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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의 신체론』 들어가는 말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9. 10. 19:43
들어가며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다쓰루입니다.
‘길거리의 신체론’이라는 제목, 뭔가 기시감이 드시겠지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시면, 처음 접하신 걸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부디 조심하셔야 해요. 이 책은 2011년에 마키노출판에서 나온 나루세 마사하루 선생님과 내 대담집인 『신체로 생각하다』(身体で考える)를 복각한 거니까요.
멋모르고 ‘오~ 두 분의 새로운 대담 책이 나왔구나’ 착각하여 덜컥 구입하는 바람에, ‘아, 이거 제목만 바뀌었지 내용은 그대로 아니냐?’라며 하늘을 우러러 이를 가는 일이 없게끔, 여기서 큰 목소리로 주의 말씀 드리는 바입니다.
그래도, 완전히 똑같은 책은 아닙니다. 복각이니 겸사겸사 ‘보너스 트랙’을 얹어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나루세 선생님과 함께 도쿄 고탄다에 위치한 요가 도장에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내용이 마지막에 ‘사은품’으로 딸려 나갑니다.
나루세 선생님은 아주 정정하셨고, 변함없이 표표(飄飄)하게, 웃는 얼굴로, 놀랄 만한 이야기를 여러모로 들려주셨습니다. 진정으로 살피기 어려운 분입니다.
나는 한참 전부터 나루세 선생님을 몇 번 뵈었습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말씀을 들었음에도, 이런 선생님의 스케일이 어느 정도인지는 지금도 여전히 가늠할 수 없습니다. ‘대강 이쯤 되는 사람이겠거니’, 역시 훌륭하신 분이라는 심정으로 맺어 보려 하지만, 이런 내 속단과는 전혀 다른 경지에 계신 걸 보게 되는 겁니다. 이러다 보니 어느 날부터는 나루세 선생님을 생각할 적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항상 초대면인 셈 치고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게, 나루세 선생님 당신은 ‘나 같은 것’하고 대담하는 게 재미난다, 하는 것입니다. 나루세 선생님과 나를 놓고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도 참 부끄럽습니다만, 나는 진짜로 ‘평범한 사람’이니까요.
아시는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나는 원래 허약아였습니다. 그래서 신체 능력이 굉장히 낮습니다. 달리기도 느리고, 물론 ‘철봉 360도 회전’*도 못 합니다.
그랬음에도 스물다섯 되던 무렵에 어떻게 결심이 섰는지 다다 히로시 선생님의 문하에 들어, 아이키도 수련을 시작한 지 올해로 49년이 됩니다. 마치 소가 밭일 배우는 것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수련을 이어왔습니다. 몸소 도장을 열어 문인을 길렀습니다. ‘어지간히 하셨구먼’이란 말을 들을 법도 합니다. 그럼에도, 무도가로서 ‘범용’하다는 말 이외에 달리 형용할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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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鈍根に鞭打つ: “위플래시”. 우치다 선생이 지어낸 일본어 - 옮긴이)
근데, 세상만사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습니다. 그건 자기가 획득해 온 기술이나 지식을 놓고서, 일일이 하나하나 대충은 언어화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어째서 우리 〇〇이는 이게 안 되는 걸까?’라는 식으로 보통 사람들을 거듭 놀라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을 때까지’ 1밀리씩 기어가듯 나아갔던 과정을 상당히 정밀하게 말할 수 있고, 또한 프로그램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서툰 사람을 가르치는 것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내게 무도가로서 타고난 자질이 있다면, 그건 ‘제멋대로’라는 점입니다. 내 신체는 굉장히 ‘제멋대로’입니다. 애시당초 약해놓으니, 무리를 해도 말을 안 듣습니다. 아파도 견디도록 신체에 부하를 오랫동안 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 아픔이나 불쾌함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지를 열심히 모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수련하다 보니, 어느샌가 ‘아픔이나 불쾌함’의 조짐이 접근하기만 해도 ‘싫다 하는 느낌’이 드는 나머지, 그걸 회피하는 행동을 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스스로 느끼기에 ‘좋지 않은 것’이 접근해 오면, ‘알람’이 화통을 삶아 먹은 듯 명동(鳴動)하는지라, 참기 힘듭니다. 따라서, 노이즈가 조금이라도 가라앉을 만한 장소로 이동하여, 노이즈가 덜 나도록 신체를 놀립니다.
이러한 무도적 이치[術理]를 ‘굳센 무도가’는 아마 별로 개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겁니다. ‘약함의 쓸모’란 것도 있다는 말입니다.
‘재능이 없고, 약한 무도가’. 이게 내가 서는 위치입니다. 그래도 이게, 결코 나쁜 일은 아닙니다. 왜냐구요. 그런 시점에 서야만 볼 수 있는 게 있고, 말할 수 있는 게 있기 마련이거든요.
나루세 선생님이 나를 대화 상대로 고르신 이유는, 아마 그 덕일 겁니다. 재능 없는 인간이 자신의 신체를 어떤 식으로 탄생시키는지, 약한 인간이 어떻게 부하를 경감하는지와 같은 신체 사실에 관한 ‘자료 제공자’[informant]로 삼을 제 확실히 나는 ‘남들이 따라잡기 쉽지 않은 존재’니까요.
이상으로 서문을 끝마칩니다. 모쪼록 다음 쪽부터는 ‘천재와 범인의 대화’라는 시점에 따라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읽으면 상당히 진진한 맛이 우러나는 책일 겁니다.
(2024-08-11 10:21)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한 걸음 뒤의 세상』 『되살아나는 마르크스』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유도의 창시자 가노 지고로는 늙어서 죽음이 가까워지자 제자들을 불러 모아, 자신이 죽으면 흰 띠를 둘러 묻어달라고 했다. 세계 최고의 유도 고수가 죽음에 임박해서 초심자의 상징을 요구했다니 그 얼마나 겸손한가.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가노의 이야기는 겸손이라기보다는 현실이다.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전환의 순간에는 누구나 흰 띠다. 그리고 죽음이 우리를 초심자로 만드는 것이라면 인생 역시도 마찬가지다. 달인의 비밀스러운 거울에는 최고 성취의 순간에도 새로 입문한 학생의 모습이 있게 마련이다. 즉 그는 지식을 추구하며 바보처럼 열심히 하는 것이다.
달인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그 길이 아무리 멀어도 가노의 요구를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물음, 항상 새로운 도전으로 간직한다.
당신은 기꺼이 흰 띠를 맬 수 있겠는가? (조지 레너드)
△철봉 체조 참고 자료.
너무 빨리 깨달은 사람의 경우, 그 깨달음이 다른 사람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에 비해 고생스럽게 오랜 시간을 들여서 ‘왜 이렇게 깨닫기 힘들까. 왜 나만 안 될까’ 라고 고민하면서 깨달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와이 하야오)
* 철봉 360도 회전: 거꾸로 오르기. 원문 さかあがり. 뒤집힘을 강조해 しりあがり라고 하기도.
미사고 지즈루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이는 전형적인 ‘학교에서 하라는 대로 시키는 체육’으로, “신체의 깊은 층위에 깃들어 있는 감응력 및 포텐셜”과는 대극에 있는 신체 운용법이라고 합니다.
‘영혼?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라는 말에, 오쿠다 도모시 목사님은 곤란해 하신다는 것 같습니다. 종교는 해답이 아닌, 물음이니까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말이 길어졌습니다만 한국 초등학교로 치면, 줄넘기 2단 뛰기-속칭 쌩쌩이- 겠지요. 물론, 저도 쌩쌩이 같은 것 苦手(젬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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