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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기론』 들어가며 (한국어판을 위한 서문)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12. 27. 14:21

    한국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다쓰루입니다.

    『용기론』을 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내용인지 제목만 보고서는 짐작이 어려우실 것이므로, 우선 여기 ‘들어가며’만큼은 끝까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은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문화권으로 묶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21세기 들어서 제각기 나라의 꼴이라든가 표정이 많이 바뀌기는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세 나라는 깊은 층위에서 ‘같은 뿌리’로 엮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뿌리란 바로, 이렇게 말하는 게 허락된다면 유교적인 사고방식이겠습니.

     

    이런 주장을 써두면, 아마 한국 젊은이는 ‘어휴, 고리타분한, 그런 관념은 이제 한국 사회에선 터럭조차 찾을 수 없답니다’라며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실 일본이나 중국이라 할지라도 젊은 세대는 (젊지 않은 세대 역시) 똑같이 반응할 테지요. 유교적 유산 말이죠…, 그런 건 현대 사회에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걸요. 모든 사람이 만사 제쳐두고 자기 이익만 최대화하는 데 안간힘을 쓰며 살고 있습니다. 경쟁 상대를 자빠뜨리려고만 혈안이 되어 있다구요. 승자가 모조리 다 차지하고, 패배한 자는 길바닥에서 죽든 말든 ‘각자도생’입니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이렇게나 거칠고 냉정한 세태인걸요. ‘유교적인 것’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어요, 하고 표정이 썩어서는 대꾸할 것만 같군요.

     

    ‘아니, 선생께서 말씀하시려는 《유교적인 것》이란 게 애당초 뭐란 말입니까?’ 하고 대거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용기론』은 바로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쓴 책입니다.

     

     

    … 아니, 그걸 위해 썼다는 말은 거짓부렁이예요. 처음 쓸 때는 그런 의식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편집자한테서 ‘용기’에 관한 질문이 담긴 편지를 받고서, 여기에 답장을 써나가는 사이에 점차 하나둘씩 쌓여서 책이 한 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 무계획적인 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다시 읽어 보니, 이 책의 메시지 중 하나는 (물론,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요) ‘유교적으로 사물을 사고한다는 것은, 현대에도 여전히 젊은이들에게 강력한 삶의 지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책을 한 권 써 두고서 나중이 되어 보니, 아무렴 내가 그런 책을 썼던 거구나, 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런 일도 있는 겁니다.

     

     

    이 책의 진수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동아시아적 성숙이란 무엇인가?를 둘러싼 고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유교적인 것’이 뭔지 이렇다 할 설명이 없이 ‘동아시아적 성숙’ 얘기로 옮아가 버렸습니다. 그래도 걱정은 마세요. 이 둘은 ‘같은 것’입니다. ‘유교적인 것’이란 말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한정적으로 표현해 보면 ‘동아시아적 성숙’이 됩니다. 제가 생각해 본 결과 그래요.

     

    ‘동아시아적’이라고 지리적으로 한정한 이유는, 이제 대립 개념이 지리적 차원에서 도출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선 ‘동아시아적’이란 말을 ‘서구적’이란 말과 대치해 두었습니다. 말하자면, 동아시아에서는 사람이 ‘성숙한 어른이 된다’ 할 때에 (막연하다고는 해도) 어떤 이상적인 형태가 있으며, 서구에서도 역시 자기들 나름의 ‘성숙해지고 어른이 되는’ 이미지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둘은 매우 다릅니다. 이상이 제 가설입니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동아시아적으로 어른이 되고, 서구 사람은 서구적으로 어른이 됩니다.

     

    사회집단마다 ‘바람직한 어른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는 건 그렇게까지 드문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족학자에게 물어보면 ‘매우 당연하다’고 할 테지요. 제각기 집단이 고유한 ‘어른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뭐가 옳고 우위에 있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모두 똑같이 일개 민족지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그네들 학계의 통설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거기에 대해선 저도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동아시아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서, 제가 ‘동아시아적 성숙’에 무척이나 마음이 가는 겁니다.

     

    거꾸로 말하면, ‘서구적인 성숙’에 그다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저 사람은 어른’이라는 말에 일말의 진지함을 갖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만 보면 그랬어요. ‘이 사람은 완력이 있다’, ‘이 사람은 일을 썩 한다’, ‘이 사람은 영특하다’는 식의 평가는 계속 언급이 되지만서도, ‘이 사람은 어른’이라는 평언은 아예 입에 올리지조차 않아요. ‘이이는 된 사람이니까, 이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 사람의 지시에 따를 것이며…’ 하는 식의 서사나 전개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 느낌이 그래요. (통계적 근거는 없지만.)

     

     

    얘기를 좀 바꿔보면, 그새 미국에선 대선이 있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지각변동적인 추세로 47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트럼프는 선거를 치르면서 굉장히 단순하고도 공격적인 주장을 거듭했던바, 그 어휘란 게 거개가 ‘초등학교 6학년 수준’ 정도 될 거라고 미디어에서는 야유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 측근들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트럼프는 평소에는 얌전을 빼며,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곧잘 귀를 기울이는’ 유형이라고 합니다. 확실히 그렇지 않고서는 10년 이상에 걸쳐 거대한 ‘정치적 팀’을 이끌어나갈 수는 없었겠습니다. 그 기사를 읽고서 저는 문득 ‘흐~. 트럼프는 어지간히 어른이라 할 수 있겠군’ 하는 감상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습니다. 저는 이런 ‘인간의 복잡함’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면에 서로 모순되는 다면성을 갖춘 인간이 어째 마음에 드는 겁니다.

     

    그렇다곤 해도 트럼프에게 투표한 미국 유권자들은 그가 ‘복잡한 인물’이라서 일부러 투표한 건 아닐 거라고 봅니다. ‘자기들도 알아듣기 쉽게 말하는 직설적인 사람’이라서 표를 던진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동아시아와 서구는 ‘사람 보는 눈’에 차이가 있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까 얘기로 돌아가 보죠. 서구에선 인간의 성숙을 얘기할 때 ‘정체성의 발견’이란 점을 중시합니다.

     

    ‘자기의 진짜 모습’, ‘있는 그대로의 자신’, ‘원래 자기의 모습’ 같은 게 인격의 핵심이 됩니다. 하지만 다양한 외부적 조건이 ‘진정한 내 모습’과 만나는 것, ‘진정한 내 모습’을 발견하는 걸 방해합니다. ‘다양한 외부적 조건’이란, 이를테면 ‘돈이 없다’든가 ‘차별받는 집단에 속해 있다’, ‘《진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오해받고 있다’든가, 하여튼 뭐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한 장애를 뛰어넘고서, 진정한 자신’과 만나고, 그것을 발견한다면, 사람은 폭발적인 퍼포먼스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겁니다.

     

    히어로물은 전부 ‘그런 얘기’입니다. 슈퍼맨, 배트맨,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하나도 빠짐없이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뒤에 ‘진짜 자기 모습’과 조우하면서, 수퍼 히어로가 됩니다. 물론, 그러고 나서도 때로는 ‘정체성 혼란’을 겪기도 하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편견’이라는 시련 요소를 넣을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반드시 마지막에는 ‘진정한 자신’으로 되돌아가며, 사람들의 환호 속에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런 서사들을 감상하고 나서, 여러분은 뭔가 낌새를 눈치채셔야만 했습니다.

     

    한국만 해도 보세요. 여러분 나라에는 그런 이야기가 잘 없지 않나요? 그래 제가 한류 드라마를 전부 챙겨봤다고는 말 못 하니까, 아마 하나쯤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진짜 자신과 만나는 이야기’는 주류가 아닐 거라고 봅니다.

     

    일본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은 만화가 꼭 전형적이리만치 그래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만화나 애니는 거의 전부 ‘주인공이 스승 밑에서 수행을 쌓으며 점차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귀멸의 칼날』, 『나루토』, 『헌터X헌터』 등등….

     

    이러한 서사들을 보면, 주인공이 모두 사제 관계를 통해, 연속적으로 자기쇄신을 하면서, 날마다 다른 이가 되어갑니다. 이것이 동아시아에서의 전형적인 성숙 모델이라는 게 제 주장입니다.

     

    결론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성숙을 ‘연속적인 자기 쇄신을 통해 딴사람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서구에서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 정도쯤 이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둘은 완전히 다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뭐가 더 좋다든가 아니면 바람직하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문화권마다 ‘성숙’을 정의할 때 가치관의 차이가 있다는 말씀을 드릴 따름입니다.

     

     

    사제관계를 통해, 매일 성장을 이룩하여, 연속적으로 다른 이가 되어 간다는 그런 서사가 동아시아에서는, 인간적 성숙의 기본적인 과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제가 ‘유교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선 지금도 ‘유교적인 감수성’이 다소간 살아있지 않나 싶습니다.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더라도, 불씨만큼은 온존하고 있다 보거든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귀국에서 제 책이 상당히 많이 읽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책까지 포함하면 아마 51권째 번역서인 줄로 압니다.

     

    옆 나라 사람의 책이 많이 읽히는 사태는 두 가지 연유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똑같은 얘기를 쓰는 사람이 국내에 거의 없다는 것’. 하나는 ‘그런 책에 대한 독자 측의 수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나 제가 이런저런 도서를 통해 ‘유교적인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손 친다면, ‘그런 걸 쓰는 사람’이 한국에 거의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냉정히 자기평가를 내려보면 저는 ‘상당히 유교적인 인간’입니다. 제가 하고 있는 무도나 철학이란 게 원래 그래요. 저 높이 있는 위대한 스승을 따라 수십 년에 걸쳐 수행을 해온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인간이 되어있었습니다. 전형적인 동아시아형 인간이었다고 말해도 좋겠지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저같은 ‘수행자’ 유형은 일본 사회에서도 예외적인 존재이기는 합니다.

     

    저는 스스로를 ‘일본 문화라는 지층의 좀 오래된 결에서 태어난 인간’으로 여깁니다.현대 일본인’이 아닌 겁니다. 일본이라는 문화적 풍토의 상당히 깊은 지층에서 기어 나온 ‘고대 일본인’입니다. 그렇게 ‘오랜 일본인’의 특성이 묻어 나오는 제 글을 읽고서 ‘사고방식이 어째 낯익은데’ 하고 생각해 주시는 독자가 한국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된 이상, 제 입장에선 그런 독자에게 ‘더 깊은 곳까지 흙을 내리 파내어 보면, 우리가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원래 뿌리》가 나오지 않을까요?’라는 점을 부디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내용이 길어졌으므로 이쯤 해두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이제껏 말씀드린 것들의 여운을 음미하며 마지막까지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2024-11-10 07:12)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무지의 즐거움』 『되살아나는 마르크스』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옮긴이 코너】

     

    ありのままで: 있는 그대로의 (자유로운 원래 모습인 진정한 나 자신).

     

    디즈니 영화 넘버 “Let it go! Let it go!”는 일본어판에서는 ‘아리노 마마노 / 아리노 마마데’라고 번역되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게 일본 젊은이들이 그렇게 많이 쓰는 말이라더군요. <겨울왕국>은 엔터테인먼트지만, 어떤 면에서는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 영어 원제도 Frozen(동결된)이군요. 그것과는 별개로, 마쓰 다카코 씨의 가창력이 발군이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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