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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즈키 구니오 씨를 추도하며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2. 27. 21:03

    후기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세상을 개탄하는 먼 울부짖음 2>를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구매하지 않으시고, 서점에서 ‘살까 말까’ 고민하는 독자분도 손에 들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살까 사지 말까, 기분이 정해질 때까지, 잠시동안만 이 ‘후기’를 읽어주십시오.

     

    이 책은 스즈키 구니오 씨와의 대담을 모은 두 번째 책입니다. 두 책을 다 읽어보면, 제가 이 대담을 통해 스즈키 씨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제가 스즈키 씨에게 배운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으로서 독립한다는 것’의 어려움과 그 중요함입니다. ‘후기’를 대신하여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스즈키 씨는 ‘독립 독행(獨立獨行)’ 하는 사람입니다. ‘자립한 사상가・운동가’라는 식으로 형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자립’ 만으로 표현하기에는 적잖이 부족합니다. ‘자립’이라는 말이 지금은 일상적으로 곧잘 쓰입니다. ‘정신적으로 자립함’ 이라든가 ‘경제적으로 자립함’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60년대에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자립의 사상적 거점>을 쓸 무렵, ‘자립’은 꽤 날카로운 단어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단어의 예각은 지나치게 많이 쓰이면 마멸됩니다. 지금은 ‘자립하고자 한다’고 말해도 ‘아, 그러세요. 좋을 대로 하시길’ 하는 식의 김빠지는 반응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집에서 보내오는 송금을 끊고 아르바이트로 집세를 내도, 부모님이 철저하게 학습시킨 처세술의 얄팍함을 깨달아도 ‘자립했다’가 성립됩니다.

     

    물론,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본래 ‘자립’에는 좀 더 엄격한 뉘앙스가 있었을 터입니다. 휘몰아치는 역풍을 견디며, 홀로, 전인 미답의 황야를 걸을 각오가 그 말에는 맡겨져 있었을 터입니다. 하지만, 지금 ‘자립’은 더는 그렇게 하드한 어감을 가져다주는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즈키 씨를 평하는데 ‘자립한 사상가・운동가’라고 표현하기에는 제가 봤을 때 부족합니다. 그보다는 ‘독립 독행하는 사람’이라는 조금 강한 형용을 선사하고 싶습니다.

     

     

    스즈키 씨는 현대 일본의 논단에서(논단 이외의 분야에서도), 참으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달리 유례가 없습니다. 상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스즈키 씨를 상정한 대담이라든가 심포지움에 스즈키 씨가 형편이 되지 않아 나오지 않았을 때 ‘그럼, 스즈키 씨를 대신해서 제가 나왔습니다’ 라고 말하며, ‘스즈키 씨가 말할 만한 것’을 대신 말해줄 것 같은 사람을 찾아봐도 결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일본에는 없습니다.

     

    정치적 논건에 대해 소견을 표할 적에, ‘스즈키 구니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일본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이는 잘 생각해보면 엄청난 일입니다.

     

    오리지널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요령이 좋은 사람 중에는 ‘아니, 나는 <스즈키 구니오같은 말>을 하고 있어’ 라고 지금 생각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 하지 못할 것이라고 봅니다. 스즈키 씨가 어디선가 했던 말을 기억해서, 말투를 흉내내어, 연기적으로 반복할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절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즈키 씨의 ‘아, 그런가!’ 입니다.

     

    스즈키 씨는 저와의 대담에서도, 몇 번이나 ‘아 그런가!’ 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이 있을 줄은 상정하지 못했다’ 할 때, 스즈키 씨는 정말 기쁜 듯이 무릎을 칩니다. 자신이 계속 생각해왔던 것의 올바름을 선명하게 논증할 수 있을 때보다도, 자신이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아이디어를 접했을 때가 스즈키 씨는 기쁜 모양입니다. 그것이 스즈키 씨의 뛰어난 점입니다. 자설(自說)을 시끄럽게 강요하는 사람을 흉내낼 수는 있어도, 자설을 철회할 수 있는 사람의 흉내를 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반대로 말하면, 시끄럽게 자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따라하고 있는 것이며, 자설을 깨끗이 철회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얘기군요. 조금 알기 쉽게 비유를 사용해 보겠습니다.

     

    ‘호가호위’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호랑이의 실력을 배경으로 허장성세를 부리는 여우를 이릅니다. 이 여우는 호랑이가 위압적인 태도로 명령을 내린다든가, 반대 의견을 일갈하여 물리치는 등의 흉내는 아주 능숙히 재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호랑이를 대신해 ‘대화’나 ‘교섭’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가령 호랑이에게 ‘잠시 동안만, 줄무늬 모양을 전부 갈색 바탕으로 바꿔보지 않겠습니까?’ 라든가 ‘지금 눈 앞에 토끼가 걸어오고 있는데, 이번만 먹지 않고 참아보겠습니까?’ 하는 오퍼가 있을 때에, 호랑이라면 가부를 즉답할 수 있습니다(‘갈색으로 하면 흙바닥에서 사냥할 때 편리하겠군’ 이라든가 ‘토끼는 잔뼈가 많아서 먹기 힘들지’ 등의 호랑이 고유의 판단 기준에 비추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호가호위하는 여우’에게는 이 가부의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 함은, ‘호랑이의 호성(虎性)을 형성하고 있는 본질적 조건은 무엇인가’를 여우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호랑이는 자기 자신이므로, ‘호랑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고 있습니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호랑이의 본질’이란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줄무늬 모양은 딱히 호랑이의 본질이 아니다(털이 새로 자라나는 경우가 있으므로), 배가 불렀을 때는 사냥감이 옆을 지나가도 쳐다보지 않는다. 그렇게 해도 호랑이의 호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우는 그것을 모릅니다. 위용을 뽐내는 호랑이의 흉내는 낼 수 있지만, ‘양보하는 호랑이’나 ‘한 수 접는 호랑이’의 흉내는 낼 수 없습니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오리지널한 지견을 말하고 있는지, 누군가의 생각을 따라 읊는지는 실제로 간단히 판별할 수 있습니다. ‘잘난 듯이, 단정적이고, 정형적인 말투로,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말하는 자식’은 대개 누군가의 의견을 따라 읊고 있다고 판단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신의 말을 말하는 사람, 독립 독행하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아이디어의 꼬리를 붙잡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내측을 찾아보며, 무언가 새로운 사념이나 감정의 조짐이 있으면, 그것을 따라갑니다. 그것은 외측에서 도래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까지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앞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누군가가 말한다면, 금세 즐거워집니다. ‘아, 그런가(그런 방법이 있었나)’ 하고 무릎을 칩니다.

     

    우리들은 ‘자설을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비타협적인 태도를 관철하는 인간을 보면, 무심코 ‘깊은 확신이 있으니만큼 저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정말로 그 반대입니다. 비타협적인 사람은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 가운데 어디가 ‘정말로 중대’하고, 어디가 ‘아무래도 상관 없는 것’인가를 판별할 수 없으므로, 할 수 없이 ‘모든 것을 양보하지 않는’ 경직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훨씬 더 유연합니다. 자신의 의견 가운데 어디까지가 ‘양보해도 되는 지점’이고, 어디부터가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인지 알고 있으므로, 임기응변, 변환 자재(變換自在) 입니다.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는 이런 지언(至言)을 남기고 있습니다.

     

    ‘어찌 되든 상관 없는 것은 유행에 따르고, 중대한 일은 도덕에 따르며, 예술에 관해서는 자신을 따른다.’

     

    스즈키 씨도 아마 오즈 야스지로와 같은 중층 구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의 이 대담에서도, ‘어찌 되든 상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제 말을 빙긋이 흘려넘기고, ‘중대한 일’에 대해서는 흥미 깊게 질문을 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저에게 동의를 구하지조차 않습니다. 스즈키 씨는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타인의 승낙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즈키 씨는 누구와도 만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책이라도 읽습니다. 배워서 깨달은 게 있으면 빙긋이 웃고서 ‘아, 그런가’ 하고 무릎을 칩니다. 이 개방성과 몸놀림의 유연함은, 스즈키 씨한테는 아슬아슬한 정도까지 깎아서 덜어내버리고 마지막에 남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마치 폭이 얇은 칼날과도 같이 스즈키 씨의 영혼에 깊숙하게 박혀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만큼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 이외의 것은 전부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즈키 씨는 ‘독립 독행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고 처음에 썼습니다. 그것은, 스즈키 씨의 온안(溫顔) 아래에는, ‘정말로 중요한 것’을 관철하기 위해서 누구의 동의도 승인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을 요구해도 소용이 없다는 단호한 금욕과 체념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스즈키 씨가 웃는 얼굴을 그치지 않는 것은, 주위의 인간이 스즈키 씨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어떻게 평하는지, 거기에 움직이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후기’를 쓰기 시작하기 조금 전에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선출되었습니다. 내년에는 프랑스, 독일에서 선거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정치 과정은 ‘일국주의’ ‘배외주의’ ‘안티 글로벌리즘’의 방향으로 삐걱거리며 방향 전환하고 있습니다. 국제 사회의 미래에 대해 방향성이 있는 메시지를 발신할 수 있는 정치가는 이제 세계 어느 곳에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 어디서든지 분노, 회한, 탄식의 말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세계는 이러해야 한다’는 향일적(向日的)인 비전을 말하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세계는 오리무중 가운데 돌입했다, 는 것이 제 솔직한 감상입니다.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일본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저에게 확실한 전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답을 알고 있다’ 하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하는 인간은 따라다녀서는 안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 그럴 때에는 ‘중지를 모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그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답을 내기 곤란한 문제에 대해, 자신과는 다른 입장의 말에 두루 마음을 여는 일이 가능한 개방적인 지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즈키 구니오 씨는 지금 일본에 아주 조금 남아있는 그러한 찾기 어려운 지자(智者)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많은 독자가 스즈키 씨의 사상과 운동으로부터 살아가는 힘과 지혜를 배우기를 저는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 희유한 사람과 대담할 기회를 가져다주신 데 대해, 로쿠사이샤의 후쿠모토 타카히로 씨에게 다시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이 책의 ‘추천문’을 보내주신 시라이 사토시, 카와구치 카이지 두 분의 후의에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정말 고마웠습니다.

     

     

    (2023-01-27 16:30)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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