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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지훈은 든든하고 안정감 있는 아이로 컸다." (김지혜 <책들의 부엌> 중에서)인용 2023. 9. 15. 20:00
지훈의 가족과 함께 있을 때면, 마리는 뭔가 이야기를 지어낼 필요가 없었다. 지훈의 가족은 사람은 누구나 평범하고, 평범함의 옷을 입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살 때 빛이 난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있는 척하는 삶이 주는 순간의 짜릿함과 우월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내가 그 정도는 벌어봤는데.", "내가 살다 보니 이런 경우도 있었는데 말이야." 라는 말로 시작되는 허세의 기운은 세 가족의 어떤 구석에도 스며들지 못했다.
그래서 마리는 지훈과 있을 때는 완벽하고 특별한 존재로 보여야 한다는 압박에서 해방되었다. 지훈의 가족은 마리에게 꼬치꼬치 캐묻는 법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마리의 삶이 어땠는지를 은근히 궁금해하는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집에 돈은 많은지, 엄마와는 어떤 추억이 가장 기억에 남는지, 장래의 꿈은 어떻게 되는지 따위를 직간접적으로 질문하지 않았다. 지훈의 부모님에게 마리는 그냥 지훈이의 친구였고, 지훈에게 마리는 독일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였다. 그거면 충분하지, 뭐가 더 필요하냐는 눈빛이었다. 지훈의 가족을 만나면 마리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지훈의 부모님은 베를린의 한인타운에서 세탁소를 운영했는데, 오전 6시부터 문을 열어 밤 11시가 되어서야 문을 닫았다. 엄마는 항상 푸석한 머리에 피곤한 눈빛이었고, 아빠는 한 달 생활비를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살았지만 지훈은 한 번도 부족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부모님은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 번은 지훈과 눈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말해줬다. 지훈의 생일선물을 사줄 돈을 작은 저금통에 따로 모았고, 일주일에 한 번 쉬는 일요일이면 베를린의 공원과 갤러리, 자연사박물관과 동물원 등을 데리고 다녔다. 함께한 순간이 담긴 수많은 사진이 사랑의 증거가 되었다. 지훈이 기억하는 한, 언제나 부모님은 최선을 다해서 살았고 언제나 환하게 웃어줬고 언제나 사랑한다고 말해줬다. 사실 그건 부모님이 지훈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인생 교육이었다. 덕분에 지훈은 든든하고 안정감 있는 아이로 컸다.
이민 5년 차부터 지훈의 가족은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세탁소는 안정적인 수익을 벌어들이는 파이프라인이 되어줬고, 폐업하려던 바로 옆 식료품 가게를 인수했다. 세탁소 2호점을 미테 지구에 내면서부터 세탁비와 수선비를 올렸는데도 입소문을 타고 수요가 끊이지 않았다. 그곳은 진심이 있었다. 세탁소는 정성스럽고 따스한 기운이 머물렀고, 식료품 가게에서는 활기찬 인사가 오갔다. 손님들은 진짜배기 관심과 애정을 받았고, 자석에 이끌리듯 다시 이곳을 찾았다. 세탁해야 할 옷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배가 고파서도 아니었다. 마음을 채우고 싶어서였다. 부모님은 빛이 바랜 사람들의 마음을 든든하게 채워주고, 쭈글쭈글해진 마음을 부드럽게 다려주는 사람들이었다. 세탁소와 식료품점이 번창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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