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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 성숙이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12. 4. 23:18
선거 전, ‘정치판에 이의제기를 무효표로 표명하자’는 캠페인을 목격했다. 일부러 무효표를 던짐으로써, ‘현행 선거 제도로는 우리가 스스로 흡족히 찬성의 뜻을 맡길 만한 대표를 뽑을 수 없다. 나는 지금 입후보해 있는 어떠한 후보자에게도 투표할 의사가 없다. 각 정당은 내가 투표하고 싶어질 만한 후보자를 우선 찾아내고 나서 대령하도록’ 하고 분노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효표는 그냥 ‘사표(死票)’다. ‘현상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의사 표시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이건 그냥 ‘현상 긍정’을 표하는 것밖에는 의미하는 게 없다.
‘무효표를 던지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집권 여당의 ‘숨은 지지자’든지, 아니면 민주정에서의 선거라는 게 뭘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 못 하는 사람이든지, 혹은 둘 다일 수도 있다.
무효표 지지자들이 착오하기로는 선거란 게 ‘자신이 전폭적으로 신뢰를 맡길 사람’에 한 표를 던지는 것쯤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던데, 이는 대단히 깊이가 얕은 정의이다. 확실히 선거공보물이나 길거리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봐도, 유권자가 뜻하는 바를 전적으로 맡길 후보자 자체가 아예 없는 선거구가 산더미처럼 있다. 그래서 표를 안 던지겠다는 것이다. 그런 게 일종의 의사표시가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을 거로 본다.
하지만 민주정의 선거란 ‘전폭적 신뢰를 맡길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한술 더 떠 ‘나라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될 수 있는 한 공직에 내보내지 않기 위한’ 것이다. 맘에 드는 사람을 골라내어 그 사람을 응원하는 그런 속 편한 작업이 아니라, 오히려 후보자들의 악의나 거짓말, 불성실과 약함을 매섭게 바라보며 점검해야 하는 우울한 작업인 것이다.
영어에 lesser evil이라는 표현이 있다. ‘조금 덜 나쁜 쪽’을 의미한다. 선거에서 우리들 투표의 목표는 ‘조금 덜 나쁜 쪽’이다.
지금 당장 ‘쓸모 있겠다’ 싶은 확신이 드는 후보자가 한 명도 없다면, 그 가운데 ‘좀 더 나은 어젠더’를 내걸고 그것을 ‘보다 성실히 이행할 것 같은 사람’을 샅샅이 찾아내는 게 도리다. 따라서, 선거가 끝난 뒤 당선자를 둘러싸고 지지자들이 만세를 외친다든지, 감읍하며 목이 멘다든지 하는 건 ‘민주정 후진국’의 풍경인 것이다. 민주정 선진국이라면, 자신이 뽑은 당선자를 앞에 두는 경우조차도, 그 눈길에는 항상 의구심과 불신이 섞여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명제는 합중국 헌법 비준 과정에서 ‘연방정부에 주정부보다 큰 권한을 부여하여야 한다’고 설한 바 있는, ‘페더럴리스트(연방파)’ 알렉산더 해밀턴으로부터 비롯된다.
독립하고 난 뒤 어언 10년, 아직 미국을 어떤 나라로 만들지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던 시기에 ‘연방파’는 민주정이란 무릇 공감과 동질성을 기반으로 해서는 아니 된다고 설했다. 민주정은 공인에 대한 의심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3개 주는 뿔뿔이 흩어진 ‘스테이트(State)’였다. 스테이트는 같은 시기에 같은 지역을 개척한 사람들이 형성한 정치단위이기 때문에 동질성이 높다. 스테이트는 저마다 헌법이 제각각 다르다. 독립 직후의 연방정부란 것에는 아직 실체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이제까지와 같이 스테이트가 정치적 실력을 보유해야지, 연방정부는 그저 명목상 존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던 주정부 우선파가 다수 있었다.
연방파는 이런 분위기에 반기를 들어, ‘이대로 가다가는 미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이 당시에는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이 신대륙에 거대한 토지 및 권익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이 만약 모종의 개입을 하고 나와, 합중국이 서넛으로 분단된 상태로 ‘대리전쟁’이 일어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영국군이 버지니아에 침공했을 때에 코네티컷이 ‘바깥 스테이트 일은 상관 않는다’ 하고 ‘스테이트 퍼스트’를 주장하면 어쩔 것인가?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대립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경우, 아마도 많은 수의 스테이트 구성원들은 불문곡직하고 자기 주 편을 들며 총을 들 것이다. 공감과 동질성을 기반으로 결합한 공동체는 ‘불문곡직하고’, 자신이 속해 있는 정치 단위를 위해 전쟁에 나선다. 따라서 스테이트가 군대를 보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해밀턴은 그렇게 썼다.
“권력은 사람들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의 손안에 있는 것보다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자의 손안에 있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연방주의자 논집』 25)
이 문장은 민주정을 설명한 어록 가운데 가장 그 지견이 깊은 것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민주정은 ‘사람들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하기 위한 시스템이 아니다. ‘전적으로 신뢰 못 할 자’가 결코 권력을 자의적으로 휘두를 자유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제도인 것이다.
이 한마디 대목을 단언해 놓아야만 비로소 민주정의 성숙이 시작될 것이다. (「주간금요일」 10월 30일)
(2024-11-04 09:4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무지의 즐거움』 『되살아나는 마르크스』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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