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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서커스》 해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9. 27. 18:23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다쓰루입니다.
지금 이 ‘해설’을 읽고 계신다는 건, 마지막까지 다 읽고서, 긴 한숨을 내쉴 차례라는 의미겠지요. 어떠셨나요, 재밌으셨죠? (내가 쓴 책은 아니지만요.) 보급판으로 700쪽이 넘어가는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도중에 읽는 걸 멈추실 수 없었지요?
나는 처음에 양장본으로 읽고, 이번에 ‘해설’을 의뢰받았으므로 교정쇄로 읽었으니, 통독으로 따지자면 두 번째입니다. 세세한 것들은 잊어버린 데가 많은데, 특히 ‘에필로그’ 부분은 완전히 기억에서 떨어져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얘기가 끝나는지를 모르는 상태로 조마조마해하며 교정쇄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통쾌한 이야기지요? 문학작품을 평가할 때의 형용사로 ‘통쾌’란 말을 쓰는 게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2차 대전 이래 일본이 떠안고 있는 트라우마인 ‘미국의 속국 지위’라는 굴욕적인 상황을 뿌리치고서, 국가 주권의 회복, 즉 ‘자유 일본’을 창건하고자 싸우는 테러리스트들의 모험담이니만큼 통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 속국론’이란 말은 정치적 담론에 따라 놓고 보면 매우 익숙합니다만, 이걸 소설로 쓴다는 건 굉장히 이례적일 겁니다.
1986년에 무라카미 류가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이라는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다국적 산업이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고, 일본이 미국의 속국으로서 그 수탈의 대상이 되며, 실정의 결과 중소기업이 차례차례 도산하고, 거리거리에 실업자가 넘치며, 사회 불안이 한계까지 다다른 근미래 일본. 이에 스즈하라 토우지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가 등장하게 되고, 정부라든가 자위대 내부에 동지들을 규합, 결국 쿠데타를 일으킨 뒤 미국의 굴레로부터 탈피해, 미・소(소련이 있던 시절입니다)에 맞설 만한 군사 강국이 되는... 그러한 엄청난 스케일을 지닌 이야기였습니다. 나약해진 일본인을 뜯어고친 뒤 일본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한번 철저히 파멸시킬 필요가 있다’는 스즈하라의 과격한 아이디어(요즘 말로 가속주의가 되겠지요)에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갈채를 보내고, 독재자의 지배를 간청하게 되는... 참으로 독성 강한 이야기였습니다.
내가 가진 (미덥지 않은) 문학사적 지식에 따르면, 『빵과 서커스』는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 이래 40년 만에 등장한 ‘일본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그거 나도 쓴 적 있는데?’ 하시는 분이 있다면 사과드립니다.)
초지, 구야 그리고 마리아가 일으킨 정치적 파란의 목적은 ‘미국의 속국 신분으로부터의 탈피’, 그리고 ‘국가 주권의 탈환’입니다.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 주인공이 내걸었던 정치적 목표와 거의 비슷합니다. 이는 지난 40여 년간, 일본인은 끝내 단 한 번도 쿠데타라든지 대정부 테러를 일으키지 않았으며, 미국으로부터의 자립 역시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0년 동안의 무위.
정치적 행동의 결여라는 ‘무위’ 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마땅한 미래를 구상하는 노력 그 자체를 게을리해 온 상상력의 ‘무위’.
이렇듯 두 종류의 무위가 일본을 좀먹고 있습니다. 시마다 씨는 아마 그런 문제의식으로 이 소설을 썼으리라 나는 봅니다.
정치적 이상을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던 데에는 변명이 통합니다. ‘혁명이 무르익을 역사적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버리면 됩니다. 하지만,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 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일은 감방 안에 있더라도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손발이 묶여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을 일본인은 줄곧 게을리해 왔습니다. 태만한 것뿐만이 아니고, 스스로 금지해 왔던 겁니다.
이 작품에는 일본인의 그런 오랜 세월에 걸친 집단적 무위에 대한 작가의 울분이 복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마다 씨는(리더 프렌들리한 사람이니만큼) 그 분노를 독자에게 대놓고 성토하지는 않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야기에 급격한 기복을 주고, 이야기의 흐름을 가속함으로써, 울화를 서사의 추력으로 변환한 셈입니다. 이런 롤러코스터 같은 속도가 독자를 납치하여, 단숨에 700쪽을 읽게 해버립니다. 무시무시한 수법입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상상력 발휘’란 말을 방금 전에 했습니다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공상적인 이야기가 현실 변성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이야기가 압도적 다수의 대중에 의해 엔터테인먼트로써 향유되는 경우뿐입니다. to the happy few마냥 한정 조건이 붙은 이야기(프랑스 소설 『적과 흑』 말미에 스탕달이 써넣은 문구입니다)는 문학을 살찌울 수는 있겠습니다만, 현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시마다 씨는 현실을 바꾸고 싶어 합니다(될 수 있으면 혁명을 하려고 합니다. 아마도요).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상상력의 폭주가, 엔터테인먼트로서, 깊은 유열로서, 광범한 독자에게 경험될 필요가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거사는 성공했다고 나는 평가하는 바입니다.
이 작품이 촉발하는 무언가에 따라,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극적으로 바뀐 일본’을 넘치는 상상력으로 구사하며 마음속에 그려주기만을 나는 강렬히 염원드릴 따름입니다.
‘일본 속국론’이라 함은 정치 담론으로써 여러 차례 거론되었던 언설입니다(시라이 사토시 교수도 그렇고, 나도 이에 대해 책을 몇 권 썼습니다). 그런데 정치학자는 현상 분석과 그 현상에 이르게 된 문맥에 대해서는 언급해도, 쿠데타의 수순에 대해서까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학 하는 이에게는 그것이 허용됩니다. 그리고, 현재 일본인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질서를 문란시킬 만한 정도의 상상력을 폭주시키는 것입니다. 시마다 씨는 그럴 작정으로 이 소설을 썼으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소설 속에서도, 중국 첩보 기관에 속한 ‘프락치’인 뮤트는 심문을 받으면서, 일미중 관계를 참으로 간략한 어휘로 다음과 같이 단언합니다.
“일본이 그토록 원하던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해줬으니, 미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채, 리조트에 온 기분으로 일본에 주둔하고, 그 비용을 일본에 전가하며, 더 나아가 부담금 인상을 요구할 뿐이겠지요. (…) 유사시에는 일본을 지키겠다고 애매하게 립서비스만 할 뿐, 미국은 어느 하나 구체적인 전략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항모도 출동시키고, 전투기 하나 날려주겠습니까? 일본이 마구잡이로 도입한 F-35를 출격시켜 주겠습니까? 미군이 ‘고우’ 신호를 주지 않으면, 그 비싼 전투기도 아깝게 묵혀둘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또 모르지요, 그게 실은 불량품이라는 게 들통날까 봐 출격 명령을 영원히 내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대전제는, 미국이 결코 중국과의 전쟁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군사적 영향력이 일거에 추락하여, 하와이마저 빼앗길지도 모르는데, 그 손실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기 때문입니다.” (223-224쪽)
미중전쟁에 대한 뮤트의 이러한 전망에 나는 전면적으로 동의합니다. 미국에는 미중전쟁을 벌일 낌새가 안 보입니다. 전면전은 곧 핵전쟁입니다. 핵전쟁을 하면 미중 공멸이 확실한 이상,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중강도의 재래병기를 이용한 전투까지입니다.
인민해방군은 중월전쟁 이래, 45년 동안 실전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해상 전투 경험은 아예 없습니다. 장비는 고수준이지만, 실전 능력은 불명입니다.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리스크 높은 도박에 미국은 응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만에 중국이 군사적 침공을 하더라도 미국이 관여하지 않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습니다. 실제로 ‘대만 때문에 미국이 리스크를 감수할 수는 없다’고 공언하는 정치가, 정치학자는 미국 국내에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미중 전쟁의 귀추가 어떻게 급변할지 모릅니다. 적잖이 구문에 속합니다만, 2017년에 랜드연구소는 ‘타당한 추정이 뒷받침되었다는 가정하에, 미군이 수행할 전투가 수반되는 다음 전쟁에서 미국은 패배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같은 해, 조지프 던포드 합참의장도 ‘우리가 현재의 궤도를 수정하지 않으면, 양적・질적인 경쟁 우위를 잃을 것’이라는 경고를 발했습니다. 결국 통상병기로 하는 전쟁에서는 미국이 중국에 패할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대로 가다가는 심각해질 거’라는 군인의 경고는 다소 평가절하해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위험성을 과대평가해 국방예산 증대를 요구하는 게 군인의 주 업무 가운데 일부니까요.
그럼에도,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라고 싱크탱크나 군 장성이 나서서 명언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라고 보면 맞을 겁니다. 미국은 ‘미중전쟁을 될 수 있는 한 안 하려고’ 합니다. 이건 확실합니다.
그럼에도, 중국이 대만에 침공했을 때 이를 방치한다면, 서태평양에서 미국이 가지던 군사적 우위와 외교적 신뢰를 동시에 잃게 됩니다. 일본과 한국은, 미국이 대만을 내팽개친다면, 미국과 자신들 사이의 군사 동맹도 ‘사실은 사문일지 모른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지 모릅니다. 일한의 신뢰를 잃음으로써 입을 리스크와, 중국과의 전면전에 끼어듦에 따라 입게 될 리스크 중 어느 쪽이 ‘치명적’일지 백악관은 저울질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신의의 문제가 아니라, 손익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주판알을 튕긴 끝에, 미국은 미중전쟁의 회피를 우선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대만에 위기가 닥치면, 일본 자위대에게 채근하기를 ‘존립 위기 사태니까, 우선 일본인이 나가서 싸워라’ 명령해 두고, 주일 미군 주력 부대는 당분간 괌까지 후퇴할 작정입니다(‘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는 미군 주력이 다치지 않는 게 긴요하다’고 말하면서요).
미국 입장에서 필요한 건 시간 벌기입니다. 그리고, AI 군비 확장을 통해 중국에 대한 우위를 점하려는 것입니다. 중국은 앞으로 인구 감소와 경제성장 둔화를 맞게 되는데, 정점을 찍은 국력이 가까운 미래에 하락세로 접어듭니다. 게다가 중국 공산당은 ‘해외로부터 침략당할 리스크’보다도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날 리스크’를 한층 엄히 보고 있습니다(바로 그런 이유로 철저한 국민 감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언젠가 문화대혁명이나 천안문 사건과 같은 괴란(壞亂)적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베이징은 그게 안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으며, 백악관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미국에 필요한 건 시간입니다. 일본이나 한국을 내팽개치고서라도 시간을 벌 수 있다면, 미국 입장에서는 수지맞는 장사입니다.
중국이 대만이나 한국, 일본에 군사 침공할 경우, 상당한 저항이 예측됩니다. (특히 대만과 한국 같은 경우는 그렇겠지요. 일본에서는 이렇다 할 저항이 없을 거라는 게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속셈에 가깝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인이란 으레 ‘외국 군대에 유린당해도 특단의 심리적 저항을 느끼지 않는 국민’이라는 게 국제 사회의 은근한 시각일 터이니).
그럼에도 일본을 실효 지배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쳐 수십만 규모의 군대와 문관을 상주시켜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될 수 있으면 부담하고 싶지 않은 비용입니다. 그런 탓에, 중국은 일본을 세력권에 둘 경우, 직접 통치하는 것보다는, 화이질서 이래 장구한 역사를 지닌 소위 ‘변방의 속주에는 고도의 자치를 허용’하겠다는 손때묻은 논리인 ‘일국양제’를 꺼내올 것입니다. ‘왕년의 홍콩’ 정도의 자치적 자유를 허용한다면, 일본의 지배층은 손쉽게 ‘중국 바라기 태세’로 전환해 연명을 꾀합니다. 일본의 ‘피지배층’은 오랫동안 ‘상대도 안 될 대상과 싸우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친해져라’는 식으로만 학습해 왔으니까, 레지스탕스를 조직하는 등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하겠지요. ‘미국에 지배당하나 중국에 지배당하나, 국가 주권이 없다는 점은 똑같으니까 말이야. 하하하’ 이렇게 쓴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은 이 사태가 그저 지나가기만을 바랄 겁니다.
미국한테 버림받고, 중국 변방의 자치주가 된 일본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요? ‘미국 증오’의 일념에 불타 중국을 배경으로 ‘반미의 첨병’이 될까요? 그런 일은 안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야, 너무나 어리석고 겁이 많은 까닭에 미국한테 ‘이용만 당했던’ 게 진실이니까요. 일본인이 아무리 ‘우리는 피해자 신세다. 일미방위조약 하나로 이렇게까지 일본을 수탈해 갔으면서, 정작 중요할 때는 떠나버리다니…. 미국은 80년 동안 뜯어간 《보호비》를 내놓으라’며 읍소한다 하더라도, 일본을 동정하여, 같이 손잡고 미국 비판에 가담해 줄 친절한 나라는 국제 사회에 아마 한 나라도 없을 겁니다. 유엔 총회 결의(미국은 일본에 사과하고, 돈을 돌려주라는 결의)도 아마 이행되지 않을 겁니다(그 얘긴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라야죠…. 란 말만 들을 뿐이니까).
아, 저도 모르게 무심코 나의 망상이 폭주한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래도, 나는 이런 유형의 상상력 행사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역사에서 얻는 교훈’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에, 우리는 백이면 백 ‘일어난 일’을 소재로 ‘왜 그것이 일어났는가?’를 묻습니다. 역사학자는 그런 거 하라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작업과 똑같은 정도로 ‘일어났음 직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는 어찌하여 안 일어난 것인가’에 대해서 사량하는(헤아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테면,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군 연합함대는 주력부대를 잃은지라, 전쟁을 지속할 만한 전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정전협정을 시작하는 것’이 합리적인 방안이었습니다. 실제로, 요시다 시게루나 마키노 신겐, 고노에 후미마로는 화평 공작을 당시 물밑에서 개시했었습니다. 협상이 실현되었더라면, B-29 폭격기 공습도, 남태평양 전선에서의 사상자나 보급 참상, 그리고 원자 폭탄 투하도 없었습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는 3,000명입니다. 진주만 공격에서 발생한 일본군 사망자는 60명 정도였습니다. 이 시점에서 강화조약이 있었더라면, 해외 영토를 상실하고 거액의 배상금 의무를 짊어졌으되, 3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일 없이 끝났을 겁니다. 1920년대에 일본에서 태어난 남자 7명 중 한 명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이 진정으로 어떤 나라인지, 일본 국민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싶다면, 이렇듯 ‘일어났음직 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구사하는 것 역시 중요한 작업이라는 겁니다.
필립 로스는 『미국을 노린 음모』란 소설을 통해 1936년 대통령 선거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아닌, 공화당의 찰스 린드버그 대령이 대통령직에 오른 ‘평행 세계’를 그려냈습니다. 친독파인 린드버그 대통령은 독일,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는 동시에, 미국이 세계 대전에 관여(커밋)하지 않겠다는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실행합니다. 이렇듯 ‘전쟁에 코밋*하지 않았던 미국’이 어떤 식의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사회가 되는지에 대해, 필립 로스는 작가적 상상력을 구사해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그렇게 됐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던 미국’은 요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질이랄지 실상을 현실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 밝혀내는 것 이상으로 선연히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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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it; 저지르다, 벌이다, 맡다, 발을 들이다, 나서다 등 – 옮긴이)
‘일어났을지도 몰랐는데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상상하는 것과, ‘일어날 리가 없다고 지금 당장 여겨지는 일은 어떠한 조건이 갖춰질 시 향후에 일어나는가?’를 상상하는 것, 이는 역사학이 아닌, 문학의 소임입니다. 역사가는 ‘일어난 일이 왜 일어났는가?’를 확정하는 것이 본업입니다. 그래서, ‘일어나도 좋았을 법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 자체가 없습니다. 이런 작업은 문학이 떠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빵과 서커스』에는 ‘현재 시점에서 실현되지 않은 상상 속 일본’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교적 찌그러짐으로 표현된 그림을 통해, 우리는 현실 속 일본의 실상을 지금 눈앞에 있는 것 이상으로 총총히 보게 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많은 독자 손에 이 소설이 읽히길 빕니다.
(2024-08-27 15:48)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한 걸음 뒤의 세상』 『되살아나는 마르크스』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IMAGINE!】
이것은 도쿄라는 지루한 거리에서 나고 자라 평범하게 망가지고 만 여자(젤다 피츠제럴드처럼?)의
사랑과 자본주의를 둘러싼 모험과 일상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사랑은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안락하고 따뜻한 것이 아니에요. 그건 분명합니다.
사랑은 힘겹고 매섭고 두려운 잔혹한 괴물입니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죠.
오늘날 도쿄에 사는 모두는 평범하게 행복을 느끼며 사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저는 행복이 두렵지 않아요.
왜냐하면 저는 타고난 도쿄걸이거든요.
게이코는 현역으로 활발하게
일하는 회사원으로 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엔 관심이 없고, 저 역시 동생의 생활상이나 취향 등에 전혀 흥미가
없지만 우리는 사이가 좋습니다. 게이코는 노느라 얼마나 지쳤든 간에 매니큐어만큼은 빠짐없이 챙깁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손톱은 언제 봐도 참 아름답더라고요.
1989년 9월
오카자키 교코
✳
저는 1980년대에 도쿄에 있었습니다. 그 무렵 제겐 도쿄가 세계에서 가장 싫은 도시였습니다. 도쿄라는 도시가 싫어서 거기에 살고 있는 친구 녀석들도 정말 싫어했습니다. 저도 물론 거기에 있긴 했지만요.
1985년은 거품경제가 한창일 때였는데요, 다들 기억하고 계신지요? 그해에 고등학교 반창회가 있었습니다. 동급생들은 당시 35세였습니다. 반창회에 20명 정도 모여서 호화스러운 레스토랑에서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모두 돈이 많았거든요. 한참을 주식 이야기라든지 부동산 이야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밖에 화제가 없는 겁니다. (…)
지금도 가끔씩 "거품경제 시대가 그립다"라고 말하는 바보가 있는데, 그렇게 인간들이 보기 흉했던 시대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배움엔 끝이 없다> 우치다 타츠루 저, 175~182쪽)'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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