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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파라노이드 알코올홀릭 - 오다지마 다카시인용 2025. 1. 8. 11:57
계속해서 들려오는 환청
불면증 닷새째, 환청이 들려왔다.
그 환청도 처음에는 환청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처음 이를 알아챈 것은 전철 소리의 변화였다. 당시 사사즈카 노선 바로 옆 아파트에 살았는데, 창문 바로 맞은편에 게이오선 선로가 지나가고 심지어 선로가 바뀌는 포인트가 있는 곳이었다. 전철 소음은 그야말로 굉장했다. 그런데 그 ‘덜컹덜컹덜컹덜컹’ 하던 전철 주행음이 ‘뭔데뭔데뭔데뭔데’ 하는 인간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그래서, 어라? ‘덜컹덜컹’이 ‘뭔데뭔데’로 들리잖아, ‘이거 정말 신기하네. 진짜인가?’라는 생각에 진지하게 다시 들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들어도 ‘뭔데뭔데’로 들렸다. 그제야 비로소 ‘아아, 이거 좀 이상하네. 기분 탓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사람 목소리로 들리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방에 혼자 있기가 불안해졌다. 그러자 다음으로 어디선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겨우 들릴락 말락 하는 남자와 여자의 대화 소리였다.
어디서 들려오는 목소리일까. 윗집일까? 옆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벽에 컵을 대고 자세히 들어보니, 아무래도 죽이느니 마느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대체 누구를 죽인다는 걸까. 애완견인가? 진지하게 경찰에 신고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상대는 생선 같은 것일지도 모르니,(웃음) 그런 걸 신고하는 것도 우습고 해서 말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거 참 난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방 안에 혼자 있는 것이 불안했다. 그래서 TV를 켰던 기억이 난다. 그러자 TV에서 여배우가 말한 대사와 똑같은 말이 내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2초 정도 뒤에 말이다. 그때 처음으로 ‘아, 내가 듣고 있는 게 바로 환청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덜컹덜컹’이 ‘뭔데뭔데’로 들리고, 옆에서 대화 소리가 들리는 것은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렇지만 여배우가 말한 대사가 2초 뒤에 등 뒤에서 들리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 환청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는 정신병으로 입원한 친구처럼 ‘아, 나도 결국 그쪽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래도 머리가 이상해진 모양이라고.
이상하게 궁색하고 쩨쩨해진다
그럼 망상을 품지 않았을 때에 알코올중독자가 정상인가 하면, 역시 그렇지도 않다. 평소 사고방식이 어딘가 조금씩 어그러져 있다. 엄청나게 궁색하거나 이상하게 비뚤어져 있다.
나도 술을 가장 많이 마셨을 무렵, 돈은 궁했지만 먹을 게 없을 정도로 상황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 생각해보면 확실히 궁색했다. 같은 상표의 휴지여도 다른 가게에 가면 15엔쯤 비쌀 때도 있지 않은가? 그런 것 하나하나에 굉장히 화를 냈다.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비싸게 받는거야!?’라면서. 가게별로 가격을 책정하는 방식이 다를 테니 내가 화를 낼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몹시 화가 났다. 이렇듯 돈 때문에 약간의 트러블이나 오해가 생기면 자그마한 것에도 일단 의심부터 하고 봤다. 이 상태로 계속 술을 마시면 큰일 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런 형태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원래 어렸을 때부터 궁색하거나 쩨쩨한 인간이 아니었고, 지금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자잘한 것들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참, 산토리라는 회사가 이상할 정도로 싫었다. 딱히 술이 맛있고 맛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술을 파는 회사 주제에 문화적 기업이라는 냄새를 풍기고 다니지 않는가? 메세나 활동도 하고, 어쩐지 딜레탕트한 느낌이랄까. 딜레탕트한 일본인은 다른 곳에도 많이 있지만, 술을 파는 놈들이 문화인인 척한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그 점을 용서할 수 없었다.
지금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당시 산토리에 대한 증오는 조금 도를 넘어섰다. 산토리의 매출에 도움이 될 만한 술은 절대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주면 마셨다.(웃음) 누가 사주면 마셨지만 직접 사는 일은 없었고, 제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산토리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소문의 진상》이라는 잡지에는 산토리를 비방하는 원고를 쓴 적도 있었다.
90년대 초반쯤 ‘디어쓰’라는 맥주가 있었는데, 혹시 기억하는가? 그 알루미늄 캔으로 나온 디어쓰 말이다. 정식 명칭은 ‘산토리 이즈 씽킹 어바웃 디 어쓰(Suntory is thinking about the earth)’지만 대부분 이를 줄여서 디어쓰라고 불렀다. 상품명을 번역하면 ‘산토리는 지구를 생각합니다’라는 의미다. CF에는 80살 정도의 나이의 론섬 조지(Lonesome George)라는 이름을 가진, 당시 멸종을 앞두고 딱 한 마리 남아 있던 갈라파고스땅거북의 영상을 사용했다. 그게 또 화가 나는 포인트였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갈라파고스땅거북을 이용했다는 것에 먼저 화가 났고, 알루미늄 캔에다 술을 팔면서 친환경 어쩌고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싶었다. 뭐, 애초부터 친환경이라는 태도 그 자체가 정말 싫었지만.
술을 파는 인간이 지구를 소재로 설교를 늘어놓다니, 당신들이 지구 환경을 깨끗하게 만든다는 건 알코올중독으로 사람을 죽게 만드는 걸 의미하는 건가? 이런 이야기를 쓴 기억이 난다.
어쨌든 알코올중독 전성기 때는 무턱대고 화를 냈다. 고집과 아집이 세지는 것이다.
술을 마시는 사람 중 대체로 멀쩡하긴 한데 어느 한 포인트에서만큼은 고집이 엄청나게 세지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이 사람은 어쨌든 야구 이야기만 나오면 고집불통이 되어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그런 사람 말이다. 어디든 한 명은 있을 거라 생각한다.(웃음) 그것도 분명 알코올의 작용 때문이다. 어떤 포인트에서 사고방식의 유연함이 제로가 되는 것이다.
*
‘미국에 가면’과 ‘어차피 죽을 텐데’
술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역시 어딘가 ‘빠져나갈 구멍’이 필요하다.
특히 나 같은 부류의 인간은 애초부터 다루기가 어렵기 때문에 금방 심통을 내는 스스로를 달래기 위한 방법이나 수단이 없으면 다른 사람 또는 사회, 일에 관해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자기 자신과 잘해나갈 수가 없다.
즉, 선천적으로 제멋대로인 인간은 남들이 보기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며 맘 편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본인으로서는 자신의 기분을 좋게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꽤 고생을 한다. 그러니까 판타지든 술이든 자신이 흐트러질 수 있는 곳 또는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심리적 속임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머릿속에서 생각한 설정이었지만 20대 전반까지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나에게 있어 유일하게 빠져나갈 구멍이었다.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많든 적든 간에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억압받는 등 그때그때 개인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젊었을 때는 ‘나는 일본에 있으니까 안 되는 거야. 세상 어딘가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가기만 하면 나는 마음껏 나다운 인간으로서 날개를 펼칠 수 있어’라는 이야기를 설정함으로써 문제들을 머리 밖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 미국은 1960~70년대 젊은이들에게 그런 나라였다.
그래서 그 시절 많은 젊은이가 실제로 가고 말고와는 상관없이 ‘이 인색하고 쪼잔한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지금은 머리 나쁜 과장, 근성 없는 부장한테 말도 안 되는 억압을 받고 있지만, 미국에 가기만 하면 반드시 길이 열릴 거야’ 정도의 망상을 했다.
실제로 미국이 모든 소망을 이루어주는 꿈의 나라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의 실질적 의미는 그런 것이다. 요즘 이 미국 이야기는 굉장히 움츠러들었다. 아마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물으면 “미국에 가면 어떻게든 된다니, 바보 아니에요?”라고 말하지 않을까? 뭐, 완전히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맞는 소리를 하는 그대들은 괴롭지 않은가, 하고 나는 궁금해진다.
나는 미국에 가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반 정도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미국에는 멋들어진 음악과 훌륭한 영화가 있고 자유로운 사람들이 마음 편히 생활하며, 재능 있는 인간이 미국에 가면 인종이나 피부색과는 상관없이 모두가 양팔을 활짝 벌리고 따뜻하게 맞아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어딘가 마음 깊은 곳에서 믿고 있었던 모양으로, 현실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잠정적인 출구로서의 기능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국도 결국 환상에 불과하다면 ‘그럼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꿈을 펼치면 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대신할 곳을 찾는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 내가 계속 품었던 역전의 시나리오랄까 마술적 사고에는 두 장의 카드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미국이고 나머지 하나가 자살이었다. 정말 바보 같은 이야기이지만, 진짜니까 어쩔 수 없다.
후자는 애당초 술에 끌려다니기 쉬운 카드였다.(웃음)
정리 안 되는 여러 문제를 생각할 때, ‘언젠가는 미국에 가고야 말겠어’, ‘언젠가 죽어버릴 거야’라고 생각하며 문제나 귀찮은 일들을 뒤로 미뤄버리면 일단 성공이다. 하지만 그렇게 당면한 문제를 미루면 미룰수록 해결은 멀어지니까, 미국으로 출발하거나 자살을 결행하는 날짜를 앞당기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그 방법을 쓸 수 없게 되면 당분간 사고를 중단하기 위한 스위치로서 일단 알코올 쪽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시작한다. 한번 이쪽으로 빠지면 그 사이클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심지어 사이클이 깊어질수록 더는 원래의 몸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원래 ‘알코올 사이클’이란 연속음주발작부터 다음 연속음주발작이 일어날 때까지 나타나는 반복된 패턴을 가리키는 용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알코올중독자의 사고 패턴을 설명할 때 사용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개미지옥이라는 말에는 원래 저속한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 인간이 저지르는 실패란 저속한 것이다. 심각하면 할수록 더더욱.
술과 문장 ➋
앞에서 나는 술이 문장을 쓰기 위한 스위치가 될 수 없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더불어 술이 집필의 스위치가 되는 건 그 인간이 알코올중독자일 때로 국한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알코올중독 진단을 받을 정도의 대주가가 아니더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원고를 쓸 수 없는 인간은 실제로 어느 정도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장에 과잉 의식을 지니고 있는 작가가 술의 힘을 빌려 집필의 장애를 낮추는 예가 실제로 그렇게 드물지 않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문장에 대한 요구 수준이 지나치게 높은 완벽주의자는 자주 자승자박에 빠진다. 그래서 그런 부류의 작가 중에는 술을 마셔 자신의 엄격한 비평안을 흐리게 함으로써, 쓰면 지우고 쓰고 다시 지우는 무한루프에서 해방되는 이들이 있다.
본인은 술을 통해 용기를 얻었다고 자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술이 초래한 건 용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술을 마셔야만 여성을 유혹할 수 있는 남자는 그렇게 드물지 않다. 아니, 그보다 완전히 말짱한 정신으로 여성을 유혹하는 남자 쪽이 오히려 소수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세상의 남자들은 술의 힘을 빌려, 술이 초래하는 작용 때문에 여성을 유혹하는 걸까?
아니라고 본다.
술이 초래하는 것은 용기 그 자체가 아니다. 술이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은 조금 더 치사한 무언가, 즉 ‘변명’이다.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든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든 유혹하는 쪽과 유혹당하는 쪽 사이에서 “술에 취했으니까”라고 미리 변명 내지는 도망갈 구석을 만들어두니까 우리는 계획된 우행을 향해 발을 내디딜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부끄러움이 많은 일본인 대부분은 영원히 사랑에 빠지는 어리석은 인간은 될 수 없다.
다만 꼬시거나 유혹하는 등의 행위를 더 실태에 맞게 평가한다면, 애당초 ‘같이 술을 마신다는’ 시점에서 양자는 이미 서로를 유혹하기 위해 어느 정도 합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여성을 유혹하고 싶을 때 같이 술을 마시면 더 성공률이 높아진다”는 말은 반은 틀렸다. 정확하게 다시 말하면, “같이 술을 마시기로 합의한 단계에서 이미 앞일의 전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의견 일치를 보았다”가 맞는 말이다.
술을 마신다→막차가 끊긴다→밤을 보낼 숙소를 구한다처럼 일련의 흐름이 이미 순서도처럼 만들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물론 막차라는 것이 갑자기 출발하지는 않는다. 함께 술을 마시던 두 사람이 막차가 출발할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함으로써 ‘막차가 가버리는 것을 묵인’하는 공범 행위를 통해 ‘암묵적 약속’을 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벌써 12시 반이네.”
“어머나, 정말! 어떡하지?”
글로 쓰는 것도 우스운 전개다.
이리하여 ‘예기치 못한 사건’에 맞닥뜨린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첫차가 다닐 때까지 몇 시간을 보내기 위한 숙소를 찾게 되는데, 물론 그들이 현재 처한 사태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닐뿐더러 앞으로 시작될 전개를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일은 미리 계획된 실수다.
이야기가 조금 다른 길로 샜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술이 여러 상황에서 ‘예측된 변명’으로서 기능한다는 점이다.
남녀와 관련된 일이 아니더라도 이와 비슷한 사태는 매일 일어난다.
상사와 부하든, 발주한 회사와 발주 받은 업체든, 고객과 판매처든 대체로 ‘통상적인 상황에서 솔직한 의견 교환이 어려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술의 힘을 빌린다.
그래서 ‘술을 마셨으니까 하는 이야기인데’라는 공통된 변명을 늘어놓은 뒤, 그다음 단계로 상담을 하거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 술 덕분에 본심을 이야기한다는 소리니까 그건 나름대로 좋은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경솔한 사람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얕은 생각을 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틀렸다.
술에 취해 본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술에 취한 척하며 그 틈을 타 면밀하게 계산을 하는 것이다.
“저는 말이죠, 과장님. 오늘은 취했으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데요”라며 과장되게 서두를 늘어놓은 끝에 신입 3년차 평사원 야마다가 꺼내는 말은 대부분 아첨이다.
“저는 과장님을 정말 존경해요. 정말로요. 이렇게 훌륭한 분은 뵌 적이 없어요.”
25세인 야마다 겐타는 ‘취해서 나도 모르게 본심을 말해버린’ 척하며 눈에 빤히 보이는 아첨을 늘어놓는다. 아아, 정말 싫다.
자, 그러면 문장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술의 힘을 빌려 문장에 대한 장애물을 낮춘 작가는 스스로를 속인다.
“취해서 쓴 문장이니까.”
“술의 힘을 빌려 쓴 편지니까.”
이런 변명을 하는 인간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전 단계부터 이미 자신을 속인다.
어떻게 속이느냐 하면, 자신의 문장력에 환상을 품는 것이다.
자신이 주옥같은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취하지 않았을 때 쓴 문장을 자신이 맨정신으로 읽는 사태에 적응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쓴 문장이 ‘훌륭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읽어보면 대번에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술로 도망가서는 안 된다.
문장력이 비평안을 따라가지 못하는 단계는 누구에게라도 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문장력은 평생 비평안을 쫓아갈 수 없다. 그 괴로움 속에서 자신이 쓴 문장의 부족함을 견뎌내고 조금씩 퇴고하여 서투른 문장을 갈고닦아야만 문장의 기교를 늘려갈 수 있다.
오, 정신론인가?
내가 근성 예찬, 정신론을 펼치다니.
술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이상하게 윤리적인 인간이 된다. 너그러이 봐주었으면 한다. 한 번이라도 알코올중독에 빠졌던 사람은 스스로에게 단속반처럼 귀찮은 설교를 계속 늘어놓아야만 금주를 이어나갈 수 있다. 이 얼마나 괴로운 상황인가!
마지막으로 술에 의존해 문장을 쓰던 인간이 술 없이 문장을 쓰려고 할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 방법을 전수한다.
“그냥 마음 편하게 써라.”
서툴거나 부족하더라도, 진부하거나 평범할지라도 자신 안에서 탄생한 문장을 미워하지 말지어다.
그것이 현재 실력인 이상 거기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반대로 말하면 그곳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술로 눈을 가려버리는 짓은 더더욱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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