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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스 레터) 이상한 애들이 올 거야인용 2024. 12. 14. 12:26
선생님께 들은 또 다른 인상적인 말씀은 “제가 도장을 열면서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것이 있으면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들었습니다. 이때도 빙긋 웃으시면서 “이상한 녀석이 올 거야”라고만 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도 저는 오랫동안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선생님이시라면 “이상한 녀석이 올 테니까 방범과 안전 대책을 철저히 해라”라든지 “면접을 제대로 봐서 이상한 녀석이 입문하려고 하면 거절하라”라는 말은 하실 리 없었을 테지만요. 계속해서 그 말씀이 신경 쓰였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인가 지나고 나서 문하생들과 환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각자 입문한 동기를 밝힌 때가 있었습니다. 문하생 태반이 “사는 방식을 바꾸려고” 문을 두드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집에 있는 것이 괴로워서”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서”와 같은 이유로 삶이 힘들어진 이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문했다고 말했지요.
‘그렇구나, 그랬구나, 그렇지’ 하며 무릎을 쳤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그랬습니다. 인생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삶의 방식을 바꾸었을 때, 누군가를 스승으로 삼고 그 스승이 제 마음가짐을 송두리째 바꾸어 주기를 기대하고 합기도에 입문했지요. 그러고 보면 ‘이상한 녀석’은 ‘저 같은 녀석’이었습니다. “삶의 방식을 바꾸려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정성스럽게 지도하도록……” 아마도 선생님은 이런 가르침을 주신 걸 겁니다.
무도 수련의 목표는 ‘천하무적’입니다. 물론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무도가는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누구든 그 목표를 향한 일념으로 수련합니다. 99퍼센트의 수련자는 도중에 수명이 다해 목표에 한참 미치지 못한 곳에서 숨이 끊어지지만 그건 조금도 애석한 일이 아닙니다. 목표의 방향만 옳으면 그 여정의 어디에서 끝나든 상관없으니까요.
지금 제게는 이백 명 정도의 문하생이 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상대방을 메친다든가 판을 끝낼 수 있는 구체적인 신체 기술이 아닙니다. ‘목적지’입니다. 어디를 향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것, 그것이 다입니다. 사제관계는 제가 제자들보다 강하거나 빠르거나 기술이 뛰어나서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제관계의 형태를 결정짓는 것은 그런 구체적인 기술 차이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저는 늘 제가 그들보다 강하고 빠르고 기술이 뛰어남을 과시해야겠지요. 아주 역설적이지만, 기술 면에서 이 ‘비대칭성’을 유지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제자가 어떻게 해서든 저보다 잘하지 못하도록 가르치는 겁니다. 상대적인 우열을 유일한 ‘잣대’로 사제관계를 구축하면 아무래도 그렇게 됩니다. 무의식중에 제자의 성장을 방해하는 교수법을 취하게 됩니다. 저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문하생 전원이 저보다 강하고 빠르고 기술이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넘어서는 제자를 기르는 것, 그것이 교육의 개방성이고 풍요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학생일 때는 이과 계열 학생 대다수가 제2외국어로 러시아어를 이수했습니다. 1960년대까지 자연과학 중 몇몇 분야에서는 소련이 구미의 수준을 능가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은 학술적으로 몰락했고, 러시아어 이수자 수도 바닥을 쳤습니다. 당시 학생들의 비정한 시각에 저는 조금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영어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러시아어・중국어・독일어・아라비아어에 능통한 사람들이 그 ‘희소가치’ 덕분에 영어 화자보다 중요한 자리에 임명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 거죠. 그럴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미 일부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아라비아어와 터키어 학습이 조용한 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독자적인 예민한 감각으로 ‘수중의 자원’을 어디에 ‘투자’해야 효과적일지 손수 찾고 있는 겁니다. 설령 그들의 예측이 어긋났다고 해도 그들은 잃어버린 시간과 수고를 돌려달라는 요구를 어디에서도 할 수 없을 겁니다.
(…) 진학할 적에, 정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부모님이 반대해도 ‘학비는 제가 내는 거니까요’라고 대꾸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원치 않은 입학’이 거의 없었던 겁니다. 국공립 대학에 간다면 가고 싶은 대학을 자기가 고르게 됩니다. 근데 말이죠, 이건 진짜인데요, 일본 대학의 학술적인 영향력이 그때 최고조였습니다.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부모님이나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겠다’고 말하고서 대학에 간 것이므로, 성과를 내지 않으면 체면이 안 섭니다. 자기가 한 대학 선택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매일 싱글벙글 기쁜 표정으로 통학하는 게 가장 효과적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그런 학교 가서 뭣에 써먹으려고?’라는 식으로 시비 거는 사람들에게 되갚음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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