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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애들은 왜 다 이 모양일까? "학교 도서관" 질문 세션 (2/3)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10. 13. 15:49
(다음 질문은 도서실을 이용하는 우리 아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과 상호관계에 대해서입니다. 최근 학생들을 살펴보면 ‘어쩌라고’ ‘나하고는 상관 없어’ 같은 반응을 보이는 친구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에게 어떤 말을 해 주면 좋을까요.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입구인 도서관과, 성스러운 존재라고 말씀하신 우리 아이들과의 궁합은 어떠한 모양으로 나타나는 걸까요? 자기 자신의 무지를 가시화시킴과 동시에, 무언가 알고 싶다, 성장하고 싶다는 호기심과 향상심은 어떻게 생겨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드립니다.)
도서관이란 ‘자신의 무지를 가시화하는 장치다’라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의 결점이 노출되었기에 ‘다리가 얼어붙는 것’과, 그럼에도 ‘좌우지간 내면 속 만분의 일이든 억분의 일이든, 조금이라도 배우고 싶다’ 는 배움에 시동이 걸리는 마음은, 셋트 메뉴입니다. 소스라치는 동시에 겸허해지는 겁니다.
배우는 사람으로서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은, 머릿속이 잡다한 지식과 정보로 가득 차 있어서 더는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가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를 ‘무지’라고 합니다. ‘무지’란 다름이 아니고, 머릿속에 쓰레기같은 지식들만 많은 나머지 그만 새로운 것이 들어갈 수 없는 상태를 이르는 겁니다. 이건 제가 한 말이 아니고, 일찍이 롤랑 바르트*가 주장했습니다.
(* 1915~1980.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비평가. 주요 저서 <글쓰기의 영도>, <작가의 죽음> 등. - 옮긴이)
이러한 맥락을 뒤집어보면, ‘지적’이란 말의 의미는,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과 같이 거듭 거듭 지(知)에 대한 새로운 갈망이 솟아오르는 상태를 이릅니다. 생각보다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정지해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더 알고 싶다. 더욱, 배우고 싶다’는 의욕입니다. 더더욱 자기 자신의 지(知)의 프레임을 쇄신시켜가고자 합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단일한 가치관 속에 갇혀있고 싶지 않게 됩니다. 좀 더 다른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한 자기 쇄신의 역동적 과정을 지(知)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어떤 운반용기가 있다고 칩시다. 그 속에 여러 지식이나 정보, 기술을 쑤셔박는 것이 ‘뭔갈 배운다’는 것이라고 보통은 여기기 마련입니다만, 그건 아주 틀린 생각입니다. 그런 게 아니라, 저장공간 자체가 점차 형상을 바꾸고, 용적이 변화되고, 기능이 변화되어 가는 것이야말로 배우는 과정입니다. 하드디스크 안에 이것저것 콘텐츠를 저장해두는 게 아니란 말씀이예요. 새로운 입력이 있을 때마다 저장용기 자체가 다른 것으로 변화해 가는 것을 ‘배움’이라고 이르는 법이니까요. ‘괄목상대’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삼국지에서 나오는 말인데, 배움의 도정에 있는 인간은 단 사흘동안 안 보이는 사이에 딴사람이 되어 버린다는 겁니다. 배우는 과정을 제대로 거치면 3일 전하고는 표정도, 말도 어휘도 목소리 톤마저 바뀝니다. 모조리 바뀌어버리는 거예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배운다는 건요. 본디 학교교육이란 우리 아이들이 딴사람이 되는 역동적 과정을 지속지원하는 겁니다.
무지 상태에 도취, 안주해 있는 우리 아이들을 자기 쇄신 프로세스로 안내하는 것이 교사의 임무입니다. 안주해 있다는 것 자체가 ‘무지’를 의미합니다. 척척박사 연하며 시답잖은 궤변으로 선생님을 이겨먹으려고 드는, 같잖은 ‘금쪽이(원문 ガキ; a brat - 옮긴이)’가 종종 나옵니다만(웃음), 그런 게 바로 무지의 전형입니다.
이러한 무지 상태에 꼭 응고되어 있는 친구들을 풀어서 녹여내기란 상당히 어렵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무지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사실 그로써 자기 자신을 방어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자기 쇄신이란 건 자기가 한 번 손에 쥔 스킴(scheme)을 포기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큰 맘 먹고서, 자신의 신념 체계를 부수고, 무방비한 개방 상태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그때에는 매우 부서지기 쉽고, 상처받기 쉽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자기 쇄신은 불가능하기 마련입니다. 연속적인 자기쇄신은 사실 위험천만한 시도입니다. 배움을 위해 자기 방어를 해제하는 것이므로, 그때는 대단히 유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유약한 상태로 자기 자신을 두었을 적에 누군가로부터 상처받은 경험을 가진 아이는, 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아, 결국 자기 자신을 다른 누군가에게 개방하기를 그만 두게 됩니다. 이제는 겁이 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그 방어 기제는 자기 자신의 가치관을 이제 절대로 바꾸지 않겠다는 엄포로 표면화됩니다. ‘내가 알아서 살 거야!’ 라고 고집을 부리는 아이는 사실 뭔가 상처를 입었던 겁니다. 용기를 갖고서 자기 자신의 자치관을 포기해 보았던 때에 상처받은 경험이란 게 있는 겁니다. 그러니만큼 그것을 해제하는 건 누가 되었든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가 대학 강단에 서 보니 비로소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만 18세 쯤이 되어 대학에 입학하게 된 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정도의 차는 있다손 쳐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어떤 트라우마적인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문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절대로 이젠 교사 따위한테 마음을 열지 않겠다고 각오를 굳히고서 등장하는 학생도 있곤 합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겁먹을 것 없어. 네 마음을 열어도 네게 상처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걱정 말렴’ 이라는 메시지를 납득시키는 데 2년 정도가 걸립니다. 겨우겨우 3학년 정도쯤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지적인 스킴(scheme)을 부수고서, 자기쇄신 과정에 오를 수 있게 됩니다. 상처받기 쉬운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아무도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보증이 있기만 하면 자기 자신을 개방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부분의 우리 학생들은 아마도, 예전에 자신의 마음을 한 번 열고서 선생님을 믿고 부모님을 믿고 친구를 믿어버린 탓에,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줄곧 마음문을 걸어잠그고 있습니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닫아버리는 겁니다. 따라서 교육에 몸 담고 있는 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바는, 아이들이 마음을 열었을 때에, 다시 말해 취약한(fragile) 상태일 때, 절대로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학교란, 원래대로라면 온실 역할을 꼭 해줘야 하는 장소입니다. 자신을 아무리 무방비 상태로 놓아두어도 누군가로부터 상처받는 일이 없다는 점을 선생님들이 보증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순수함(innocence)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성스러운 존재’와 통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것은 다름 아닌 순수함을 이릅니다. 순진무구하고 무방비하다는 것입니다. 순수함을 띠고 있을 때 상처를 입으면, 아이들은 방어 기제를 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지적이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무방비함을 갖출 것이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자기 방어가 철저하고 어떠한 공격에도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동시에 지적인 사람이 될 수는 단언컨대 없습니다. 지적이라는 것은 곧 무방비하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무방비한 상태로의 전환’은 그렇게 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여야 하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함양시켜 가는 것이 학교 교육의, 특히 초중고 6년 동안의 과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에게 순진무구해도 좋다, 무방비 상태로 있어도 상관 없다, 그렇게 해도 아무도 너를 해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게 바로 그런 작업입니다.
무방비함을, 순수함을 유지한 채로 성장한 사람을 만나 보면 대단히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존재로 또한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돈 권력 명예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이노센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회적 승인을 집요하리만치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거짓으로 꾸미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이 자상하게 사랑을 베풀어 준 경험이 있는 자녀는 집착하지 않습니다. 죽자 살자 유명해지겠다든가, 돈을 벌겠다든가, 남에게 굴욕감을 안겨줄 수 있는 입장이 되고 싶다고는 바라지 않습니다. 오늘날 현장에서 마주칠 수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뭔가 좀 아닌 것 같은 방향에 경도되어 있는 것은, 미상불 이노센스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서 여러분이 학생들 얼굴을 직접 보면서 지내실 테니 잘 아실 겁니다. 구김살이 없고 언뜻 무방비해보이는 친구들은, 지금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말로요.
학교 교육의 참된 임무를 생각할 때는, 우리 아이들 마음 속에 가까스로 남아있는 한 줌의 순수함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무방비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에게 놀라운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삐걱 삐걱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데도, 동시에 지적으로 혁신적인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아이들을 지킬 방도가 여럿 있습니다만, 그중 한 가지는, 일단 여러분이... 학교 안에 ‘미스테리 존’을 꾸며주시는 거거든요(웃음). 미스테리 존 내부에서만큼은 무방비한 자세를 취해도 안심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여러분 ‘게이트 키퍼’를 맡은 사서 분들은 무한을 상징하는 도서실에서의 행동 요령이라고나 할까, 서책을 다룰 때의 매너를 알고 있으므로, 사서 여러분의 노하우에 학생들이 따라만 준다면 그들이 결코 상처받지 않을 거라는, 그러한 보증을 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미스테리 존 깊숙이 들어가 본 경험이 있는 ‘선배’로서, 여러분이 우리 아이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주는, 그런 작업을 나서서 해 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여기서는 줄세우기도 아니하고, 평가도 내리지 않으며, 물론 윽박지르지도 않으며 불필요한 공포심을 심어주지도 않습니다. 이곳에서만큼은, ‘길 안내인’이 따라붙는 한, 절대로 상처 받지 않을 것이라는, 그러한 장소를 학교 내부에 만들어 주시는 일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따라서 하시모토 도오루 같은 세속의 권력자들은 그런 장소만 쏙쏙 골라 망가뜨리는 겁니다. 학교 안에 세속의 가치관이 통용되지 않는 미스테리 존이 떡하니 있어 버리면 그들의 신자유주의가 위협받으니까요. 그럼에도 미스테리 존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싸워야만 합니다. 이 성지를 지키기 위해 모두가 단결해야 합니다.
학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학생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학교의 본무는 평가나 줄세우기, 상대적 우열을 논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 데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거듭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출처: http://blog.tatsuru.com/2023/09/09_0927.html'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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