한 계기를 언급할 때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가 혹은 숙명이라는 이름의 끈에 이끌리는 결정된 존재인가?” 하는 물음에 사로잡혔던 경험을 꼭 이야기한다(이 이야기는 선생의 자전적 저작물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물음에 선생이 최종적으로 당도한 대답은 “인간은 자유로운 때야말로 그 숙명을 안다”는 것이다. 나는 스승의 이 탁견에 깊이 공감한다. ‘자유’와 ‘숙명’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위상이 다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나는 진정 자유로운 사람만이 자신의 숙명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는 인생의 다양한 분기점에서 결단을 내릴 때 누군가의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라 오롯이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에 좌지우지되거나 남에게 결단의 기준을 묻는 사람은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숙명에 관해서도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우치다 선생이 ‘정해진 운명 vs. 미정의 운명’이라는 물음을 던지고 스스로 당도한 대답은 ‘나는 혼자이다. 내 대신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숙명이 열린다는 뜻이리라.
나는 젊었을 때 인생은 주체적으로 개척하는 것이고 100퍼센트의 자유와 자기결정만이 자신의 주체성을 기초 짓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믿었다. 하지만 40대 중반을 넘어서자 “보이지 않는 신의 손 같은 것이 있어서 인생의 분기점마다 ‘딱’ 그때 만나야 할 사람이 ‘착’ 나타난다. 그 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인연은 원래 불교 용어다. 인(因)은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작용이고 연(縁)은 그것을 돕는 간접적인 작용이다. 선생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나는 자유와 인연이 상보적인 관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즉 인연이라는 숙명적인 것을 거쳐야만 비로소 인간은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역으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인연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내가 칭하는 ‘딱・착 인연론’의 핵심이다. 우연은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우연(으로 보이는 것)을 만나기 위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많은 노력을 한다. 즉 “만나기 전에는 우연이지만 만나고 나서는 필연이다.”
우치다 선생을 통해 느낀 ‘딱・착 인연론’은 이후 ‘딱・착 배움론’으로 진화한다. 철학자 자크 라캉은 그의 전설적인 ‘세미나’(동명의 책이 출간되었다)에서 청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신의 물음에 대답을 하는 것은 제자 자신의 일입니다. 스승은 강단 위에서 기성의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승은 제자가 대답을 찾는 바로 그 순간에 대답을 부여합니다.
라캉이 말한 “스승은 제자가 대답을 찾는 바로 그 순간에 대답을 부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대답을 찾는 것은 제자 혼자의 일이고, 제자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찾은 대답을 스승 안에서 사후적으로 ‘읽어 낸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제자가 대답을 찾은 바로 그 순간에 스승도 똑같은 대답을 말하려고 입을 연다는 것이다. (사자성어 ‘줄탁동시啐啄同時’와 같다 - 인용자) 나의 ‘딱・착 배움론’은 후자의 해석에 기초한다. 사실 내가 말하려고 한 것을 바로 그 순간 상대방도 내게 말하려고 하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들다.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욕망의 이중적 일치’라고 부르는데, 이런 일은 천문학적 확률로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라캉이 말한 것이 실제로는 어떻게 일어날까?
나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그런 경우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중요하고 반드시 손에 넣고 싶은 그것은 ‘내가 모르는 정보’이고, ‘그것을 모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는 정보’이다. ‘내가 아는 정보’는 말 그대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 별로 의미가 없다. 동시에 ‘내가 모르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 못하는 정보’ 혹은 ‘그 정보의 결여에 대해서 불안하게도 불쾌하게도 생각하지 않는 정보’(가령 내 경우는 주식 정보나 교육학 관련 학술 잡지의 내용)는 나에게 전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알고 싶긴 한데 아직 모르는 것’과 관련 있다. 그런 말을 누군가가 할 때 나는 그것을 마치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나의 기억 저장고에 저장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말을 끝냈을 때 그 말은 모두 나의 기억 저장고에 제대로 등록을 마친 상태가 된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는 아마도 상대가 말을 끝내는 바로 그 순간 그것과 한마디도 다르지 않은 ‘생각’이 내 안에 있다는 걸 발견하고 놀랄 것이다. “아니, 나도 당신과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우치다 선생의 책을 처음 읽고 나는 이런 느낌이 들었다. “앗, 이건 내가 정교하게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평소에 늘 생각하던 건데” “아, 그렇지 맞아. 이게 바로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야!” “뭔가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막연한 느낌이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 안개가 걷힌 느낌이야!” 이런 경험은 아마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독자에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우치다 선생에게 배우는 법: 스승이라는 모항에서 떠나고 돌아오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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