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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민 사회를 재건하기 위하여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8. 30. 12:03
『월간일본』 8월호에 심층 인터뷰가 게재되었다. ‘야만으로의 퇴행이 시작되고 있다’라는 제목을 달고 나갔다. 내가 여기서 진정 말하고자 했던 바는 ‘근대 시민 사회를 꼭 재건해야만 한다’였다.
ー 현재, 세상은 역사적인 대전환을 맞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우치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근대의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근대 시민 사회의 기본 이념은 ‘공공’입니다. 그런 ‘공공’이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홉스, 로크, 루소 등이 제창한 근대 시민 사회론에 따르면, 자고로 인간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일삼았습니다. 이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에서는, 가장 강한 개체가 모든 권력과 재화를 독점합니다. 그러나 이런 체제는, 정작 ‘최강의 개체’에게마저 자기 이익의 확보를 약속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밤에는 잠을 자고, 목욕할 때는 발가벗으며, 때로는 병에 걸리고, 언젠가 노쇠합니다. 조금만 약점을 보이면 그냥 그대로 ‘끝장’인 그런 삶의 방식의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도 못 배겨냅니다. 그보다는 사적 권력의 일부, 사적 재산의 일부를 ‘공공’에 맡기어 ‘공권력’, ‘공공재’를 마련해 놓으면, 사적 권력과 재산을 모두 결과적으로는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정말로 이기적인 사고와 행위를 한다면, 기필코 사회계약을 맺고서, ‘공공’을 마련할 터이다… 하는 발상이 근대 시민 사회론입니다.
물론,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비슷한 역사적 사실은 실제로 확인된 바 없습니다. 사회계약설은 18세기 사람들이 손수 만들어낸 픽션입니다. 하지만, 시민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이 픽션이 필요했습니다. 역사적 조건이 요청한 서사라면, 허구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것에는 현실을 뒤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얘기를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애당초 국가는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자연 상태 속에서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을 거듭 이어왔습니다. 이는 어느 정도까지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많은 나라들은 자국 제일주의와 결별하게 되고, 자기 나라의 국익을 부분적으로 제한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국제기관에 주권과 국부의 일부를 공탁하고, 세계적인 스케일의 ‘공공’을 일구어내어,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르테가(Ortega y Gasset, 1883∼1955)가 ‘문명이란 무엇보다 공동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이다’ 라고 『대중의 반란』에 쓴 바와 같이, 인류 스스로 문명의 진화와 발맞추어 ‘공생’을 조금씩 실현해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근대적인 국제 질서라는 이념 그 자체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면 되고, 국가는 자기 국익만을 추구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한 ‘자기 제일주의’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며, 각 나라들은 저마다 안팎으로 ‘공공’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법의 지배’가 끝나고, 세계는 다시금 ‘힘의 지배’, 약육강식이라는 ‘자연 상태’로 역행하려는 것처럼 제게는 비칩니다.
ー 어째서 개인과 국가는 ‘공공’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려고 하게 된 걸까요?
우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국민국가가 기초적인 정치단위로서 기능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베스트팔렌 체제’에서는, 국민국가가 기본적인 정치단위였습니다. ‘국민국가’(Nation State)란 인종・언어・종교・생활 문화를 공유하는 동질성 높은 사람들끼리 ‘국민’(Nation)이 되고, 이러한 국민이 정치 단위로서의 ‘국가’(State)를 형성하는 식의 국가 모델입니다. 이러한 국민국가를 기초적 정치 단위로 하는 ‘국제 사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렇게 하기로 하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유엔에 가입해 있는 정치적인 193개의 단위만으로 국제사회가 형성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비 국민국가 행위자의 영향력이 현재 어떤 국면에선 국민국가보다도 성장해 있습니다. 자본, 상품, 정보, 사람이 빠른 속도로 그리고 엄청난 양으로 경계를 초월해 왔다 갔다 하는 건 이제 일상적입니다.
새로이 등장한 비 국민국가 활동자의 종류 중 하나로 테러 조직을 들 수 있습니다. 알카에다나 ISIS와 같은 테러 조직한테는 애초에 지켜야만 하는 ‘국민’이나 ‘국가’, ‘국경’ 같은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른 활동자는 다국적기업입니다. 글로벌 대기업은 특정한 국가에 귀속하지 않고서, 주주들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경제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왕년의 국민국가 내부 기업은, 조국의 고용을 증대시키고, 국세를 모아다가 조국의 국고를 살찌우는 것을 (어쨌든 말만으로는) 기업 활동의 동기로 삼아왔습니다. 그러나 현대적 글로벌 기업에 그런 요소는 없습니다. 가장 제조 비용이 싼 나라에서 제조하고, 가장 인건비가 저렴한 나라의 노동력을 고용하며, 가장 세율이 낮은 나라에 본사를 두는 식으로, 어떠한 국민국가의 국익에도 일절 공헌하지 않음으로써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이 두 종류의 비국가적 활동자가 국제사회의 대표적인 주자로 발돋움함에 따라, ‘공공’이라는 개념이 급격히 공동화하고 있다고 봐도 좋겠지요.
ー 그렇게 우리는 비국가적 활동자의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치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문제가 ‘테크자이언트’(거대 IT 기업)입니다. Google, Apple, Meta(옛 Facebook), Amazon, Microsoft, Tesla, OpenAI 등 테크자이언트는 오늘날, 민주정 그리고 근대 시민 사회에 현실적인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칼 로즈의 저서 『Woke Capitalism』, 조엘 코트킨 『The Coming of Neo-Feudalism』 등은, 그 위험성에 필사적으로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테크자이언트는 이미 일개 기업만으로 중규모국의 국가 예산에 필적하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미 GAFA의 순자산 총계는 프랑스 GDP에 필적하는 액수에 달합니다. 아마존닷컴의 창업자 제프 베저스의 개인 자산은 2,080억 불(약 278조 원),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의 개인 자산은 1,870억 불(약 250조 원)입니다. 얼마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8명의 개인 자산이, 하위 36억 명의 소득과 맞먹는다는 놀랄 만한 통계도 나왔습니다. 전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이 초부유층에 배타적으로 축적되는 경향은 거듭거듭 가속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테크자이언트가 보유한 첨단 기술은 작금의 세계 질서를 뿌리째 뒤흔들 리스크를 야기하게 되었습니다. AI를 탑재한 무기는 전쟁의 형태를 확 바꾸어 놓을지도 모릅니다. 딥페이크와 국민 감시 시스템은 민주정을 파괴할지도 모릅니다. 기술혁신은 대규모 고용 상실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릅니다. 어떤 경우든지, 기술의 진화가 가져다주는 이점보다도 리스크가 더 큽니다. 이점보다 리스크가 큰 기술은 그 특성상 고삐를 쥐기가 어렵습니다.
기술의 진화는 자연 과정이라서 아무도 멈출 수 없다고 이제까지는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져다줄 리스크가 이렇게까지 커졌으니만큼, 이제는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꺼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서구에서는 ‘테크노 프루덴셜리즘’(techno-prudentialism/기술적 신중주의)이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인류에게 큰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있는 기술의 마구잡이식 진보를 멈춰세워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간 과학기술의 발전을 두 손 들고 환영해 온 인류가 역사상 최초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술의 진화를 일시 정지시키고, 조금 냉정해지는 게 좋겠다’라는 얘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이는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기술을 제한적으로 이용한다손 치더라도, 정작 첨단 기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어떠한 리스크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개발한 기업의 기술자뿐입니다. 그러므로, 기술의 진보를 억지하기 위해 만약 국제회의를 개최할 경우에는, 테크자이언트의 구성원을 배석시켜 다른 나라의 정부 관계자와 동등한 지위로 대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테크자이언트의 협력 없이는 현행 국제 질서를 유지할 수 없으니만큼, 이제 기술 기업 CEO는 일국의 대통령이나 총리에 상당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테크자이언트가 민주정의 위험 요소인 이유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초부유층이 민주 국가의 사무를 대행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빌 게이츠,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 등의 억만장자들은 2010년부터 대규모 사회공헌 캠페인을 시작했는데, 기후변화・교육・빈곤 문제 등에 관련된 프로젝트로 수천억 달러(수백 조 원)을 공출했습니다. 현시점에서 초부유층은 말하자면 전통적인 부호와는 달리 깨친 바가 있는 것이며, 가난이나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동정적인, ‘꽤 괜찮은 사람’들 같아 보입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민주정의 경우, 자신들의 대표자를 회의에 내보내고 거기서 법률을 만들어, 정부에 그것을 실행시키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테크자이언트들을 ‘영주’로 섬기는 ‘새로운 봉건제’ 시대가 오면, ‘영주’님께 직접 청원하는 것이지요. ‘내 그리하도록 하지’라는 윤허와 함께 자신들의 주장이 눈 깜짝할 새에 이루어집니다. 민주주의에서 으레 있는 번쇄(煩瑣)한 절차를 거치는 것보다는, 테크자이언트로부터 우러나온 ‘부의 국물’을 얻어먹는 게 훨씬 빠릅니다. 그렇게 되면 ‘민주제 같은 건 별로 필요 없다’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민주정식 과정으로 우회하기보다는, ‘영주’님의 무릎 위에 꼭 붙어서 “주인님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칼 로즈)를 바라보는 게 현실적입니다. 민주정의 주권자로서 처신하기보다, 무력한 평민으로서 ‘마음씨 고운 영주님’께 자비를 빌면 금세 행복해진다, 그러한 사고방식이 확산될 시 민주정은 그날로 끝납니다. 코트킨이 비판한 ‘새로운 봉건제’는, 그러한 사태를 이르는 셈입니다.
ー 테러 조직은 국제질서를 괴란(壞亂)하는 한편, 테크자이언트는 국제질서에 간여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우치다 ‘자국 제일주의’라는 모습의 항진 작용이 나타난 까닭은, 이들 비국가적 활동자의 위협에 직면한 국민국가 차원에서의 방위 반응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자국 제일주의자는 국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 부담을 거부하며, 국익의 최대화만을 추구합니다. 중국, 러시아, 북한, 이란 같은 권위주의 국가가 그러하며, 인도, 인도네시아, 터키 등도 그에 준합니다. 유럽에서도 헝가리, 폴란드, 네덜란드 등은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선거를 통해 극우적 자국 제일주의 정당이 정권을 잡고 있습니다. 미국도 트럼프가 재선된다면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걸고서, 국제 질서 유지를 위한 비용 부담을 대부분 거부하게 될 공산이 큽니다.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권위주의 국가의 독재자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주주의 국가도 강권적인 리더를 옹립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국제질서를 위해 규칙을 지키며 자제하는데도, 상대방이 규칙을 어기고 이기적으로 나오게 되면, 승부가 안 된다. 따라서 우리도 규칙을 무시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펴게 되는데 여기에 저항하기는 어렵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오랫동안 미국은 초 패권국가로서 국제질서를 주도해 왔습니다. 다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하지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국력을 소모하고, 경제력도 힘이 빠져, 결국 국제 질서 유지를 위한 비용을 배겨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바마가 ‘세계의 경찰관’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것에 이어, 트럼프가 ‘미국 제일주의’를 내걸고 나왔습니다. 이는 동일한 맥락에서 나온 사건들입니다.
확실히 쇠퇴하고 있다고는 하나, 미국은 어엿한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이자 경제 대국입니다. 그러니만큼, ‘국제 질서 같은 거 신경 쓸까 보냐. 미국만 좋으면 그만이다’라고 뻗대면 중국, 러시아, 이란 등에 기가 눌릴 가능성은 일단 없습니다. 그럴 의지만 있다면, 미국은 ‘세계 최강의 불량 국가’가 된다는 말입니다. 세계 각국이 으르렁거리는 야만적인 ‘자연 상태’로 회귀한다 하더라도, 그 황량한 ‘매드맥스’적 디스토피아에서마저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나라는 미국이겠지요.
ー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는 결국 국익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게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도출된 교훈이었습니다. 가령 이대로 제3차 세계대전에 돌입해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전원 패자가 됩니다.
우치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자국 제일주의’는 언젠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꼴이 됩니다. ‘나만 좋으면 장땡’이라는 문장에 들어갈 주어는 얼마든지 조그마해질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지금 미국에서는 텍사스나 캘리포니아 할 것 없이 독립 운동이 활발합니다. 가령 텍사스 주가 독립하면 인구 2,900만 명, GDP 세계 9위의 ‘대국’이 탄생합니다. 캘리포니아 주가 독립하게 되면 인구 3,700만 명, GDP는 영국과 프랑스를 상회하는 세계 5위의 ‘대국’이 됩니다.
현재 미국에서 그야말로 창궐하고 있는 ‘정체성 정치’라는 게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딘가에 부합한다 싶은 속성끼리 단단히 뭉쳐, 이젠 다른 집단과 제로섬적인 자원 쟁탈전을 벌이자는 겁니다. ‘너는 어느 부족(tribe)에 속하는 인간이냐?’라는 질문부터 먼저 하고 듭니다. 다른 부족에 속한 이하고는 공생하지 않습니다. 협동도 하지 않으며, 물론 공공재 역시 공유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보다 동질성 높은 부족으로 축소해 가는’ 경향이 미국에서는 두드러집니다. 조지아주 풀턴 군 샌디스프링스에서는, 부유층들이 반기를 들고 나오기를, 자기네들이 납부한 세금이 다른 지역의 빈민에게 분배되는 것이 싫다 하여, ‘부자들만의 자치체’를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세수의 대부분을 잃은 풀턴 군은 도서관 등의 공공시설을 유지하지 못했고, 끝내는 가로등조차 없앴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이러한 움직임이 우후죽순 일어나고 있습니다.
텍사스주나 캘리포니아주의 독립운동도 발상은 이와 동일합니다. 자신과 동질적인 자들끼리 부족을 형성해 놓고 그 이익만을 최우선시합니다. 다시 말해, ‘순화와 축소’입니다. 공공을 일단 해체하기 시작하면, 이제 더는 손쓸 수 없습니다. ‘순도가 높은 게 절대 선이다’라는 룰을 채용하게 되면 말입니다, 그 부족 내부에서조차 높은 순도가 요망됩니다. 이에 한층 더 작은 동질 집단으로 분열되는 일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산산조각납니다. 공공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을 거부하게 되면, 어떠한 공동체라도 언젠가는 해체됩니다. 오르테가는 바로 이런 사태를 ‘야만’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전에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는 ‘여섯 공화국, 다섯 민족, 네 언어, 세 종교, 두 문자’를 가진 다민족국가였습니다. 그러나 동질성 높은 집단으로 기초적 정치 단위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굴복한 나머지 ‘여섯 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ー 현재 일어나고 있는 ‘근대의 위기’는 결국 근대화의 소산이며, 이러한 근대는 한계에 부딪혀 자멸하려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근대의 초극’이 아니겠습니까?
우치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근대의 한계’라기보다는 ‘전근대로의 퇴행’입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근대의 부흥’이자 ‘근대로의 회귀’입니다. 어쩌면, ‘근대 시민 사회’는 역사상 아직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환상인지도 모릅니다. 정녕 그렇다면, ‘근대 시민 사회의 실현’이야말로 우리가 이룩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 되겠습니다.
(옮긴이: 인터뷰어가 ‘교토 학파’ 내지는 덴신류 쪽으로 논의를 유도하려는 데에, 우치다 선생이 독자적 시간관에 기반해 말씀하신 대목. 이러한 일본적 미학을 다룬 과거 담론에 관해, 전후에 히로마쓰 와타루 등이 비판적 견지로 <근대초극론>에서 총괄한 바 있다.)
ー 미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세계화의 영향으로 국민국가라는 궤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치다 일본은 ‘연고주의’(nepotism)와 ‘부족 민주주의’(tribe democracy)로 말미암아 끝내 ‘삼류 독재 국가’로 전락해 가고 있습니다. 자민당의 세습 의원들은 끈끈한 연고를 바탕으로 부족을 형성하여, 국민으로부터 공탁받은 공권력으로 사리사욕을 충당하며, 공금을 사물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런 무법을 저지를 수 있는 건, 기득권층 구성원들끼리 남몰래 밀거니 끌거니 서로 협력하는, 상호부조 네트워크를 갖춰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가난한 국민은 ‘각자도생’(원문은 ‘자기 책임’ - 옮긴이)을 강요당하며, 분단과 고립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매우 기묘한 상황입니다. 풍족한 사람들은 튼실하니 상호부조 구조체를 짜놓고, 그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가난한 대중은 살인적인 경쟁에 내몰려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서로의 앞길을 가로막는 한편, 공공재의 분배 과정에서 배제된 채, 정치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못 박혀 있습니다.
간과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만, 오늘날 일본에는 두 가지의 집단 원리가 버젓이 병존하고 있습니다. 기득권은 착실히 상호부조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구성원의 정치적・경제적 리스크를 커버하고 있습니다. 그 덕에 법을 어겨도 처벌받지 않고, 검은돈을 호주머니에 슬쩍해도 세금을 안 내며, 아무리 실정을 거듭해도 미디어는 애써 외면하는… 그런 방식으로 특권을 향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난하고 무력한 대중들한테는 “승자가 독식할지니, 패배자는 각자도생이니까 길거리를 헤매다 객사하는 수밖에”라는 식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선택적으로 고지되고 있습니다.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권력과 재화를 독점하는 기득권들은 정작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따위는 안 믿습니다. 이건 ‘가난한 사람들이 외려 좋다고 달려드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제가 방귀 좀 뀐다는 이들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니까 그러대요. 그들은 일단 직업 선택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자기 주장을 펼칠 자유 등을 깡그리 단념합니다. 그리고서는 자기가 속한 부족에 충성을 서약하고, 부족으로부터 명령받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그 대가로 권력과 부를 분배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손바닥만 한 공공’을 무척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부르주아는 연대하고 있으나, 프롤레타리아는 고립되어 있습니다. 옛날부터 계속 그래왔습니다. 이걸 보다 못한 맑스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연대하라”고 열띠게 외치게 된 것입니다. 부르주아가 국경을 초월해 연대하고 있는 마당에, 정작 프롤레타리아가 고립되어 있으면 말짱 도루묵이니 당연하지요.
현재 일본과 같이 국민의 대다수가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놓여있으면, 확실히 통치 비용은 싸게 먹힙니다. 지배층이 공공재를 사물화해도, 공권력을 사사로이 이용해도,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기득권’ 입장에서는 참으로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회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전혀 태어나지 않습니다. 점점 국력이 감퇴할 뿐입니다. 당금의 지배 체제가 지속된다면,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끝없이 낮아지겠지요. 그러나, 기득권은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그들은 조국 따윈 상관없는 겁니다. 일본에는 아직 얼마든지 ‘팔아먹을 것’이 있습니다. 땅도 팔고, 관광 자원도 팔고, 수자원도 팔며, 사회적 인프라를 파는 겁니다. 외국계 자본에 팔아먹고 사재로 둔갑시키면, 보세요, 일본이 가라앉는 때가 오면, 자기들만 하와이가 됐든 싱가폴이 됐든 캐나다가 됐든 도망을 가서, 일본을 팔아먹은 대가로 3대 정도는 거뜬히 우아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일본이라는 구조적으로 취약한 ‘배’에서 탈출할 준비만은 확실히 해두고 있습니다. 위험이 닥치기 직전까지 ‘침몰선’에 발을 딛고서, 꺼내갈 수 있는 데까지 보물을 쓸어 담으며, 자신들 전용 ‘구명보트’로 탈출할 속셈입니다.
지금 ‘일본’이라는 정치 단위 그 자체의 토대가 무너지려 하고 있습니다. 배외주의 이데올로기라는 항진은 바로 이 ‘나라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 자아낸 셈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주자나 외국인이 일본을 망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일본을 몸소 망가뜨리고 있는 건 일본인입니다. ‘나만 좋으면 장땡’ 운운하는 사람들이 일본의 공공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중국 위협론이나 이민 망국론 같은 배외주의적 언설이 앞으로도 무럭무럭 배태될 터이겠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용납하기 어려운 건, 공권력을 사적으로 이용하고 공공재를 사유해 온 장본인 자민당이 국민을 보고서 ‘애국심이 부족하다’ 따위 지껄이는 작태입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참말로 애국심을 함양하고 싶거들랑, ‘전 세계 어디가 되었든 거기선 안 살 테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나라에서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전 국민이 할 정도로 마음이 놓이는 나라를 만들면 될 일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국민은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 할걸요? 소비세도 제꺽 낼 거고, 일장기에 대한 경례 때도 감히 앉아 있진 않을 겁니다. 애국심은 프로파간다로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요즘 유심히 살펴보면, 일말의 승산은 있는 겁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닙니다. 규슈의 ‘호 보크’라는 홈리스 지원 단체로 이름난 오쿠다 도모시 목사, 오사카에서 ‘D×P’라고 10대 청소년을 지원하는 이마이 노리아키 씨 등, 전국 각지에서 분별 있는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공공’을 출범하였으며, 대가를 바라지 않고서 제 손으로 상호지원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전근대로의 퇴행’ ‘공공으로부터의 철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이제 자명합니다. ‘근대 시민 사회’의 이념으로 돌아가서, ‘공공’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단, 이건 기득권층이 하는 것과 같은 종족주의적 상호지원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우리가 내어놓은 공공물을 탐식하고자 저들의 수탈 네트워크를 만들어놓았습니다. 우리가 하려는 건 공공을 창출하기 위한 증여 네트워크입니다. 그 누구로부터도 빼앗지 않습니다. 국제 사회에서는 국제 질서에 따르면서, 일본 국내에서는 상호지원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ー 우치다 님은 일본이 나아갈 길로써 ‘일본형 코뮌주의’를 주창하고 계십니다.
우치다 일본의 전통적인 통치 이상은 ‘군민공치’입니다. 군주를 중심으로 나라가 뭉치고, 국민이 ‘사직’적 공동체 가운데 저마다 자기 자리를 잡는 평온한 모습을 고대로부터 우리 나라 사람은 이상으로 여겨왔습니다. 그 이상향의 실현을 막았던 축들이 일본 역사에는 면면이 존재합니다. 임금과 백성 사이에 꽈리를 틀고 앉아서는 권력과 재화를 독차지하는 중간적 권력 기구의 존재, 그것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일종의 ‘서사’입니다. 소가 씨, 후지와라 씨, 다이라 씨, 미나모토 씨, 호조 씨, 아시카가 씨, 도쿠가와 씨에 이르기까지…. 가히 ‘십상시’라 할 만한 이들 중간적 권력 기구를 폐하고서 ‘군민공치’의 이상으로 회귀하려는 시도인데, 이러한 스토리 패턴은 다이카개신 적부터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았습니다. 일본인의 정치적 에너지는 그러한 ‘군민공치를 바탕으로 한 코뮌주의’로밖에는 고양되지 않습니다.
19세기 이래로 줄 이은 메이지 유신, 다이쇼 유신, 쇼와 유신 등…. 이러한 정치 혁명에는 반드시 ‘유신’ 자가 붙습니다. 「시경」에서 따온 이 유서 깊은 관념은 변함없습니다. 그리하여, 유신의 기치 아래 정치혁명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뒤이어 중간 권력을 찬탈하는 말로 또한 비슷합니다. 폭력적으로 권력과 재화를 수탈했던 자는, 이제 그 소행으로 말미암아 ‘단죄받아야 할 자’라는 역사적 대열에 합류하고 맙니다. 어찌하면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고서 일본적 코뮌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그것이 우리 일본인의 사상적 과제입니다.
권력자를 타도하고 그들의 기득권을 빼앗는 전철을 답습하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가진 것을 몸소 ‘내어놓자’는 얘기입니다. 그러한 증여물을 일종의 자원으로 삼은 새로운 공공의 실현, 그것이 제가 힘써 제창하는 ‘일본형 코뮌주의’입니다.
ー 피를 흘리지 않고서 나라를 바꿀 길이 과연 있겠습니까.
우치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증여하여도 줄지 않는 것’을 공공의 기초로 삼을 수는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권력이나 재화는 빼앗기면 잃습니다. 제로섬 게임입니다. 따라서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문화자본이라는 자본은 ‘증여하여도 줄지 않는 것’입니다. 지식이나 교양, 재주는 내주어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원래는 지배계층이 권력과 문화자본을 독점하고 나면, 으레 문화자본의 격차란 걸 계층 분화의 ‘구별 척도’로 써먹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현대 일본에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작금의 사회지도층은 갑질할 권리와 금융자본에는 진심으로 몰두하지만, 문화자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일본 권력자 가운데 고전시가를 읊는다든가, 하이쿠를 쓴다든가, 노가쿠나 기다유를 연마한다든가, 무도나 슈겐종을 수행한다든가, 참선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문화란 쓸모 없다’라고 현대 일본 사회지도층은 합의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피에르 부르디외의 개념. 대중문화나 서양고전보다는, 자국 옛 귀족들의 전유물이라는 맥락 - 옮긴이)
따라서 빈한한 대중이 문화자본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지성적・감성적으로 성숙해 나가는 것을 그들은 ‘영역 침범’이라고까지 여기지는 않습니다.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까요. 일본에서 행세깨나 한다는 사람들은 자기네들 자신이 유아나 다름없으므로, 시민적 성숙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성숙한다는 게 어떤 뜻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이 시민적으로 성숙을 이룬다 함은, 그만큼 강력한 ‘현실 변성력’을 갖추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장기적 ‘타임 스팬’ 속에서 고찰하고, 미래를 적절히 예측할 수 있다면, 끝내는 현실을 바꿀 수 있게 마련입니다.
물질이나 권력과는 다르게, 문화자본은 아무리 증여해도 줄지 않습니다. 제가 주재하는 가이후칸 도장에서 직접 아이키도를 가르치고 있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얼마나 가르친다 한들, 제가 가지고 있는 문화자본은 달리 줄어드는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르침으로써 제 기량도 향상되고, 지견 또한 깊어집니다. 저희 문인이 독립해서 새로이 도장을 열고는 하는데, 그래도 제 도장에 오는 사람이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아이키도를 수련하는 사람이 늘어날 뿐입니다. 우리는 이렇다 할 제로섬 게임을 하는 게 아닙니다. 수련을 통해 그저 삶의 지혜와 힘이 자라기를 바라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을 따름입니다.
저는 때때로 자택을 공공성 있는 도량(道場; 도 닦는 곳 - 옮긴이)으로써 내어주고 있습니다. 그 형태는 무엇이 되든 상관없습니다. 도서관이 되었든, 영적인 기도 공간이 되었든, 연극 무대가 되었든, 콘서트홀이 되었든 뭐든 좋아요, 저마다 재량껏 문화자본을 증여하고 이를 밑천 삼아 ‘공공’을 우뚝 세워, 문화자본이 멀리멀리,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의 손을 탈 수 있게 만드는 거점으로 두는 것. 저는 이것이 앞으로 흥기할 ‘일본적 코뮌주의’라는 이름의 고군분투가 되리라고 봅니다. 우원한 방법일지 모르겠으나, ‘지성과 교양을 갖춘 어른의 사람 수를 늘리는 것’이 사회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걸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1세기 일본인에게 주어진 과제는 태곳적 기원을 가진 천황제와, 근대적 의제로서의 의회민주주의라는 ‘빙탄불상용’한 두 체제를 매끄럽게 가다듬어 공생시켜야만 한다는, 그야말로 난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양립하는 것이 현대판 ‘군민공치’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난문에 마주하기 위해서는 일본 국민의 시민적 성숙이 불가결합니다. ‘어른이 되는 것이야말로 혁명에 이르는 길’이라는 제 논리는 퍼뜩 이해하기 어렵겠으나, ‘복잡한 세상 간단히 살자’라는 성화에 엉거주춤 굴복한 결과가 오늘날 일본의 지적 참상인 이상, 간단히 살자는 건 어림없는 얘기입니다.
(6월 30일 대담 및 구성 杉原悠人)
(2024-07-21 09:16)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한 걸음 뒤의 세상』 『되살아나는 마르크스』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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