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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스 레터
    인용 2023. 10. 31. 23:29

    "그러면 요컨대 우리는 이 고서점에서 만난 거네요?"
    이번에는 내가 난처해 할 차례였다. "그런 얘기가 되겠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멋지네요." 와카나는 그렇게 말하더니 고서를 책장에 도로 꽂았다.
    며칠 뒤, 우리는 대학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이래로 몇 번인가 점심 식사를 함께하고, 그때마다 강의는 제쳐두고 책이나 음악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보다 책을 많이 읽는 같은 세대 사람하고 만난 것은 처음이에요." 와카나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냥 읽고 있는 것뿐이야. 나는 그 독서에서 아무 것도 얻고 있지 않아."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 책 본래의 가치를 끌어내기 위한 접시가, 나에게는 없어. 내가 하는 독서는 냄비에서 작은 접시로 스프를 콸콸 쏟아붓는 것하고 똑같아. 들어가자마자 흘러넘쳐서 전혀 도움이 안 되지."
    "그런 걸까요?" 와카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령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금방 잊어버린 듯 보여도 한 번 읽은 것은 반드시 뇌의 어딘가에 남아있어서 본인도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 도움이 되는 법이라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그럴지도 모르지. 다만 적어도 나는ー나 자신이 그렇기 때문에 하는 말이지만ー젊을 때에 책에 파묻히는 것은 건전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해. 독서 따윈, 그 밖에 할 일이 없는 사람이 하는 짓이야.
    "쿠스노키 씨, 하는 일이 없나요?"
    "아르바이트 외에는 딱히 없네."
    내가 대답하자 와카나는 꾸밈없는 미소를 짓더니, "나중에 늘려드릴게요." 라고 말하며 내 어깨를 쿡 찔렀다. 그리고는 내 휴대전화를 멋대로 집어 들더니 자신의 메일 주소와 번호를 등록했다.

    ✳︎

    열 명만 있어도 답답하게 느껴질 만한 자그마한 역이었다. 에니시는 한쪽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키도 얼굴도 평균보다 살짝 나은 정도였지만, 특히 두드러진 것이 표정이었다. 어떤 종류의 자신감으로 뒷받침된 여유 있는 표정. 요즘 들어 나는, 그것을 형성하고 있는 요인을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인 것이다.
    에니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열차가 아니라 그곳에서 내릴 누군가임은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누군가'의 모습을 미야기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적당히 시간을 보다가 "슬슬 가지 않겠어?"라고 작은 소리로 말하자, 미야기는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봐두고 싶어요. 저 사람이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2량 편성의 열차가 도착했다. 내리는 손님의 대부분은 고교생이었지만 한 사람, 인상이 좋은 스무 살 중반의 여성이 있었다. 그녀가 에니시가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것은 그들이 친밀한 미소를 주고받기 전부터 예상되던 일이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는 여성이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남의 웃는 얼굴이란 아무리 자연스럽게 웃더라도 어쩐지 일부러 지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법인데, 에니시의 연인인 그 여성의 웃는 얼굴에는 그런 부자연스러움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계속 순수하게 웃음을 지어온 성과인지도 모른다.
    말을 나누지 않고 자연스럽게 합류하는 모습으로 봐서는 갓 사귄 사이는 아닌 듯 보였지만, 서로의 얼굴을 본 순간의 기뻐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은 마치 처음으로 약속 장소에서 만나는 커플 같았다. 단 몇 초의 일이었지만, 그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 미아키 스가루, <3일간의 행복>

    (여러번 말씀드립니다만, 제 번역에서 뭔가 다른 점을 느끼신다면 그것은 바로 선배 번역가 현정수 선생의 영향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제게는 어느날 갑자기 번역을 딱 시작하자고 마음 먹게 된 드라마틱한 사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와 동시에, 이렇게 이렇게 하면 저렇고 저런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미리 생각해둔 것도 아닙니다.)

     


    (...) 그의 꿈은 목사가 되고, 새로운 종교를 선포하고, 영혼을 앙양하고, 사랑과 예배에 새로운 형식을 부여하고, 종교의 새로운 상징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역량과 사명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도 열심히 이미 존재했던 일에 몰두했고 너무나도 정확히 과거의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이집트나 인도, 미트라스나 아브락사스에 대해 너무나도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사랑은 이 세상이 이미 보아 온 형상에 결부된 것이었는데도 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원했던 것은 전혀 새롭고 색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신선한 대지에서 솟아오르는 것이지 박물관의 수집품이나 도서관 같은 데서 창조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역할은 나에게 말했듯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데 있었다. 그들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을, 새로운 신을 제시하는 일은 그의 사명이 아니었다.

    "(...) 만약 내가 아주 단순하게 아무런 요구나 주장도 없이 운명에 자신을 맡긴다면 더 위대하고 더 정당하겠지요.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다오. 그것이야말로 내가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인 거요. 그것은 정말 어렵소. 그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 존재하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오. 나는 때때로 그것을 꿈꿨지만 한 번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소. (...)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리스도가 그러했던 거요. 흔연히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교자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영웅이 아니었고 자유롭지 못했었소. 그들 역시 자기들에게 친밀하고 다정한 무언가를 원했소. 그들에겐 모범이 있었고, 그들에겐 이상이 있었던 거요. 그저 운명만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모범도 이상도 없는 거니까. 그들에겐 아무런 사랑도, 아무런 위안거리도 있을 수 없소. 그런데도 사람은 이런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오. 나나 당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고독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서로 피차라는 것을 갖고 있소. 우리들은 뭔가 남다른 것, 반항하는 것, 특이한 것을 추구하는 데서 남모르는 만족을 느끼긴 하지만 만약 온전하게 그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것까지도 단념해야 하오. 또 우리는 혁명가도 이상가도 순교자도 되려고 해서는 안 되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요."
    그렇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꿈꿀 수는 있었으며, 미리 느끼고 예감할 수는 있는 일이었다. 몇 번인가 아주 조용한 시간에 나는 그것을 조금쯤은 느껴 본 적이 있었다. 그런 때에 나는 내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았고, 강하게 부릅뜬 내 운명의 모습의 두 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 눈은 예지에 충만해 있기도, 미친 듯한 열기에 충혈되어 있기도, 애정에 빛나거나 깊은 악의에 차 있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것이건 다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것 하나라도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고, 무엇 하나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단지 자기 자신만을 원하고 자신의 운명만을 원할 수 있을 뿐이었다. 피스토리우스는 지도자로서 내가 이 길을 제법 멀리까지 나갈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가령, 세상에 어떤 파국이 일어나 지하 셸터에 내려가야만 할 때에 챙겨갈 단 몇 권의 책, 저희의 목표는 그런 글들을 준비해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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