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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인 제이콥스, 메티스 그리고 보보스
    인용 2024. 2. 15. 20:47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확대하여 <미국 대도시들의 성장과 소멸>이라는 책에 실었다.

     

    그 책 가운데를 잠시 펼쳐 보자. 그녀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공동체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그리니치 빌리지 허드슨가의 작은 구역에서 펼쳐지는 삶을 묘사한 부분은 책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많이 회자되는 대목이다. 식품점 주인인 조 코나치아 씨, 양복점 주인인 쿠차지언 씨, 철물점 주인인 골드스타인 씨를 비롯한 가게 주인들 덕분에 그 거리에서 사는 삶은 그토록 특별해졌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상점 주인들의 나라'라고 불렀을 때 드디어 부르주아들을 깔아뭉개는 궁극의 표현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보헤미안의 저술들에서 소상공인들은 편협한 부르주아 가치를 대변했다. 하지만 제이콥스는 상인들이 추잡하고 물질주의적이라고 경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그들의 왁자지껄함, 깔끔함, 평범한 이웃 같은 그들의 일상 활동에 경탄한다. 한 사람은 이웃 주민들을 위해 열쇠를 보관해 준다. 또 한 사람은 동네의 온갖 가십을 전달해 준다. 그들 모두가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바로 이러한 부르주아적인 미덕을 높게 평가한다.

     

    저자는 감미롭고 서정적인 문장을 써서 동네의 잡화점 주인, 세탁소 주인, 그리고 지나가는 행인들을 발레하는 무용수들로 묘사한다. 그들의 움직임은 고품격 예술에 버금간다. 과일 가게 주인이 나타나 손을 흔들고, 열쇠점 주인이 담배 가게 주인을 찾아가 담소를 나눈다. 아이들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지나간다. 동네 사람들이 피자가게 주위에 모여든다. "발레는 멈추는 법이 없다"라고 제이콥스는 쓰고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분위기는 평화로우며, 한가롭기까지 하다." 평범한 가게에서, 평범한 일이 일어나는, 평범한 거리의 일상생활을 그토록 아름답게 그린 문장은 그 외에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실 글의 분위기야말로 제이콥스의 성공 비결 중 하나이다. 그녀의 글은 동시대 잭 케루악이나 시어도어 로작 같은 후기 보헤미안 작가들의 글과는 달리 거만하거나 직설적이지도 않다. 그녀는 낭만주의의 본질인 이상주의와 극단주의를 배격한다. 그녀는 지식인이 현실에서 벗어나 관념의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래서 그녀의 글은 편안하고 대화하는 듯하다. 그녀는 일상생활의 아주 세세한 곳까지 꼼꼼하게 관찰한다(저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현실을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시의 도시 계획이 제이콥스를 화나게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적들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론화하거나 반항하지 않고 대신 그저 고요히 앉아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는 데서부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부르주아의 인식론은 주로 이성에 호소했다. 보헤미안의 인식론은 상상력에 호소한다. 제이콥스는 우리에게 감각과 지각 모두를 갖추고 세상을 보도록 촉구한다. 주변을 인식하는 데에는 가게 주인의 현실적인 지식도 필요하고, 소설가나 화가에게 기대하는 감성적인 지각 능력도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건, 제이콥스는 부르주아가 애호하는 질서와 보헤미안이 애호하는 해방을 조화시킨다는 점이다. 도시의 거리가 언뜻 혼란스러워 보여도 실은 꽤 질서 정연하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도시가 잘 돌아간다는 가정하에 무질서해 보이는 오래된 도시의 저변에는 거리의 안전과 도시의 자유를 유지하는 놀라운 질서가 숨겨져 있다. 질서는 복합적이다. 요체는 복잡하게 연결된 길거리이며, 그 길을 따라 눈길과 눈길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동과 변화로 이루어진 질서는 예술이 아닌 삶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도시의 예술이라 멋들어지게 부르며 춤에 비유할 수 있다." 이 구절은 핵심이 되는 조화, 자유와 안전, 질서와 변화, 삶과 예술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녀가 말하는 바람직한 삶은 변화와 다양성, 그리고 복잡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항상 내적인 조화가 뒷받침되고 있다.

     

    생태계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여러 유형의 많은 선수들이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다양성이 필요하다. '다양성'이란 말은 우리 시대의 핵심 단어들 가운데 하나이면서 제이콥스가 쓴 <미국 대도시들의 성장과 소멸>에서 특히 중추적인 단어다. 책의 후반부는 '도시 다양성의 조건'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그녀는 복잡성에 감탄하면서 무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작은 틈새에서 여러 활동들이 분화되고 번성한다고 말했다. 이런 장소는 누가 위에서 정해 주는 게 아니라 밑에서부터 개개인에게 맞는 작은 필요들이 모여 탄생하곤 한다.

     

    (...) 제인 제이콥스를 따르는 우리들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겸손하고 계획가들과 관료들에 대해서는 좀 더 비판적이다. 우리는 이제 제이콥스 같은 사람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차분하게 앉아 세심하게 관찰하는 겸손한 사람들을 좀 더 신뢰한다. (...) 현대 경영 기법은 제인 제이콥스의 인식론이 남긴 발자취를 착실하게 따르고 있다. 오늘날 경영 기법은, 배우고 생각하는 최상의 길은 테크노크라트처럼 문제를 협소한 전문성으로 잘게 쪼개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흐름과 리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는 발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런 기법은 직원들이 과거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도록 하고 상상력을 발휘하며 직관을 사용해 직면한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다. 시장은 기계가 아니라 피드백의 메커니즘과 상호 작용, 그리고 변화로 가득한 유기체로 인식되고 있다.

     

     

    [메티스(Metis)]

     

    다시 말하면, 기업들은 고대에 알려진 메티스라는 능력을 직원들이 개발하게끔 한다. 고대 그리스 용어인 메티스는 예일대 인류학자 제임스 C. 스콧이 다시금 부활시켰다. 프랑스 사람들이 말하는 메티스는 전문 지식(savoir faire)이다. 우리는 실천적인 지식이나 수완, 혹은 육감적인 능력을 메티스로 말한다. 메티스가 있는 사람의 모델로 오디세우스를 뽑을 수 있다. 그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즉흥적으로 순발력을 발휘하며 모험을 이어 나갔다. 스콧 자신은 메티스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 및 인간 환경에 대응하는 여러 가지 실천 기술과 후천적 지능'이라고 정의 내린다.

     

    메티스는 가르치거나 암기해서 가질 수 없고, 오직 전수받거나 습득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자 마이클 오크쇼트의 이론에 따르면 학교에서 문법을 배울 수는 있지만 말하는 능력은 경험하면서 서서히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메티스 역시 무작위로 습득하면서 점진적으로 전체적인 그림을 형성할 뿐이다. 메티스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이래라저래라 강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화를 하고 나란히 일을 한다. 메티스를 얻으려면 이해심으로 보아야 하고 정밀하게 관찰해서 사물의 실제적인 현상을 체화해야 한다. 그리고 과정, 즉 사물의 상호 관계에 대한 감각을 길러야 한다. 메티스를 습득하는 사람은 이론이나 상상이 아닌 행동으로 배워야 한다.

     

    예를 들어 주방 보조도 요리의 규칙을 배울 수는 있지만, 언제 규칙을 적용하고 언제 규칙을 바꾸거나 포기해야 하는지는 주방장만이 제대로 알 수 있다. 대학원생이 교육학 책을 읽을 수는 있지만 메티스가 풍부한 교사만이 학급을 지도하고 인도할 수 있다. 메티스는 사용될 때만 비로소 존재한다. 그래서 메티스를 갖고 있는 사람은 종종 자신의 재능이나 방식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메티스를 지닌 사람은 흐름을 안다. 어떤 것들이 어울리고 어떤 것들이 어울릴 수 없는지,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질 때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하는지 안다.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를 구분할 수 있다. 이사야 벌린은 고전적인 에세이 <고슴도치와 여우>를 쓰면서 메티스를 알게 됐다. "과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우연히 처한 상황에서 우여곡절을 인지하는 특별한 감각이다. 영구적인 조건이나 바꿀 수 없는, 혹은 완전하게 설명하거나 계산할 수 없는 요인에 집착하지 않고 살아가는 능력이다." 이와 같은 지식은 지속적으로 대응하고,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생긴다. 보편적인 해법을 거부하는 메티스 예찬자들은 다양한 접근법을 환영한다. 제인 제이콥스와 다음 세대 보보들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이 단어를 차용하여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

     

    (데이비드 브룩스, <보보스>, 이가을 옮김, 183~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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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우리는 순수한 이성, 지나친 추상화, 그리고 과도한 일반화에 대해 더 회의적이다. 우리는 제인 제이콥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에 열심이지만 그녀는 하이데거를 잘 몰랐을 수도 있고 파르티잔 리뷰 논객들의 지적 곡예에는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주위의 일상적인 삶을 잘 알고 있었다. 앞서 제3장에서 메티스는 이론보다 행동과 느낌을 통해 얻는 실용적인 지혜라고 설명했다. 우리 보보들은 추상적인 이론보다 메티스를 더 높이 평가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세상에 참여하고 남들처럼 일상생활에서 배우고 얻고 올라가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은 사람들 대다수가 직면하는 압박감을 경험하고 야망과 미덕 간의 갈등을 경험할 때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상업적인 문화에서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은 삶의 주요 활동에서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하지만 우리의 지식인은 (그녀가 스스로의 동기와 타협에 관해 솔직하다면) 국가와 세상의 상태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녀의 선언은 절벽 꼭대기에서 벼락을 던지는 망명 지식인의 선언처럼 전면적이거나 웅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계곡을 지나는 길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그녀의 설명은 더 진실하고 그녀의 아이디어는 더 유용할 것이다.

     

    다시 1950년대 책들을 살펴보자. 1955년부터 1965년까지의 시기는 논픽션의 전성기였다. 이 책에서 이미 그 시절의 많은 저작들을 인용했는데,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같은 가장 영향력 있는 책들은 빼 두었다. 니부어와 아렌트 같은 사람들에 대한 그 모든 존경심과는 별개로, 당시 가장 뛰어나고 영향력이 컸던 책들의 상당수는 그 당시에는 지식인으로 생각되지도 않던 사람들이 썼던 것이다. 바로 제인 제이콥스, 윌리엄 와이트, 베티 프리단, 레이첼 카슨, 그리고 딕비 발첼 등이다. 이러한 작가들과 언론인들은 에드워드 실스가 규정한 형태의 지식인보다 오늘날의 세속적인 전문가 내지 논평가들과 공통점이 더 많았다. 스스로를 사회에서 격리시켜 고급 문화만을 지향하고 보헤미안 특유의 소외감 속에 살았던 사람들보다 오늘날 우리에게 더 좋은 모델이다.

     

    (같은 책, 279~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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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인 다원주의자는 우주가 하나의 자연적 질서, 하나의 신성한 계획으로 귀결될 수 없다고 믿는다. 때문에, 구원으로 가는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행복, 도덕성, 덕목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누구도 가장 심오한 질문이나 믿음에 대한 완전한 답에 도달할 수는 없다. 일종의 항해다. 우리는 영원히 불완전하며, 선택하고, 탐구하고, 창조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적절한 영적 자세는 새로운 선택과 새로운 길에 열린 마음을 갖고, 새로운 의견과 세계관에도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제인 제이콥스는 <미국 대도시들의 성장과 소멸>이라는 책의 서두를 영적 다양성을 강조하는 올리버 웬델 홈스의 문구로 시작하고 있다. "문명의 으뜸가는 가치는 그것이 삶의 방식을 더 복합적으로 만든다는 데 있다." 홈스는 그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더 복합적이고 치열한 지적 노력은 더 충만하고 풍요로운 삶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많은 삶을 의미한다. 삶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삶이란 살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당신이 삶을 충분히 살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전과 다른 종류의 가치이다. 그러니까 다양성, 복합성, 탐구, 자기탐구 등이다.

     

    이것은 낙관적인 신조다. 끝없이 자기확장을 하면 영적 충만을 얻을 수 있다. 나아가 자유는 질서로 이어진다. 우리가 모두에게 자신의 삶을 가장 잘 살 수 있도록 최대한의 자유를 주면, 그들의 노력이 상호 작용을 하면서 섞여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조화를 이룬다(제인 제이콥스가 도시의 '거리'에 대해 말한 내용을 기억하라). 이때 필요한 것은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열린 마음과 관용적인 자세로 자신들의 길을 찾아가면서, 남들에게 자신들의 길을 강요하려 애쓰지 않는 것뿐이다.

     

    <마음의 습관>은 중요한 책이다. 교육받은 계층이 영적 개인주의의 더욱 극단적인 형태에서 후퇴하려는 초기 징표이기 때문이다. 벨라와 그의 동료들은 개인주의에 기반한 영적 자유를 극단적으로 추구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지적했다. 이러한 비판은 보보 계층에서 하나의 통념이 되었다. 첫째, 삶을 구성하는 모든 외적 유대에서 분리시킬 수 있는 '진정한 자아'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른다. 점점 더 깊이 자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공허함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둘째, 개인주의자들이 삶에 구조를 제공하고 삶의 중대한 변화인 출생, 결혼, 죽음 같은 것에 의미를 주는 의식과 의무 패턴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영적인 자유의 궁극적인 문제는 그것이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로티가 지적했듯이, 자유는 끝없이 넓어진다. 자유는 늘 자신의 선택을 열어 둔다는 뜻이다. 절대로 진리에 안주할 수 없고, 절대로 도달할 수 없음을, 절대로 쉴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영적 절정에 달한 경험을 축적하는 것은 욕심쟁이들이 돈을 축적하는 것과 같다. 더 많이 얻을수록 더 많이 얻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다. 끝없는 선택의 삶은 끝없는 동경의 삶이다. 늘 다음번의 새것을 바라는 꺼지지 않는 욕망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같은 책, 345~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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