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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수에 관하여 (장강명 <열광금지, 에바로드>)
    인용 2023. 10. 22. 14:52

    (...) 처음 며칠은 시차와 상가의 환한 조명, 귀가 멍해질 정도의 소음, 말을 붙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서슬 퍼런 밤시장 '누님들'의 기운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정도로 힘들었다.

    그러나 새벽시장의 정신 나간 활기와 도매시장 이모, 누나 들의 거칠고 단순한 성정에 마음이 끌렸던 것도 사실이다. 복잡한 생각이나 고민에 빠질 것 없이 온몸을 써서 일하고, 내키는 대로 말하고, 배고플 때 먹고, 웃고, 떠들고, 다시 일하다 보면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되었다. 상가 건물을 나설 때 맡는 새벽 공기 냄새는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런 위선도 가식도 없었다.

    (...)

    새로 맡은 임무는 사장이 일본이나 홍콩,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옷을 다시 지방 상인이나 사입자들에게 파는 것이었다. 신용카드 없이 모든 거래를 현금으로 하고, 규모가 큰 외상 거래도 더러 있었기에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꼼꼼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건을 잘 추천하고 지방 상인들을 꾈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자기들이 고른 옷만 사 가게 하지 않고, "이것도 가져가세요. 이거 잘 팔려요. 이것도, 이것도" 하고 말해서 다른 옷을 쳐다보게 만들어야 했다. (...)

    동대문 새벽시장 상인들의 느슨한 공동체는 그때까지 종현이 경험했던 세상 중 가장 가족에 가까운 집단이었다. 밥값은 언제나 다른 누님이나 이모가 내주었고, 여자들은 종현에게 백화점에서 사 온 빵이나 우유 같은 것을 선물로 주었다. 조금 젊은 여자들은 종현과 담배를 같이 피우며 짓궂은 농담을 던지거나 자기 다리를 주물러달라고 했다.

    (...) 동대문의 왈가닥들은 우아하지는 않았지만 강하고 멋진 여성들이었다. 뱃사람들처럼. 그녀들은 숨기는 일 없이 밑바닥을 당당하게 드러냈다. 종현이 은밀히 관찰할 여지 따위는 없었다. 종현의 유치한 '인간 조종술'에 호락호락 넘어갈 사람들도 아니었다.

    주말에 누나들과 어울려 영화를 보러 가거나 등산을 하기도 했다. 밤시장을 마치고 다 같이 찜질방에 간 날도 있었다. "아유, 종현이 저거 언제 보쌈해서 집에 데려가야 할 텐데"라며 웃는 누님도 있었다.

    진짜 선수는 그런 농담을 던지는 대신 조용히 있다가 따로 종현을 불러냈다. 어느 날 "다들 모여서 술 마시고 있으니 너도 와"라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나갔는데, 술집에는 옆집에서 가게를 하던 누나 한 명밖에 없었다.

     

    ✳︎

     

    그는 <Q>가 관객 모독이라고까지 여기지는 않았다. (...) 의사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고통, 그리고 사람이 그런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에 대해 그들이 말하고 싶어 했다고 느꼈다. 그러나 제작자들은 그 작업에 성공하지 못했다. (...) 한 번 성역을 넘고 나니 더 깊은 깨달음이 연속해서 찾아왔다. '내가 왜 에반게리온에 빠졌던가'에 대해 종현은 다시 생각했다. (...) 에반게리온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결함투성이이고, 많은 이야기가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만화였다. 종현 자신의 청춘과 비슷했다. (...)

    아시노 호수 앞에서 했던 생각들이 관람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기대를 버리고 보니 몇몇 장면에서 잘된 연출이나 세련된 작화가 눈에 들어왔고, 어떤 장면은 더 절절하기까지 했다. 신지가 왜 고통을 받느냐, 왜 다른 등장인물들이 신지에게 진실을 설명하지 않느냐는 이제 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고통 그 자체였다. 그런 고통에 마음이 움직였고 야릇한 감동을 받기도 했다. 동대문이나 동묘에서 일할 때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느꼈던 이상한 감흥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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