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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간 『무지의 즐거움』 이메일 인터뷰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12. 20. 15:54
외국 출판사 기획으로 ‘무지의 즐거움’이라는 책이 나왔다. 한국에 있는 편집자와 옮긴이 박동섭 선생이 필자에게 묻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책이 한 권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가운데 이메일로 긴 분량의 인터뷰에 응했음으로 수록해 둔다.
우치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의 작가이자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정지우라고 합니다.
이번에 우치다 선생님을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얼마 전 한국에 출간된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를 읽고 난 뒤에 우치다 선생님의 ‘광팬’이 되었고, 선생님이 쓰신 책을 몇 권이나 집에 쌓아 두고서 차례차례 읽고 있는 참입니다.
거기서 다양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책이란 죽기 직전까지도 다 읽지 못할 만큼 사서 쌓아 두는 것이다’하는 대목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요즘 도서 구매량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사실 너무 늘어난 나머지 조금 줄일까도 생각 중입니다.)
이번에 선생님이 쓰신 『무지의 즐거움』에 보면, 좋은 문장이란 독자에게 반드시 뭔가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식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저처럼 선생님의 문장에 분명히 영향을 받아, 그것을 행동으로까지 옮겼던 사람이 있었단 사연을 꼭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선생께서 처음으로 한국 독자를 상대로 집필하고 출판하신 ‘도서출판 유유’의 『무지의 즐거움』 출간 기념을 맞아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책을 중심으로 한 인터뷰보다는, 이 책을 통해 선생님께서 제기해 주신 사항들을 실마리로 삼아, 자유로이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특히 이번 책에서 ‘궁금한 점이 있다면 주저 말고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하신 문장에 힘입어, ‘떠오르는 대로’ 여쭤보는 인터뷰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우선 이 인터뷰를 접하는 분들 중에는 우치다 선생님을 아직 잘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우선, ‘매일 합기도 도장을 여는 철학자’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데요. 모쪼록 선생님께서 스스로 자기소개를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우치다 다쓰루입니다. 부디 잘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 질문, 항상 인터뷰 때마다 자기소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처하더군요. 20세기 프랑스 철학과 문학을 연구했고, 이게 60세까지의 ‘본업’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교원을 퇴직한 뒤에는 ‘작가를 겸업하는 무도가’라고 자기소개를 드리고 있습니다. 본업인 ‘무도가’로서 도장에서 제자들에게 무도를 가르치고 있으며, 여가 시간에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생각나는 내용을 그대로 써서 원고료를 받고 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본업’과 ‘여가’의 차이란 이런 겁니다. 제 ‘본업’이란 원래 ‘무도를 배우고 싶어 하는 분’께서 도장까지 내왕해 ‘가르쳐 줍시오’ 하고 말을 건네야만 비로소 시작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반면 ‘여가’는 제가 쓴 글을 읽고 싶은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간에 쓰는 것입니다. 머릿속 내용을 출력함으로써 지금 생각하고 있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 쓰는 것이므로, 매체가 기고요청을 하든 말든 일단 씁니다. 흥미만 있다면 어떠한 분야라도 다룹니다. 일반인 분들보다 잘 아는 영역도 있습니다. 노가쿠, 대학 기구, 의료 교육,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좀 압니다. 하지만 거기서조차 역시 ‘전문가’라고는 할 수 없지요.
이번에 출간하신 책의 제목은 『무지의 즐거움』입니다. ‘무지’라는 말만 놓고 보면 머릿속을 텅 비운 채 천진하게 놀고 있는 어린이들 아니면, 술에 취한 사람이 우선 떠오릅니다. 이 제목을 통해 우치다 선생님께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바를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그 제목은 제가 정한 게 아닙니다. 원래 한국인 편집자가 보내준 여러가지 질문에 내가 그때마다 답장을 하겠다는 거였고, 이를 한데 모아 어떤 책으로 만든다고 했는데 이외에는 달리 사전에 기획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완성된 책에 『무지의 즐거움』이라는 제목을 달았던 분이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는 저로서도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요새들어 한국에서는 헬스나 필라테스, 러닝 같이 건강해지려는 이런저런 운동이 유행입니다. 저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서도 운동을 오랫동안 꾸준히 한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아이키도나 무도의 의미에 대해 언급하신 선생님의 책을 읽을 때마다, 저도 무도를 한번 해보고 싶어지기는 하거든요. 무도의 매력이라고나 할지, 무도의 장점이라고나 할지 모쪼록 독자들에게 무도를 권유하는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무도는 ‘수행’입니다. 격투기도 아니요 건강법도 호신술도 아닙니다.
수행의 목적은 ‘천하무적’입니다. 물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목표를 내걸지 않으면 매일같은 수련은 불가능합니다.
선종 승려들은 ‘대오 해탈’을 염두에 두고 수행하건만, 거의 대부분은 그 경지에 이르기도 전에 명을 다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럴 거였으면 수행을 하지 말걸’ 하고 후회하는 스님은 아마 없을 겁니다.
수행이란 그저 무릇 담담히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는 비유로 따지자면 ‘천랑성만큼이나’* 먼 것입니다. 결코 가닿을 일은 없지만, 그 이외의 목적지는 달리 없습니다.
(* 원문 シリウス 시리우스. 가장 밝은 1등성인데 거리는 8.7광년임. - 옮긴이)
그러므로, 무도에서는 타인과의 상대적인 우열을 다투지 않으며, 누군가에게 심사를 받는 일도 없습니다. 비교할 상대란 오로지 ‘어제의 나’입니다. 이런 ‘어제의 나’와 얼마나 달라졌는가 그것을 모니터링합니다. 어떤 미세한 변화가 무엇에 의해 일어났는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떠한 전개의 예조인가…. 그것을 스스로 음미합니다. 아주 평온하고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바로 이 ‘가슴 설레는 느낌’만큼은 아이키도를 시작하고 난지 반 세기나 지났어도 전혀 변함이 없을 정도입니다.
우치다 선생님은 레비나스의 ‘제자’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사실 저도 학부 때 철학을 전공한지라 레비나스를 좀 공부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배운 게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타자중심적 사고로 갈아타야 된다는 식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꼭 숙지해야 할 레비나스 사상이 있다면 가르침을 청합니다.
레비나스 사상을 압축해서* 표현하면 ‘다른 이를 배려합시다’, ‘자기를 고정시키지 말고 차차 다른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하는 식의 잔잔한 인생훈이 될 것입니다(이건 정말입니다). 하지만 그 가르침을 ‘만인에게 타당한, 사람으로서의 참된 길’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끔, 레비나스가 얼마나 깊이 철학적 연구를 행했는지 그 도정을 헤아리자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입니다. 제가 레비나스를 ‘생애 스승’으로 확신하게 된 계기가, 그 잔잔한 인생훈을 철학적으로 기초짓는다는 것이 얼마나 곤란한 사업인지를 저로서도 조금은 이해하고 나서부터였어요.
(* 원문 約めて - 옮긴이)
이제부터는 약간 본격적으로 제가 여쭙고 싶은 사항에 대해 질문드리겠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온 질문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오늘날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심각한 저출생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죠. 이미 지방 같은 경우는 소멸하는 곳이 나타났고, 이러다가 나라 자체가 사라지는 게 아니냐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보다도 앞서 비슷한 길을 갔던 것 같습니다만, 요즘은 오히려 한국의 합계특수출생률이 일본의 절반에도 못 미치며, 이제는 한국이 전 세계적으로 이와 관련해 문제가 가장 심각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어떻게 조언 같은 것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구의 ‘환경수용능력(carrying capacity)’을 고려해 보면 80억이라는 인구는 명백히 과잉입니다. 이미 전 세계 9명 중 1명이 기아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지구 환경은 이제 더 이상 인류가 불어나는 것을 버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구 감소는 합리적인 해답입니다. 19세기 말 세계 인구가 14억이었거든요. 현재 중국은 당시의 세계 인구수만큼 통치하고 있는 셈입니다.
젊은 분들은 잘 모를 거지만, 1970년대까지 ‘인구 문제’라 함은 곧 ‘인구 폭발 문제’였습니다. 지구 자원이 고갈됨에 따라 인류가 멸망할 위험에 관해 많은 학자가 경종을 울리곤 했었지요. 그런 담론이 확 뒤집어진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구가 너무 줄어들어 몇몇 국민국가는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온 건 극히 최근 일입니다.
재난의 스케일로 따져보면 인구가 폭발하는 것보다 인구가 줄어드는 게 ‘훨씬 낫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구감소라고는 해도 ‘급격한’과 ‘완만한’이라는 정도의 차라는 게 있습니다. ‘급격한 인구감소’는 경우에 따라서는 파국적인 사태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잔잔한 인구감소’의 경우에는 잘만 하면, 고도의 문명과 풍부한 자원을 소수의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는 행복한 상태를 창출해낼 수도 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인구 감소는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인구 감소가 ‘급격한 것’이 아닌 ‘잔잔한 것’이 되게 하려면 정치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입니다.
이는 철저히 정치적 담론입니다. 경제적인 논의사항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가령 인구 감소 국면에 처한대도 경제 성장을 추구합니다. 그렇게 고안된 시스템이니까요.
인구 감소 국면에서조차 보다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자본주의는, 인위적으로 ‘인구 과밀지’와 ‘인구 과소지・무주지’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구가 과밀한 곳에서는 여태까지 했던 대로 활발한 경제활동을 영위케 하는 반면, 과소지와 무주지에서는 ‘생산성 높은 산업’을 행하겠다는 해법을 내놓을 게 뻔합니다. ‘생산성 높은 산업’에는 주식회사식 대규모 농업, 원자력 발전소, 태양광 발전 패널, 풍력 발전, 산업 폐기물 폐기장 등등… 이 예상됩니다. 이것들은 모두 생태계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 그 토지에는 더 이상 ‘지역 주민’이란 것 자체가 없습니다. 따라서 반대운동도 없습니다. 향후에 인간이 거기서 살 가능성이 없게 되면,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기업이든 정부든 부담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국토의 태반은 이후에 ‘거주 불가’하게 됩니다.
인구 감소 국면 아래 경제 성장을 노린다면, 자본의 논리가 쫓는 것은 결국 ‘도시로의 인구집중’과 ‘지방의 무주지화’입니다. 이건 틀림없습니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그러한 사태입니다.
(* 이에 관한 역사적・논리적 근거는, 우치다 선생 등이 쓴 『되살아나는 자본론: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참조 – 옮긴이)
다시금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요청사항인 겁니다. ‘그런 짓을 계속하다가는 언젠가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고, 동시에 한국의 자본주의 역시 소멸할 우려가 있지 않느냐?’ 하고 놀랄 분도 계실 텐데, 엄연하게도 그런 겁니다. 자본주의는 생물이 아니라 단순한 시스템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생존 전략’같은 건 없습니다. ‘한국이라는 《입술》이 망하면 한국의 자본주의라는 《치아》가 시리지 않겠느냐?’ 쏘아붙인다 할지라도 자본주의에는 애초에 ‘체면’*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단순한 구조체니까요.
(* 원문은 일본어 立場; 다찌바 – 옮긴이)
따라서 ‘시장 수요’에 전권위임하고서 인구 감소 문제를 방치해 둔다면, 한층 더 ‘급격한 인구감소’가 이어집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차분한 인구감소’를 위한 시나리오를 우리 스스로 즉각 제시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대신해 그 시나리오를 궁리해 줄 정치가나 기업가, 학자는 없습니다. 그리고, ‘정답을 가르쳐 줄 사람’의 등장을 멍하니 손가락만 빨며 기다리고 있을 정도의 시간 여유가 이제 더는 없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생각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어요.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저는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라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도 ‘SNS’라는 문화에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SNS가 도를 넘어서리만치 자신을 과시하는 장이 된 바, 사람들이 서로 비교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한편,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심각한 우울증과 무기력 등, 다양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치다 선생님께서는 ‘SNS’라는 요즘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SNS는 모든 사람이 (이론적으로는) 전 세계를 상대로 메시지를 퍼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인류의 발견 가운데 가장 멋진 발명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몇몇 유해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손 치면, 그것은 그 시스템 자체보다도, 시스템 ‘운용’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러할 것입니다. 이제는 시스템을 셧다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만큼, 어떻게 ‘현명하게’ 이용할 것인가, 그런 방향으로 지혜를 기울이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항상 고려하고 있는 바로는, 다양한 기술이 가져다주는 편리한 혜택(benefit)과 잠재적 위험성(risk) 사이에서 그 정도의 차*를 계량하는 판단력을 익혀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SNS는 위험성보다 혜택이 더 많은 기술입니다. 따라서, 위험성을 경감할 구체적인 수법을 생각해보는 게 보다 합리적이겠죠.
(* 원문은 存否; 있고 없음 – 옮긴이)
굳이 SNS가 아니더라도 원리적으로 말하면 다른 상황에서 역시 비슷한 사태가 왕왕 벌어지곤 합니다. 내가 중고등학생이었던 시절에는 종이 잡지 발간물이 성행했어요. 거기에는 독자 참여 코너라고 엽서 써보내는 게 있었는데, 내 경험상 SF나 음악 분야를 다루는 잡지에는 ‘자기 자신이 무턱대고 잘났다고 우겨대는’ 어린애들끼리 그 기회를 틈타 상대적인 지식이나 심미안의 우열을 다투었고, 이 과정에서 심리적인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기성 언론이 조명하지 않는, 학생들 세계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므로 사회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지요. 그러나 인간은 무릇 ‘실제보다 더욱 꾸미고 부풀리며 과시할 기회’가 생기면 저도 모르게 써먹고 싶어지리만치 구제 못할 생물이라는 점을, 제가 중학생 때 배웠던 겁니다.
이렇게 저는 지금도 스스로에게 당부하기를, SNS 뿐만이 아니고 집필 활동 전반을 통해, ‘자기를 과도하게 장식적으로 뽐내는 것’과 함께 ‘낯 모를 타인과 지식 및 취향을 가지고 상대적 우열을 다투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왜 그러시는데요?’라고 따지고 들 사람이 있겠습니다만, 타인이 나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주 젊었을 때는 다른 이들의 평가에 다소 혹했던 게 사실이지요. 하지만 무도 수행을 시작하고 나서는 ‘다른 이와의 상대적인 우열을 다투는 마음은 수행의 방해물이 될 뿐’이라는 점을 신체적 차원에서 깊이 깨달았으므로, 그 이후로는 그런 마음이 눈 녹은 듯 사라져 있었습니다.
우치다 선생님의 문장을 읽고 있자면 제 마음이 정말 자유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도 얽매임 없이 질문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작금의 시대가, 도를 넘은 ‘주관주의’ 시대라는 얘기도 많이 나옵니다.
모두가 저마다 자신만이 올바르다 굳게 믿으며, ‘객관적인 올바름’을 지향하는 일 내지는 그 비슷한 올바름의 기준이란 게 사라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과거에는 거대담론 등 객관이라는 이름 하에 휘두르는 폭력이 문제였습니다만, 오늘날에는 도리어 지나친 ‘주관주의’가 문제시되고 있는 듯합니다.
우치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포스트모던이라는 사상 조류가 있었습니다. 1980년대쯤부터 서구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객관적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주관이다’ 라는데 상당히 과격한 철학이었습니다. 그동안 있었던 ‘자기가 보는 세상만이 객관적 현실이며, 나 이외의 존재가 보는 세계는 환상이다’라고 주장했던 ‘자기중심주의(égocentrisme)’를 비판한 점은 매우 훌륭하다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경험의 객관성에 과도한 평가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지적 억제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내 눈에 세상은 이렇게 보인다. 당신에게는 세상이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대체 《진실된 세상》은 어떻게 느껴지는 것일까?’ 하는 식의 대화적인 철학의 실마리가 되는 한, 포스트모던은 생산적 담론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시는 바와 같이, 그런 바람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포스트모던은 결국 ‘객관적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이 주관적으로 구축한 세상을 보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제는 나 자신이 가장 맘에 드는 세상에 안거하며 만족하겠으니 간섭하지 말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데까지 열화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이것이 후에 ‘대안적 현실들(alternative facts)’과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로 불리는 사상 조류를 형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대안적 현실들(facts)’이란 ‘보는 사람에 따라 세상이 각기 달리 보이기는 하나, 그 모두가 사실로서 동등하다’ 하는 일종의 지적 허무주의입니다. 한편 ‘정체성 정치’는 ‘사안의 옳고 그름은 내 알 바 아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내가 속한 정체성 집단이 채용하고 있는 세계관을 너희들도 똑같이 채용하라’고 하는데, 이 역시 다른 종류의 지적 허무주의입니다.
‘나만이 객관적 현실을 보고 있다. 너희들이 보는 것은 환상이다’라는 주장은 단적으로 ‘쓸데 없는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모두가 환상을 보고 있다. 이 말은 곧 비객관적이라는 점에서는 모두가 동격인 것이다’라고 해버리면 역시 마찬가지로 ‘쓸데 없는 사고방식’이 됩니다. 이제 문제는 ‘쓸데 없는 사고방식 가운데 어느 게 보다 더 쓸모 없는 것인가?’ 하는 정도의 차이를 분명히 파헤치는 데까지 이릅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 가운데에는 ‘꽤 정확히 현실을 파악하고 있는 것’과 ‘완전한 망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무시하기 어려운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갈릴레오 시대의 ‘지동설’은 오늘날의 과학 수준으로 따져보면 상당히 부정확한 이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천동설’과 비교하면 “가설이 심플하며, 또한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게 지동설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갈릴레오의 ‘지동설’로 하여금 ‘잠정적 진리’라고 간주하고, 이를 발판삼아 한층 범용성 높은 학설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지적으로 생산적인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갈릴레오의 설이나 교황청의 설이나 모두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오십보백보’이니 아무것도 채용하지 않기로 했다면, 인류의 과학적 진보는 그 지점에서 끝났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도 절대적 진리를 한순간에 획득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정도의 차이’를 세심히 음미하는 것, 지성적 활동의 본질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무지의 즐거움』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개념이 ‘무도적 사고’였습니다. 서로간의 경쟁과 비교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이며, 또한 동아시아 특유의 남들 눈치보기가 변질된 특성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고 보면 자기 소신껏 사는 인생이란 무릇 ‘무도적 사고’와 관련 깊지 않나 싶습니다. 이 ‘무도적 사고’에 따른 삶의 방식을 간단히 소개 부탁드림과 동시에, 여기에 입각한 가치관을 현대 사회에서 실현시킬 적에 조우하기 마련인 ‘장벽’을 극복할 팁도 가르쳐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답해드린 내용은 전부 ‘무도적 사고’에 뿌리박고 있다고 말씀드려도 좋을 거라 봅니다.
목표를 ‘무한 소실점’에 두는 것, 그리고 타인과의 상대적인 우열을 다투지 않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무도에서는 ‘상대적인 우열을 다투어 이기는 것’을 가장 꺼립니다. (‘지는 것’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건 아닙니다.) 성공은 ‘어쩌다 굴러 들어온 성공 체험이 자아에 콕 박혀버릴*’ 리스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성공 체험은 사람을 거기에 ‘못 박히게’ 합니다. 이는 곧 성장이나 변화를 전부 멈춘다는 뜻입니다.
(* 원문 居着く – 옮긴이)
하지만 한번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성공 체험을 버리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실제 그것이 돈이나 명예, 권력을 가져다준 경우에는 한층 더 곤란합니다. 하지만,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그것을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도덕적인 이유에서 그렇다기보다는*, ‘성공 체험에 주저앉아 버리면 나중에 성장이 어려워지기 때문에’라는 실리적인 이유에서 비롯합니다.
(* 유교의 일신우일신, 군자불기 등 – 옮긴이)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장’이란 돈이나 명예, 권력 따위의 양적 증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돌 보듯 하기 위해’ 본인이 갖고 있는 관점을 변화시키는 게 곧 성장입니다. 아집을 버리면 버릴수록 사는 게 가뿐해집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너무 간단한 거예요.
저는 선생님께서 이번에 책을 통해 언급하신 스티브 잡스와 관련된 대목, 즉 자신의 내면에 따르는 ‘용기’를 강조하신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로써 저 또한 제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는 용기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때로는 용기란 게 제멋대로 ‘만용’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않나 합니다. 이를테면 도박을 할 용기는 때로는 자제해야만 될 수도 있습니다. 모험할 용기와, 자제해야 할 만용 사이의 균형을 취할 방법이 과연 있을까요?
용기란 것에는 다음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소수파임을 견디기’에 필요한 굳은 심지, 그리고 스스로 ‘법도가 있다’는 예지적인 확신입니다. 이것들을 형성하고 보유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에 걸친 집중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굳은 심지’ 같은 경우는 선천적인(생득적인) 조건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젊은 사람들 아무한테나 무턱대고 ‘용기를 가지고 살라’고 설교하는 건 나로서도 약간 저항감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할 수 없이,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용기를 가지고 살기를 바란다’는 동어반복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모험할 용기와 자제해야만 하는 만용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 있냐는 질문을 주셨습니다. 그 정도의 차를 판정하는 것이 다름아닌 지성의 작업입니다. 자신의 판단에 ‘법도가 있는지’를 음미하는 것은 철저히 예지적인 소업입니다. 자신의 지성이 명석하다면 ‘판단 과정에서 구애될’ 소지는 없는 셈이지요.
우치다 선생님께서 하신 ‘배운다는 건 다른 이가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 대단히 인상 깊었습니다. 몇년 전 저희 애가 태어났습니다. 아이가 말이나 노래를 배워나가면서 매년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한편, 성인이 되어가면서 뭔가를 진지하게 배움으로써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게 좀체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무언가를 배우고 변화하려고 할 때 써먹을 수 있는 어떤 요령 같은 게 있을까요? 이를테면 요즘 한국에서는 책을 필사하는 게 유행입니다. 이러한 행위도 도움이 될런지요?
‘배움’이란 다른 이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이제까지 존재했던 자신의 지성적인, 혹은 감정적인 ‘프레임워크’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재 가지고 있는 프레임워크가 휜다든지 금이 갈 수도 있겠지요? 이때 대부분은 ‘프레임워크의 모양을 딴 걸로 해보든가, 아니면 사이즈를 큰 것으로 해보자’ 함으로써 대처하기 마련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의 양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구사해 왔던 ‘지식과 정보의 처리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보다는 도리어 ‘머리가 굵어지는’ ‘머리가 딴딴해지는(미더워지는)’ 게 실제 감각에 가까운 표현이 될 겁니다.
필사란 타인의 말을 자신의 어휘보따리 속에 무리하게 집어넣는 일입니다. 텍스트를 받아들이기 위한 어휘 혹은 관념이 현재 자기가 가진 언어자원 가운데에는 마땅히 없으니만큼, 직접 그것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틀림 없이 ‘머리가 굵어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저는 처음으로 레비나스가 쓴 철학서를 번역할 때 거기에 쓰여져 있던 걸, 거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별 수 없이 프랑스어를 일본어로 직역해 나갔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필사’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런 작업을 20년 정도 이어나가면서 수천 쪽이나 옮기는 사이에, 어지간히 ‘레비나스어 사전’ 비슷한 것이 제 머릿속에도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제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어휘와 개념이 ‘사전’으로부터 일본어로 번역된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레비나스가 뿌린 씨앗이 제 머릿속에서 싹튼 셈이지요. 애초에 계기는 다른 이로부터 찾아온 것이지만, 그것을 나 자신이 땅을 고르고 정성껏 가꾸었습니다. ‘배움’을 통해 다른 이가 된다는 것은 그러한 경험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모든 문제나 고민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들 합니다. 물질만능주의 사회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돈이 자존감을 결정하고, 돈으로 서열을 매기며, 돈만 있으면 행복이라든가 인생의 가치가 가름된다고 다들 믿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습니다. 다들 돈 걱정, 돈에 대한 불안에 휩싸여 있으며, 재테크 기회를 놓쳤다가는 나 혼자만 ‘벼락 거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과 사랑, 인간관계 등 모든 것에 이해득실을 따집니다. 돈은 무릇 생존과 직결되어 있으니만큼, 인간이 그러한 문제로부터 탈피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정말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면 좋을지에 대해 우치다 선생님의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돈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분명한 건 ‘부자’의 정의입니다. 그것은 바로 ‘돈이란 걸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하나씩 차고 있는 ‘밥통’이 어쨌는지를 생각하는 일이 잘 없습니다. 위장이 온전히 기능하고 우걱우걱 밥을 소화시키는 때는 ‘위장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 위액이 잘 분비되고 있기는 한 건가?’ 와 같은 걱정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기 마련이지요.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 걱정만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돈 없는 사람’이고, 그러지 않고서 두 다리 쭉 뻗고 자는 사람이야말로 ‘돈 많은 사람’ 입니다. 그리고 이는 보유 금액이 많은지 적은지와는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수입액 이하 선에서 지출하며 사는 것’입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번듯한 일자리를 안 찾고 흐늘흐늘 지낸 기간이 좀 됐었습니다. 번역이나 과외 아르바이트로 먹고 살았지만서도, 돈 걱정은 해본 적이 없었어요. 월간 수입이 10만 엔이라고 치면, 9만 엔쯤으로 버티는 겁니다. 그러면 1만 엔은 저축할 수 있지요.
그 무렵 제 주위에는 ‘생활 수준이 한 번 올라가면 아래로 내려갈 수가 없게 된다’고 공언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돈 걱정하느라고 엄청나게 시름했지요. 근데 ‘생활 수준 상향’이란 것의 실태가 뭔 줄 아세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만 먹던 놈이, 무리해서 삼선 짜장을 시킬 수 있게 된, 그런 정도에 불과했던 거예요! 근데도 그렇게 생겨난 수백 엔의 비용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밤에 잠이 안 올 정도로 고통받게 됩니다. 그런 경우가 은근 많아요.
(* 일본의 고도성장기이고, 한국의 90년대 풍경에 가까울 것이다. - 옮긴이)
나는 수입 범주 내에서 생활하는 것을 항상 원칙으로 삼아왔기에, 대출이란 것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아 물론, 일생동안 세 번 정도 있기는 했어요. 이 또한 착실히 갚았습니다.
나는 가지고 있는 돈의 액수로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정해진다든가, 인간으로서의 귀천마저 판가름난다는 생각을 평생동안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요.
왜 그러느냐면은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전쟁을 겪은 세대인 선친에게서 ‘학벌이나 사회적 지위, 재산이란 건 말야, 그 인간의 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그 사람이 《철학을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야말로 중요한 거야’라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와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만주 사변이 일어났던 해에 만주로 건너가, 2차 세계 대전이 마무리되고 나서 꼭 1년 뒤 베이징에서 귀국한 분입니다. 15년 동안 중국 대륙에 있으면서 인간군상의 온갖 천태만상을 맛보고 온 셈이죠. 식민지를 지배하는 종주국 사람일 때, 전쟁에서 시민을 학살할 수 있을 만치 실력차가 있을 때, 혹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난 뒤 도망 나올 때 등등. 그때마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무자비하며, 비정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실지로 목도하고 왔으리라 봅니다. 그것의 결론으로서 ‘상대가 어떤 나라 사람이든 간에, 한 치도 흔들림 없는 신념을 지닌 사람, 말 한 마디조차 중천금으로 여기는 사람이라야 믿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신 겁니다. 저는 그 점만큼은 아버지의 교훈을 일생동안 충실히 따랐다고 할 수 있겠죠.
우치다 선생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번에 우리나라 사람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러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서점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별안간 한강 작가의 책이 100만 부 이상 나갔다고 합니다.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아니 말할 수 없습니다.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성인 태반의 독서량이 연간 단 1권도 되지 않는다는, 서글플 정도로 냉랭한 분위기였는데 이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겁니다.
이러한 현상과 더불어 우리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문학과 책의 앞날과 운명, 의미 등등에 관해 우치다 선생님의 고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그게 어떤 계기든 간에 책을 읽게 된 것은 잘된 일입니다. 도서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대량으로 반포되고, 대량으로 읽히며, 많은 사람이 도서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런 조건들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탁월한 내용의 책이라 하더라도 제한된 독자들만 그 책을 수용하는 경우, 책이 현실을 바꾸는 힘*을 발휘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립니다. 심지어 긴 시간을 경유하였음에도, 결국 현실을 바꾸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 원문 現実変成力. ‘현실 변성력’은 우치다 선생이 지어낸 말이자 빈출 어휘 – 옮긴이)
그렇기 때문에, 도서는 ‘잘 읽히는 맛(readability)’ 내지는 ‘독자 친화성(reader friendly)’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 두 단어를 곰곰이 따져 보면 결국 ‘읽기 쉽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게 ‘간단히 쓰여졌다’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이 책은 ‘당신’을 바라보며 쓰였음을 고하는, 독자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まなざし)’**입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어떤 문장이 쓰여져 있음은, 독자에게 전해집니다.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을지언정,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수신인이 자신이라는 점은 안다는 거예요. ‘내용물(contents)’과 ‘받는이(address)’는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레비나스 철학개념어 ‘간청; supplication, appel, requête, plénière 등’. 우치다 철학의 ‘경의敬意’에도 해당 – 옮긴이)
저는 이 얘기를 굉장히 자주 해왔습니다. 레비나스의 『곤란한 자유』라는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도통 뭐가 쓰여져 있는지를 못 알아먹었어요. 그러나 제가 이 책의 독자로 상정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알았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독자가 되게끔 자신을 길러나가거라’ 하는 레비나스 선생님의 메시지는 분명히 전해졌습니다. 도무지 어찌 된 일일까요? 그건 아마 레비나스 선생님께서 책의 첫머리부터 별안간 ‘아낌 없이’ 선생님의 철학적 예지가 품은 본질을 독자에게 때려박아 주셨기 때문에 그랬던 겁니다. 무도적으로 빗대어 보면 이렇습니다. 입문한 날 처음 수련하는데, 그날 스승이 ‘오의(奧義)’를 가르쳐 주신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 일은 보통, 스쳐 지나갈 사람에게는 하지 않는 법입니다. 하지만 느닷없이 첫 시간부터 ‘오의와 비전(秘傳)’을 가르쳐 주신 거예요. 레비나스 선생님이. 그러니만큼 저도 전기 충격을 받은 것만 같은 입장이 되는 겁니다. 이런 기분을 특정 도서를 통해 누구든지 느껴볼 수만 있으면 그것 참 바람직하겠다 싶은 거예요.
(*** 원문 中味: 도검에서 칼날에 해당하는 부분. 칼의 몸. / 사물의 본질, 외견이 아닌 실질. / 용기에 들어 있는 것. 어느 것 안에 들어 있는 것 – 옮긴이)
우리가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사는 방법이 있을까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인생을 최고로 만드는 방법이 있을런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추상적인 질문 같군요. 그러나 정말로 대답을 알고 싶으신 눈치인 듯하니,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보내겠다고 사전에 계획할 수는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미래는, 오리무중이니까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고를 당할 지도 모르고, 천재지변에 휘말릴 지도 모르고, 사악한 친구놈 때문에 고생할 지도 모르며, 파트너에게 배신당할지도 모르고, 인과응보에 따른 병치레를 해야 할지도 모르고…. 하여튼 이 모든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제가 그랬거든요.) 일단 일이 터진 뒤에는 ‘에효. 세상사 다 그런 거지.’ 하는 마음을 먹으면 그게 바로 ‘후회 없는 인생’을 산 셈이 되는 겁니다.
후회하는 인생인지 아닌지는 일이 다 지난 뒤의 마인드셋에 달려있습니다. 사전에 ‘언젠가 후회할 일’을 미리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저를 괴롭힌 사람들은 원래 첫인상만 봐서는 ‘좋은 사람’이었으니까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생을 마무리할 무렵에 ‘뭐어, 좋은 일 궂은 일 다 있었지만서도, 결국은 잘 산 셈이야’ 하고 미소 지을 수만 있으면 충분한 겁니다.
정지우 씨는 아직 창창하시니까, 지금 걱정해도 소용 없는 후회를 사서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40년 쯤 지난 뒤, ‘오오, 이제 슬슬 갈 때도 된 듯하니, 내 인생을 후회할지 말지, 잠시 인생을 돌이켜 점검해 보자’ 하는 식으로 (대단히) 한가한 날 오후 두세 시쯤에라도 멍하니 생각해 보면 되지 않겠나요?
맨 마지막 질문, ‘최선을 다해 자기 인생을 최고로 만드는 법’이 궁금하셨댔죠? 근데, ‘최선’이나 ‘최고’라는 말은 그다지 쓰지 않는 것이 좋아요. 왜냐하면 ‘최선’이고 ‘최고’고 할 것 없이, ‘그 이상은 없다’는 걸 전제하고 있으니까요. 결국 자기 실제 인생에 대해 그렇게 단언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자기 인생이 전부 ‘최선 마이너스 몇 점’ ‘최고 마이너스 몇 점’ 하는 식의 감점법으로 표시되는 거니까요. 바보 같은 짓입니다.
야구에서 타자가 무조건 연전연타하는 것만이 ‘최선이자 최고’일 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미숙하고 미완성에 불과하니까, 그런 야구는 하나 마나라는 마인드셋을 가진 선수는 없지 않겠어요? ‘3할 쳤으니 순위권 들 듯’ ‘2할 5푼 했으니까, 다음 시즌에는 1군 가겠군’ 쯤의 ‘정도의 차이’에 불과한 의미를 만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그쯤 해두는 게 어떨까요? 감점법이 아니라, 가점법으로 생각하자구요. ‘인생의 끗수’ (같은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 ‘0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여기고 사는 게 마음 편할걸요?
무도적 사고라 함은 즉 ‘무한 소실점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무도적 사고에서는 목적지만 부합된다면, 어떤 지점에서 수행을 끝내더라도 상관 없다고 칩니다. 그게 무한 소실점이예요.
가령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부산역까지 가는 게 수행이라고 해 봅시다. (실제로는 천랑성이 되겠습니다만, 비유이므로 간단히 해놓겠습니다.) KTX 열차를 탄 시점에서 수행이 시작되는 겁니다. 실력이 부족했다든가, 무운이 따르지 않았다든가, 탑승한 지 15분 만에 광명역에서 숨이 끊어진대도, 꾸역꾸역 장도에 올라 대전역까지 갔다 하더라도, 수행자로서는 모든 게 다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을 했다’는 사실 자체만이 중요한 겁니다.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남들보다 얼마나 멀리 갔는지, 혹은 남들보다 빨리 갔다 하더라도, 모조리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겁니다. 부산역까지 가닿지 못했던 걸 원망하는 수행자도 없고, 남들보다 역 하나쯤 제꼈다고 과시하는 수행자도 없습니다. 왜냐면 ‘천하무적’ 역에는 아무도 무사히 도착할 수 없으니만큼 그렇습니다.
무도에서 말하는 ‘무한 소실점’이 ‘최선’이나 ‘최고’와는 다르다는 점을 이제 알아들으셨겠지요? ‘최선’이니 ‘최고’니 하는 것들은 사바 세계의 공즉시색입니다. 다른 이와의 상대적인 비교나 경쟁 속에서 피어오르는 망상입니다. 하지만 ‘무한 소실점’은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는 그런 목표입니다.* 이건 너무 머나먼 목표라서, 다른 이와 비교를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내거가 네거보다 천랑성에 1센티 더 가까운 거 안 보이냐?’ 하고서 좋아하는 바보는 수행자 가운데 없으니까요.)
(* 此の世ならず: 죽은 것과 같은, 신묘할 정도로 아주 진기한, 시공을 초월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 옮긴이)
자, 이제 제가 드리는 답장은 끝입니다. 어려운 질문만 하시는 통에 퍽 고단합니다만, 제 의중이 잘 전달되셨다면 좋겠습니다.
두서 없는 질문만 잔뜩 드렸습니다만, 선생께서 답장해 주시기만을 그저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장문의 내용을 읽어주신 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언젠가 우치다 선생님과 더 깊이 말씀 나눌 날이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2024-11-04 13:2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무지의 즐거움』 『되살아나는 마르크스』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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