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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망의 공산당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3. 7. 21:03

    <희망의 공산당>이라는 앤솔러지에 실릴 원고 청탁을 받았으므로, 평소 거듭거듭 말씀드리고 있는 소론(所論)을 썼다. 일본공산당은 일본 정치사라는 문맥 가운데 놓기보다는, ‘세계 공산당사(史)’의 문맥 가운데 놓고 보아야 그 특질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견을 서술했다.
     
    일본공산당에 필자는 ‘시민적 성숙’을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갈등 속에서 단련됨으로써 달성된다. 공산당이 ‘갈등에 곤혹스러워하는 정치조직’이 되기를 필자는 바라고 있다. 그러한 정치 조직이 현재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민당은 사상적으로는 거의 무내용적인 정당이지만(그래서 통일교의 강령이나 일본회의의 강령을 무작정 받아들여도 몸이 망가지지 않는다), ‘정권에 매달리기 위해서는 뭐든지 한다’는 점에서는 전 당원이 훌륭하게 일치되어 있다. 공명당은 굳건한 반석 같은 정당으로, 내부의 권력 투쟁은 있을지언정 사상적 갈등은 거의 없다. 입헌민주당 이하의 야당과 관련해서는 당원들이 과거 20년 간 어느 당적에 있었는가 하는 ‘계보도’를 아마 정치부 기자조차 떠올려내지 못할 정도로 이합집산을 반복해 왔다. 정치적 의견이 다를 시 ‘분당’하는 것을 심리적 저항이 없이 해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갈등은 없다.
     
    그 가운데 있어서 유일한 예외가 강령적 입장에 흔들림 없이 ‘이 간판을 내려서는 안되는’ 정당인 한편, 시민적 성숙에 대한 기대를 받고 있는 정치 조직이 일본공산당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 ‘희망’을 그들은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줄 수 있을 것인가. <희망의 공산당>에 기고한 것은, 이하의 문장이다.
     
     
    요전날, 필자가 주재하고 있는 학당인 개풍관에, 제주 4・3 사건의 청취 조사를 위해 일본을 찾은 진상조사단의 김창후 씨가 ‘한글 서당’ 게스트로 내관했다.
     
    아시는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에, 미군정 하에 있던 제주도에서 일어난 도민의 봉기에 대해, 한국군, 경찰, 반공 테러리스트들이 행한 학살 사건을 이른다. 봉기의 중심에 있던 것은 남조선 노동당이었다. 미군과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전체가 공산주의에 친화적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여성, 유아, 고령자를 포함한 많은 시민이 학살당했다.
     
    반공이 국시였던 전후 한국 사회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오랫동안 금기시되어왔다. 도민들 자신도 입을 다문 채로, 기억을 봉인해왔다. 기어코 87년 민주화 이후, 4・3 사건의 진상 규명과 희생자에 대한 사죄가 시작되었다. 2003년에 노무현 대통령이 도민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 사과를 행하고, 희생자를 위한 명예 회복 위원회를 설치했다. 이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4・3 사건의 진상 규명과 희생자에 대한 사과와 보상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김씨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희생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무고한 시민’들 뿐이며, 봉기를 주도한 남조선 노동당의 활동가들이나 거기에 동조해 게릴라 활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군이나 경찰에 의해 참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희생자’로 집계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는 한번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버린 사람들은 다시는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4・3 사건을 주도했던 남조선 노동당은 파멸적인 탄압 뒤, 1950년에 북조선 노동당과 합병해 조선 노동당이 되었다. 김일성 정권 하의 북한에서 ‘남로당파’로써 일대 세력을 이루었지만, 나중에 거의 전원이 숙청되었다. 그들은 북에서도 ‘정규 시민’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자들은, 남에도 북에도 돌아갈 조국을 갖지 못하고, 공양하는 사람도 없는 채로, 망령과 같이 지금도 한반도 위를 떠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김씨가 일본에 와서 가장 놀랐던 점은, ‘일본 공산당’이라는 포스터를 길거리에서 봤던 때라고 가르쳐주었다. 한국에서는 일단 ‘공산’이라는 문자열을 거리에서 볼 기회가 없다. 조금이나마 접하게 되도 전전긍긍하게 되는 ‘금기’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공산당이 국회에 의석을 가지고 있는 거죠’ 라고 김씨는 확인하려는 듯이 말했다. 그 말투는 거의 ‘일본에서는 유령이 국회에 의석을 가지고 있는 거죠’ 와도 같은 어감에 가까웠다.
     
     
    김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시아 제국(諸國)에서의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 정당의 지위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이전에 일본공산당으로부터 ‘지지자 가운데에서도 당명 변경을 제안하는 사람이 있는데,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라는 질의가 들어온 적이 있었다. 당명을 바꿔서는 안된다고 필자는 답변했다. 이 당명을 유지하고 있음으로써 비로소 ‘비교 공산당사(史)’라는 역사적 연구 분야가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에 이어 세계 각국에서 공산당을 참칭하는 정치 조직이 태어났다. 독일 공산당, 프랑스 공산당, 중국 공산당, 일본 공산당, 조선 공산당이 창설되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났다. 세계의 공산당이 각자 어떠한 모습으로 역사적 풍설을 견디고, 또한 변모를 거쳐왔는가를 아는 것은 매우 흥미 깊은 정치적 이슈라고 생각한다. 그 추이를 살펴봄으로써, 그 나라 고유의 정치 풍토가 떠오게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고 보는데, 1872년에 제1인터내셔널의 본부는 런던에서 뉴욕으로 이전하고, 미국인 프리드리히 조르게가 서기장으로 취임했다. 미국이 세계의 공산주의 운동의 거점이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대전간기에는 미국 공산당이 지식인층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보잘것없다. 조지 오웰이 스탈린주의를 비판하여 <1984년>을 썼는데, 그때 오웰이 직접 싸웠던 대상은 영국 공산당이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대독(對獨) 레지스탕스의 중추였으며, 노르망디 작전 이후의 드골 장군에게는 국내 최강의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전후 스탈린을 추종하여 국민적 지지를 잃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아시아 최초의 공산당으로, 전후에는 일대 세력이었지만 1965년에 군의 학살로 소멸했다. 그 일부는 영화 <액트 오브 킬링>으로 알 수 있다. 조선 공산당의 비참한 역사는 방금 말한 대로다.
     

    이렇게 일별하면, 세계 공산당의 궤멸과 변질 가운데에서 100년을 살아남아, 지금도 국회, 지방 의회에 의석을 가지고 있으며, 정책 결정과 여론 형성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일본공산당이 참으로 예외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일본 공산당은 살아남았으며, 지금도 일본의 서점에는 ‘마르크스’에 관한 대량의 서적이 꽂혀져 있는가.
     
    전에 중국의 신화통신사로부터 취재를 받은 적이 있다. 필자와 이시카와 야스히로 씨의 공저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가 중국어로 번역되어, 많은 독자를 얻은 것에 관한 인터뷰였다. 우리의 책은 중국공산당의 ‘간부 당원 대상 추천 도서’로 지정되었다. 어째서 젊은이들에게 마르크스의 사상을 알기 쉽게 해설한 책이 중국 공산당의 지식인이 아닌, 일본인에 의해 쓰여졌는가. 그것이 수수께끼였을 것이다. 처음 질문은 ‘어째서 자본주의 사회인 일본에는 마르크스주의를 애독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존재하고 있는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였다. 그 물음에 필자는 이렇게 답했다.
     
    ‘일본에서는, 마르크스는 정치 강령이라기보다는 <교양서>로서 읽힌 측면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마르크스의 텍스트가 가진 가치를 <마르크스주의>를 참칭하는 이런저런 정치 운동의 역사적인 공죄(功罪)로부터 고량(考量)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구사하는 논리의 스피드, 수사의 선명성, 분석의 예리함을 완미(玩味)하고, 독서하는 데에서 쾌락을 끄집어내는 <비정치적인 독해>가 일본에서는 허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를 읽는 것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지적 성숙의 일계제(一階梯)>라고 믿어져왔다. 일본에서 젊은이들은, 마르크스를 읽었더라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를 읽은 뒤 천황주의자가 된 자, 경건한 불교도가 된 자, 계산속 빠른 비즈니스맨이 된 자도 있다. 그럼에도 청춘의 어느 한 시기에 마르크스의 텍스트는 그들에게 어떤 종류의 인간적 깊이를 부여했다. 적어도 ‘부여했다’고 믿어졌다.
     
    정치적인 읽는 방식으로 한정한다면, 스탈린주의가 가져다 온 재액이나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와해라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미루어, <이들 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된 이상, 마르크스는 더는 읽을 가치가 없다>는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허나, 일본에서는 그러한 이유로 마르크스를 읽는 것을 그만두었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비정치적인 읽기가 허용되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 세계에서도 예외적으로, 일본에서는 지금도 마르크스가 계속 읽히고 있고, 마르크스 연구서가 계속 쓰여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의 공산당의 현실적인 영향력에 대한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일본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 정당이지만, 선거에서 공산당에 투표하는 사람들의 많은 수는 그 강령적 입장에 동조했다기보다는, 당에 속한 의원들이 대개 윤리적으로 청결하고, 지성적이며, 지역 활동에 열심이라는 점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는 1920년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주의를 내건 무수한 정치 조직이 끊임없이 존속하고,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정치학이나 종교학, 사회 이론이 연구되고, 강의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연구의 폭과 넓이라는 점에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돌출적이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도 일본인의 많은 수는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나 개념을 숙지하고 있고, 그 스킴으로 정치경제의 사상(事象)을 논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것이 일본인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 문답에서 알 수 있겠지만, 필자는 일본공산당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했던 최대의 이유는 일본공산당이 ‘공산주의의 독점자’가 아니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고방식을 하는 사람이 필자 외에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무역 분야에는 ‘총대리인(sole agent)’이라는 것이 있다. 그 업자를 경유해야만 수입할 수 있는 독점적인 대리점을 이른다. 많은 나라에서 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의 총대리인’이 되려고 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독해나 마르크스주의의 강령의 해석에 대해 결정하고, ‘이단’을 심문하는 권리를 점유하려고 했다. 레닌과 스탈린이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영도했던 시대에는, 그 지시의 유일한 ‘창구’가 되려고 했다. 세계 각국의 공산당이 그 특권적 지위를 바라고, 그것을 손에 넣었던 탓에 결국 쇠퇴하고, 멸망했다. 필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 가운데에 일본공산당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총대리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위에 쓴 바와 같이, 일본에는 공산당 이외에도 마르크스주의를 내건 다양한 조직이나 운동체가 존재하고, 공산당의 공식 해석 이외에도 마르크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나 이해가 병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환경 가운데 놓여진 덕분에, 일본공산당은 ‘자신들의 니치’를 찾아내어, 시민을 향해 자신의 정치적 유용성을 호소하고, 그 지지를 간청하는 작업을 여의치 못하게 되었다. 이는 ‘총대리인’의 면허장을 손에 넣어, 그 지위에 안주해버리고 만 다른 나라의 공산당에게는 불필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일본공산당은 그 ‘번거로운 일’을 달성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이 정당에 어떤 종류의 ‘시민적 성숙’ 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김씨를 놀라게 한 것과 같이, 일본공산당이 세계에서도 지극히 예외적인 ‘국회에 의석을 가진 공산당’일 수 있었던 것은, 일본공산당이 ‘역사를 관통하는 철의 법칙성’에 의해 그 신분을 영구보증받은 정당이 아니라, 매번 시민의 지지 가운데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던 정당이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를테면, 그 ‘약함’이 약이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일본공산당이 어떠한 조직을 편성하고, 어떠한 운동을 만들어나갈 것인가, 그것은 당원들이 결정할 일이지, 필자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일본공산당이 100년을 살아남은 것은 ‘원리적 올바름’보다도 ‘시민적 성숙’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 역사적 경위를 올바르게 평가한다면, 앞으로 나아갈 길도 자연스레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성숙에 대해 알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경험칙은 ‘사람은 갈등 아래에서 성숙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조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깊은 갈등을 품고 있는 조직은, 그렇지 않은 조직보다도 성숙할 찬스가 높다. 전 당원이 똑같은 표정을 하고서, 똑같은 말투로 말하며, 지도자의 명령에 정연하게 따르는 굳건한 정당을 일본공산당은 이상으로 해서는 안된다. 그런 정당은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으로 가동될지도 모르지만, 갈등이 없는 조직은 성숙할 수 없다. 그래서 언젠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멸할 것이다.
     
    필자가 일본공산당에 바라는 것은 ‘갈등을 통해 성숙할 수 있는 조직’이 되라는 점이다. 딱히 필자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이미 일본공산당 분들이 그 점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 숙지하고 있을 것이다.
     
     
    (2023-02-02 13:43)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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