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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드렸나요, 선생님?"인용 2023. 9. 7. 22:57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 같은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민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네들 생각만 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즉 그들은 재앙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있었다.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은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첫째로 휴머니스트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딴 사람들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겸손할 줄을 몰랐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아직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미래라든가 장소 이동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금지시켜버리는 페스트를 어떻게 그들이 생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인정해야 할 것이면 명백하게 인정하여, 드디어 쓸데없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쫓아버린 다음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페스트가 멎을 것이다. 왜냐하면 페스트가 머릿속에서의 상상, 머릿속에서의 그릇된 상상이 아니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만약 페스트가 멎는다면ー그것은 가장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ー모든 일은 잘될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우리는 페스트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우선은 그에 대비하는 조처를 취하고 다음으로는 그것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 있는지 어떤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의사는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시가의 소음이 대뜸 커졌다. 이웃에 있는 어떤 공장에서 기계톱의 짧고 반복되는 소리가 싸각싸각 들려왔다. 리유는 머리를 흠칫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저 매일매일의 노동, 바로 거기에 확신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 나머지는 무의미한 실오라기와 동작에 얽매여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멎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 자기가 맡은 직책을 충실히 수행해나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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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습니다. 리유.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 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그러나 페스트 환자 노릇을 그만 하려고 애쓰는 몇몇 사람들이, 죽음 이외에는 그들을 해방시켜 줄 것 같지 않은 극도의 피로를 체험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 죽이는 것을 단념한 그 순간부터 나는 결정적인 추방을 선고받은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사람들을 표면적으로 비판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성적인 살인자가 될 자질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은 우월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본래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되기로 했고 겸손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만 나는 지상에 재앙과 희생자들이 있으니 가능한 한은 재앙의 편을 들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렵니다. 아마 좀 단순하다고 보실지도 모릅니다. 단순한지 어떤지 나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나는 너무 여러 가지 이론들을 들어서 머리가 돌아버릴 뻔했고 그 이론들 때문에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살인 행위에 동의할 정도로 머리가 돌아버렸어요. 그래서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정확한 언어를 쓰지 않는 데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도를 걸어가기 위하여 정확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재앙과 희생자가 있다고만 말할 뿐, 그 이상은 더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록 내 자신이 재앙 그 자체가 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에 동조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차라리 죄 없는 살인자가 되길 바랍니다. 보시다시피 이건 그리 큰 야심은 아닙니다."
(...)
"결국." 하고 솔직한 어조로 타루가 말했다. "내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안 믿으시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이죠. 오늘날 내가 아는 단 하나의 구체적인 문제는 사람은 신이 없이 성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네." 타루가 끄덕거렸다.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말하는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뿐이죠."
리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언제나 그렇죠.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싸움을 멈추어야 할 이유는 못 됩니다."
"물론 이유는 못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다면 이 페스트가 선생님에게는 어떠한 존재일지 상상이 갑니다."
"알아요." 리유가 말했다. "끝없는 패배지요."
타루는 잠시 의사를 보고 있다가 일어서서 무거운 걸음으로 문앞까지 갔다. 리유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의사가 그의 곁에까지 갔을 때 자기 발등을 보고 있는 것 같던 타루가 리유에게 말했다.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드렸나요, 선생님?"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가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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