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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에서의 자유와 통제 논쟁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10. 27. 22:25

    자유론이라는 논집에 기고를 의뢰받았다. 이런 것을 썼다.

     

     

    자유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선 미국 이야기부터 하고자 한다. 자유를 논하는데 어째서 미국 얘기를 하냐고 묻느냐면, 우리 일본인에게는 ‘자유는 다루기 까다로운 것’이라는 실제적 감각이 결핍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립 전쟁이나 시민 혁명을 경유하여 시민적 자유를 획득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지 않다. 자유를 희구하며 싸우고, 다대한 희생을 치러 자유를 손에 넣고 나서야, 자유가 지극히 다루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 방심하고 있다가는 얻은 것 이상으로 더 많이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몸서리쳐지는 경험을 우리는 집단적으로 해본 경험이 없다. ‘자유’는 freedom/Liberté/Freiheit를 번역한 것으로써, 패키지화된 서구 문명의 개념으로 근대 일본에 수입되었다. 순 일본어에는 ‘자유’에 상응하는 어휘가 없다. 그래서 자유는 토착적 관념이 아니다.

     

    우리는 걸핏하면 ‘자유는 대단한 것이다’ ‘전력을 다해 지켜야만 한다’라는 말을 의문의 여지 없는 전제로 하여 의논을 출발한다. 하지만 그러면 자유에 제한을 가하려는 정치적 입장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자유를 두려워하는 발상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자유를 제한하려는 자는 오로지 ‘사악한 권력자’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시민이 논하는 자유론은 ‘어떻게 권력자의 간섭을 배제하여 자유를 탈환할 것인가’라는 전술론에 머무르고 만다. 우리 사회에서 자유에 대한 사색이 깊이를 잃는 것은 이 고정적인 짜임새에서 탈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탓 아닐까.

     

     

    J.S.밀의 <자유론>(1855년)은 미합중국 건국이라는 역사적 실험을 코앞에서 관찰한 뒤 행해진 고찰이다. 우리가 우선 놀라게 되는 점은, 밀이 여기서 논한 첫 주제가 바로 ‘사회가 개인에 대해 당연 행사해도 되는 권력의 성질과 한계’라는 것이다. 어디까지 시민적 자유를 제한해도 되는가. 밀은 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일본에서는 그러한 질문으로부터 자유에 대한 논의를 도출해내는 습관이 없다. 우리 사회에서 시민은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의 확대’에 대해 말하고, 통치자는 ‘정부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확대’를 말한다. 이야기의 틈이 거의 좁아지지 않는다.

     

    통치 기구는 어느 선까지 시민적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가, 제한해야만 하는가, 그것이 밀이 논한 자유론의 논점 중 하나다. 이러한 물음은 시민 혁명을 경험하고, 정부를 무너뜨리며, 통치 기구를 직접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시민밖에는 제기할 수 없다.

     

    시민 혁명 이전의 인민에게 지배자는 ‘민중과 이해가 항상 상반되는’ 존재였다. 그래서 인민은 지배자의 권력을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만 생각해도 문제없었다. 하지만, 민주제(원문 民主制, 이념성보다 사회구조적 시각에 입각해 대상을 낯설게 보기 위해 강조한 어휘임 - 옮긴이)를 시민이 수립한 뒤, 이론상으로는 인민의 대표가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지배자의 이해와 의지는 인민의 의지와 이해와 일치한다는 얘기가 되었다. 정부의 권력은 ‘집중화되어 행사하기 용이한 모습을 한 국민 자신의 권력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였다. 민주제 이전이었다면, 그러니까 공상적이었다면 그렇게 말해도 상관 없었으리라. 그러나, 실제로 시민 혁명을 행하여, 민주제를 실현시켜버리니, 이야기는 그렇게까지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권력을 행사하는 <민중>은, 권력의 지배를 받는 민중과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대의제 민주제의 뚜껑을 열어보니, 거기서 ‘민중의 의지’라고 불리는 것은 ‘실제로는 민중 가운데서도 보다 활동적인 부분의 의지, 다시말해 다수자 혹은 자신들을 다수자로서 납득시키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의지’였기 때문이다. ‘민중이 그 성원의 일부를 압박하려 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시민 혁명을 해본 경험이 있는 자밖에는 논할 수 없는 지견이라고 본다. 지배자 대 인민이라는 이항 대립으로 이야기가 끝났을 적에는 간단했다. 허나, 근대 민주제의 난점(aporia - 옮긴이)은 그 뒤에 나타났다. 시민 혁명을 통해 민주제를 실현해보니,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가장 활동적인 민중의 일부가 그렇게까지 활동적이지는 않은 다른 민중의 자유를 제약하려 들기 시작한 것이다. ‘민중에 의한 민중의 지배’라는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그럼, 어떻게 민주제의 이름으로 그러한 사태를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 사회가 개인에 대해 행사해도 좋은 권력의 성질과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그것이 170년 전쯤에 밀에 의해 정식화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결정적인 해답이 도출되지 않은 자유를 둘러싼 최대 논건이다.

     

     

    다시금 말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러한 물음을 우선적으로 의식할 수 있을 정도로 시민 사회가 성숙하여 있지 않다. 실제로 ‘다수자의 전제’가 ‘사회의 경계가 필요한 해악 중 하나’라는 인식이 일본 국민 사이에는 상식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선거에서 이겼다는 것은 민의의 의탁을 받아들인 것이다’ ‘선거에 이겼으니 세례식은 끝났다’와 같은 말을 정치가들이 부주의하게 입에 담고, 언론이 그대로 비판 없이 유포하는 일이 일어난다. 밀은 그러한 사고방식이 민주제에 치명상을 안겨줄 수 있다는 점을 일찍이 170년 전에 지적한 것이다.

     

    밀의 저서는 메이지 초기에 일본에 번역되어 모르기는 몰라도 널리 읽혔을 것이다. 하지만 읽었다는 것과 그것을 혈육화했다는 것은 아주 다른 이야기다. 우리는 토크빌이나 해밀턴, 밀이 살았던 18~19세기 서구 시민 사회보다도 한없이 민주제의 성숙도가 낮은 사회에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점을 우선 인정하도록 하자.

     

     

    자유는 단적으로 자유로서 마치 자연물과도 같이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시민 사회에 있어서, ‘어느 정도라면 제한해도 좋은 것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불완전한 모습으로 그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 시민적 자유와 사회적 통제는 어느 지점에서 충돌한다. 사적 자유와 공공의 복지는 어느 지점에서 충돌한다. 자유와 평등은 어느 지점에서 충돌한다. 그때, 어디쯤이 적절한 ‘중간 지점’이 될지는 원리적으로는 결정이 불가능하다. 평범하고 통속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절한 정도’가 되는 지점을 피부 감각이나 후각으로 찾아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정밀한 조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한 번은 자기 손으로 ‘날것의 자유’를 취급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경험이 없다.

     

    필자가 이번 논고에서 미국의 건국 사례를 검토하는 것은, 그 시대의 미국인은 참으로 성실하게 ‘통제와 자유’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에 대처할 때 생산적인 지견을 가져다주는 것은 많은 경우, 그 문제를 해결한 (혹은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도, 지금 이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다.

     

     

    독립선언(1776년)으로부터 합중국 헌법의 제정(1787년)까지는 11년이라는 시차가 있다. 그것은 새로이 만들어낸 나라의 모습에 대한 국민의 합의 형성이 어려웠다는 점을 의미하고 있다. 한편으로 연방 정부에 될 수 있는 한 큰 권한을 맡기자는 ‘중앙집권파(페더럴리스트)’가 있고, 다른 한 쪽에는 단일 정부 아래에 직할되는 것을 싫어하여 주 정부의 독립성을 중시하는 ‘지방 분권파’가 있다(State를 ‘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필자는 알지 못한다. 아래에 인용하는 <더 페더럴리스트>의 번역문에는 ‘주’와 ‘국邦’이 혼용되고 있다).

     

     

    중앙 정부에 필요한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인민은 자신이 가진 자연권의 일부를 양도해야만 한다. 이는 홉스, 로크 이래로 근대 시민 사회론의 상식이다. 이 원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민은 근대 시민 사회에는 없어야 했었다. 그래서 문제는 어떤 기관에 어느 정도의 사적 권리를 양도해야 하는 것인가이다. 이것은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인 것이다. 원리의 문제라면 옳고 그름의 끝장을 보아야 하는 경우가 있지만, 정도의 문제에 ‘최종적 해결’은 없다. 그것은 반드시 열린 의문문으로 남는다. 미합중국이 훗날 세계 최강국이 되었던 것은, 그들이 통치의 근본 원리를 채용할 때, 통제와 자유 그 어느 것을 우선시킬지를 선뜻 결정하지 않은 덕을 본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인간은 갈등 속에서 성장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해결하지 못하는, 근원적 난문을 품고 있는 나라는, 단일하고도 무모순적인 통치 원리에 통제받는 사회보다도 살아남는 힘이 세다.

     

     

    <더 페더럴리스트>는 합중국 헌법 제정 직전에, 여론을 연방파로 이끌기 위해 존 제이, 제임스 매디슨, 알렉산더 해밀턴 이렇게 세 사람에 의해 쓰여졌다. 제이에 따르면 이 책의 직접적 저술 이유는 ‘하나의 단일한 연방 가운데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추구하는 대신에, 각 국을 연합 몇 개로 묶어서, 혹은 몇 개로 분할함으로써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꾼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서로 한몸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 국토를 비우호적이고 시기질투하는 몇몇 독립국가로 분단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페더럴리스트들의 입장이었다.

     

    이때 연방에 통합되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건 것이 ‘자유’의 원리였다. 그들은 연방정부에 강대한 권한을 부여하면 주 정부의 자유를 잃게 되고 나아가 시민의 자유도 빼앗긴다고 하였다. 그래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이때 ‘자유’의 대립 개념은 ‘연방’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분류를 잘못 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유’와 ‘연방’이 제로섬 관계에 있다는 사고방식은 그 시점에서는 현실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제이의 다음 문장에서 알 수 있다.

     

    ‘같은 선조에게서 나서,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종교를 믿으며, 같은 정치원리를 받들고, (...) 일치단결하여 무장하고, 노력하여 오랫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워나간’ 미국인은 독립전쟁 이후 ‘13주 연합(the Confederation)’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 정치체제는 전화 아래에서 급조된 것이었기에 ‘크나큰 결함’이 있었다.

     

    ‘자유를 열망하는 동시에, 또한 연방에도 애착을 갖고 있던 그들은, 직접적으로는 연방(유니온)이, 간접적으로는 자유가 그들을 위태롭게 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연방과 자유를 동시에 충분히 보장하는 것은 좀 더 현명하게 구성된 전국적(내셔널) 정부(거번먼트)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 (...) 헌법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318~9쪽)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오독할 수 있는데, 여기서 제이는 연방과 자유를 양립시키는 것은 간단한 작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자유만을 추구하면 연방은 존립할 수 없다. 연방이 존립할 수 없게 되면, 자유를 잃게 된다. 그래서 자유와 연방을 ‘동시에 충분히 보장할’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이때 제이가 택한 논거는 연방이 없으면 자유가 위기에 처한다는 ‘침략자와 누가 전쟁을 할 것인가?’ 라는 가정이었다.

     

    독립 직후의 합중국은 영국, 스페인, 프랑스, 나아가 국내의 미국 원주민과의 군사적 충돌 리스크를 안고 있었다. 만약 어느 국이 이들 나라와 전투 상황에 들어갔을 때, 전투의 주체는 누가 될 것인가? 국 정부가 군사적 독립을 바란다면, 국 정부는 단도직입적으로 단독으로써 외적에 대처해야만 한다.

     

    ‘만약 한 정부가 공격받았을 경우 다른 정부는 그 지원에 발벗고 나서며, 그 방위를 위해 몸소 피를 흘리고 몸소 돈을 지출할 수 있겠는가?’ (같은 책, 329쪽).

     

    상당히 생생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현재의 미국밖에는 모르므로 이를테면 버지니아 주가 외국군에게 공격받아 코네티컷 주가 ‘이웃 국의 지위가 저하되는 것을 오히려 환영하며’ 방관하는 사태를 상상할 수가 없다. 혹은 ‘미국이 3개 내지 4개로 독립한, 어쩌면 상호 대립하는 공화국 내지는 연합체로 분열해서, 하나는 영국에, 하나는 프랑스에, 제3국은 스페인에 경도되어’ (같은 책, 330쪽), 미대륙에서 대리 전쟁이 시작된다면 그때는 어쩔 것인가 걱정하는 일을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사물을 근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그 생성 당시까지 되돌아가 생각한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미국이 있기 전에, 앞으로 미국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아직 예견할 수 없던 시점으로 되돌아가, 그 지점에서 자유와 연방의 역사적 의미를 음미하는 수밖에 없다.

     

    외적의 침략 리스크를 상정해놓고 나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 정부에 군사적 자유재량권을 부여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연방 정부에 군사적 사항을 위탁해야 하는가, 어느 것이 좋을까. 그것이 제이가 제시한 의문이었다.

     

    연방 정부에 군사를 위탁한다는 것은 상비군을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나 지방 분권파는 상비군이라는 아이디어 그 자체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세계 최대의 군사력을 가진 지금의 미국밖에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언뜻 믿기 힘든 얘기지만, 합중국 헌법을 둘러싼 최대의 논쟁은 사실 ‘상비군을 둘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방분권파가 상비군에 엄청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데에는, 상비군이 간단하게 권력자의 사병으로 전락하여 시민에게 총구를 들이댄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독립 전쟁에서 싸웠던 사람들에게는 공포와 고통을 함께 회상시키는 트라우마적 기억이었다. 확실히 영국군은 국왕의 뜻을 근거로 식민지 인민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그것에 대항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총을 들고 일어난 ‘무장한 시민들(militia)’들이 최종적으로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래서 전쟁을 하는 것은 직업 군인이 아니라, 무장한 시민들이어야만 한다. 이는 미국 건국의 정통성과 신화성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양도할 수 없는 요건이었다. 실제로 독립선언에는 분명히 이렇게 명기되어 있었다.

     

    ‘우리는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고, 창조주에 의해 양도 불가한 권리, 다시말해 생명, 자유, 행복 추구권을 부여받았음을 자명한 진리로 삼는다. (…) 어떠한 형태의 정부든지 이 목적을 해할 때 이를 개조 혹은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창건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다(It is the Right of the People to alter or to abolish it, and to institute new Government).

     

    독립선언은 인민의 무장권, 저항권, 혁명권을 인정하고 있다. 독립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전쟁 직후에 제정된 펜실베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 국 헌법에는 ‘평시의 상비군은 자유를 위험에 빠트리므로 유지해서는 아니된다’고 명기되어 있다. 뉴햄프셔, 매사추새츠, 델라웨어, 메릴랜드 국 헌법은 조금 완곡하게 ‘상비군은 자유를 위험에 빠트리므로 의회의 승인 없이는 모집, 혹은 유지해서는 아니된다’라고 이른다.

     

    ‘상비군은 자유를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명제는 건국 당시 미국 시민의 ‘감정’이 아니라, ‘성문법’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에 반해, 페더럴리스트들은 외적의 침입 리스크를 보다 중시했다. 그것은 ‘국가 존망의 위기’와 연관이 되었다. 해밀턴은 ‘국방군의 창설, 통솔, 군사 비용에 필요한 일체의 내용에 있어 제약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강대한 국방군을 창설할 것인가, 상비군은 최저한 잠정적으로 그치게 할 것인가. 이 원리적인 대립은 결국, 헌법 제정 때까지 해결을 보지 못했다. 합중국 헌법은 상비군 반대론을 고려하여, 상비군의 유지는 곧 헌법 위반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는 조항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연방 의회의 권한을 정한 헌법 8조 12항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다.

     

    ‘연방 의회는 육군을 소집하고 지원하는 권한을 가진다. 하지만 그를 위한 회계연도는 이년을 넘어서는 안된다.’

     

    상비군은 어느 나라를 가봐도 행정부에 속한다. 하지만 합중국 헌법은 육군의 소집과 유지를 입법부에 맡겼다. 게다가 이 년 이상에 걸친 군대 유지비의 계속적인 지출을 금했다. ‘이를 잘 살펴보면, 명백한 필요성이 없는 한 군대를 유지하는 것에 반대하는 주요 인물들에 대한 현실적인 보장이라고 여겨지는 배려인 것이다’라고 해밀턴은 8조 12항에 대해 쓴다.

     

    미국이 상비군을 금하고 있는 헌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일본인은 적다. 개헌파는 헌법 제 9조 2항과 자위대의 ‘모순’을 지적하여, ‘헌법과 현실 사이에 모순이 있을 때는 현실에 맞춰 개헌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상비군 규정에 대한 합중국 헌법과 현실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있으므로 그들은 개헌해야 한다고 미국 정부에 간언했다는 이야기는 필자가 보고 들은 것이 적은 까닭에 알지 못한다. 필자는 오히려 헌법 조항과 현실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사실이 미국의 민주제에 활력과 풍양성(豊穰性)을 불어넣어주고 있다고 이해한다. 미국 시민은 헌법 8조 12항을 읽을 때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러한 조항을 써넣었는가?’ 라고 건국 당시에 존재했던 통치 이념의 근원적인 대립에 대해 사량(思量)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해답 없는 물음에 똑바로 직면하는 것은, 미리 준비된 단일의 훈도를 정답으로 암송하는 것보다는 시민의 정치적 성숙에 있어서 보다 유용하다.

     

     

    상비군과 관련한 원리적 대립은 수정 헌법 제 2조의 무장권을 둘러싼 대립에서 재연되고 있다. 1789년, 헌법 제정 이년 후에 채택된 수정 헌법 2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잘 훈련된 밀리시아는 자유로운 국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므로, 인민이 무기를 보유하고 휴대할 권리는 침해받을 수 없다.’

     

    수정 헌법 제 2조의 문언을 확정했을 당시에 어떠한 의논이 있었는지는 소상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것이 국의 수중에 군사력을 남기고자 하는 지방 분권파와 군사력을 연방정부의 통제 하에 두고자 하는 중앙집권파 사이의 타협의 산물인 것만은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헌법 제정 시점에서 페더럴리스트들이 가장 염려했던 것은, 외적의 침입 못지 않게 국 정부와의 군사적 대립이었기 때문이다. 해밀턴은 확실히 ‘내전’의 리스크를 언급하고 있다.

     

    ‘각 주 정부가, 권력욕에 따라 연방 정부와 경쟁 관계에 서게 되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경향이며, 연방 정부와 주 정부가 어떻게든 다투게 된다면, 사람들은 (...) 주 정부에 반드시 가담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 마땅하다는 것은 이미 서술하였다. 각 주 정부가 (...) 독립적 군대를 소유함으로써, 그 야심을 증대시키는 경우가 생기기라도 한다면, 그 군사력은 각 주 정부에게 있어 헌법이 인정하는 연방의 권위에 대해 감히 도전하고 결국에는 그것을 전복시킬 만하다는 상당히 강력한 유혹이 되고, 그 야망에 상당히 커다란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될 터이다.’

     

    밀리시아를 국이 자기 재량으로 운용할 수 있는 군사력으로 수중에 넣고자 하는 지방분권파와, 될 수 있는 한 군사력을 연방 정부로 독점시키고자 하는 페더럴리스트와의 극한 긴장 관계 가운데 헌법은 기초되었고, 수정 헌법이 덧쓰여졌다. 원칙으로서 상비군을 갖지 않을 것, 군대의 소집, 유지의 권한을 입법부에게 부여한 점, 시민의 무장권을 인정한 점, 이런 사항들은 연방파 측으로써는 본의 아닌 양보였으리라. 연방파의 저항의 흔적은 가까스로 ‘잘 훈련된(well regulated)’과 ‘자유로운 국의 안전을 위해(the security of a free state)’라는 이중의 조건을 남기고 있다.

     

    밀리시아는 후에 National Guard로 이름이 바뀌었다. 일본어로는 ‘주 방위대州兵’로 번역되는데, 이는 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라파예트 장군이 모국에서 프랑스 혁명 당시 이끌었던 Garde Nationale에 존경을 표한 것이므로, 본래 뜻은 ‘국민 경비대’이다. 한편 무장한 시민들 자신은 지금도 ‘밀리시아’를 계속 참칭하고 있다. 2021년 1월 20일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는, ‘무장한 트럼프 지지자’의 난입에 대비해 ‘주 방위대’ 15000명이 배치된 것이 일본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그들은 ‘폭도와 병사’, 혹은 ‘데모대와 경관’이 아니라, 둘 다 주관적으로는 ‘밀리시아’였던 것이다.

     

     

    미국의 정치문화에서는 원리주의적인 수미일관성보다도, 그때그때의 상황에 빠르게 최적화하는 복원력(resilience)이 높이 평가받는다. 닭이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치문화의 형성에 미국이 건국 시점부터 이중의 통치 원리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부여되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트럼프 집권 이래 미국의 국민적 분단을 한탄하는 사람이 많은데, 현실은 미국은 건국 시점부터 통일 국가인가 연방인가, 둘 중 어느 쪽으로도 결정하지 않은 양의적 성격을 계속 지녀왔다. 그런 의미에서는 두 개의 통치원리 사이에 항상 분열이 존재해왔던 것이다. 미국의 정치적 분단은 하루아침에 시작된 이야기가 아니다.

     

    상하원으로 구성되는 입법부의 구성 또한 두 가지 원리 가운데 나온 타협의 산물이다. 하원 의원은 인구 비례로 결정되므로 하원의원은 ‘그 권한을 미국 국민으로부터 직접 도출해낸다’고 말해도 좋으나, 상원 의원은 각 주당 2명이 할당되어 있으므로, 국을 대표하고 있다. 일본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선거인단 제도도, 대통령을 뽑는 것은 결국 국이지, 국민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미국은 ‘통일 국가적 성격과 똑같은 정도로, 상당한 연방적 성격을 가진 일종의 혼합적인 성격’을 갖춘 국가인 것이다.

     

     

    그로부터 미국에서의 자유가 갖는 특수한 함의가 드러난다. 절대 자유주의자는 ‘리버테리안(libertarian)’을 자칭한다. 그들은 공권력이 사적 권리, 사유 재산에 개입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징병에 응하지 않는다(자신의 목숨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는 자신이 결정함), 납세도 하지 않는다(자신의 자산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는 자신이 결정함). 도널드 트럼프는 리버테리언이었으므로, 네 번에 걸쳐서 징병을 회피하였으며, 대통령 선거 때도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공언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한 인물이 대통령이 되어서, 공권력의 탑에 군림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공권력이 시민적 자유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미국 정치 문화의 전통의 한 갈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통치 하의 미국에서 COVID-19 감염 확대가 멈추지 않고서,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기술을 가진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감염자수와 사망자수 또한 세계 최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의료에 대해서도 공권력의 개입을 꺼리는 사람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트럼프주의자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책을 마치야마 도모히로가 지었는데, 이 미국 관찰기의 제목은 질병의 리스크를 어떻게 평가하고, 예방하며, 치료할 것인가라는, 원래대로라면 과학적으로 결정되어야 할 사항이 ‘자유인가 통제인가’라는 통치 원리의 선택이라는 차원에 봉착하고 만 미국의 특이한 풍토를 추측케 한다.

     

    감염병은 전 주민이 동등하고도 양질의 의료를 받는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는 한 종식될 수가 없다. 허나 그를 위해서는 공권력이 환자의 치료나 백신 접종 등 의료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의료를 상품으로 여겨, 돈이 있는 자는 의료를 받을 수 있지만 돈이 없는 자는 받지 못한다는 시장원리를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것이 의료 자원을 공권력이 자의적으로 재분배하는 사회주의적 ‘통제’로 비춰진다.

     

    그래서 자유와 평등은 사실 양립시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정치이념인 것이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의 표어에 익숙해져있는 탓에, ‘자유, 평등, 박애’가 한묶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평등은 공권력이 강력한 개입을 행사하여, 부유한 자가 가진 사적 소유의 일부를 빼앗고, 힘 있는 자가 지닌 사적 권력의 일부를 제한하여, 그것을 가난한 자, 약한 자에게 재분배하는 일 없이는 절대로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등을 실현시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어느 사람들은 자유를 잃게 된다. 그것도 그 집단에서 상대적으로 돈과 힘이 있고 보다 활동적인 사람들이 자유를 잃는다. 밀의 논점을 상기해보자. 평등은 ‘민중 가운데서도 보다 활동적인 부분’의 사적 권리를 제한하고, 사적 재산을 몰수하는 것으로밖에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활동적인 부분’은 밀에 의하면 명백히 ’자신들을 다수자로서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으므로 ‘활동적’이었던 사람들인 것이다. 평등은 ‘다수의 시민’의 자유를 공권력이 제약하는 도식으로밖에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에 대해 ‘다수의 시민’은 반대하는 것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8명의 자산이 가장 가난한 36억명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과 같은 액수다. 그 정도까지 부가 편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난한 36억명 가운데에서조차, 제프 베조스, 빌 게이츠와도 같이 자신은 ‘다수자’ 측에 있다고 믿고서, 공권력이 사적 권력을 통제하고, 사적 재산을 공공재로 대체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것은 부유한 트럼프의 지지기반이 ‘쓰레기 백인White Trash’으로 불리는 백인 빈곤층이었다는 점과도 통한다. 그들은 평등보다도 자유를 중시하는 정치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유주의’ 사상은 ‘독립선언’의 원류를 품고 있다. ‘독립선언’의 내용 중 하나인, 앞서 인용한 ‘저항권’을 보장하는 부분의 직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래의 진리를 자명한 것으로 믿는다.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어, 그 창조주로부터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권을 포함한 불가침의 권리를 부여받았다(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창조주에 의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여기에는, 평등은 모든 인간의 기초 조건이며, 미래에 달성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관념이 담겨 있지 않다. 정부는 생명, 자유, 행복 추구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창건된 것으로써, 평등의 실현은 정부의 몫으로 셈하지 않는다. 평등은 이미 창조주에 의해 실현되어 있다. 따라서, 정부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인민의 생명과 자유, 행복 추구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한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선언된 이후 노예 제도가 폐지되기까지 86년이 걸렸고, 공민권법이 성립되기 까지는 더욱이 101년이 걸렸으며, 그로부터 반 세기 이상을 거쳐, 아직까지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흑인에게 백인과 평등한 인권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평등의 실현은 미국 건국 당시의 아젠다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치문화는 아직도 계속 살아있다.

     

     

    글이 길어졌으므로 이제 마치기로 한다. 시민적 자유와 사회적 통제 사이의 갈등에 ‘최종적 해결’은 없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적절한 정도’를 찾아내는 경험지의 축적이다. 자유를 다루는 기술의 습득을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과 품을 들일 각오를 해야만 한다. 

     

     

    (2022-08-19 14:28)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번역 관련 기술적 후기】

    일본어 邦에는 지방과 나라의 의미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반면 한국어를 쓰는 한국은 중앙집권의 역사가 깁니다.

    게다가 邦을 쓰게 되면 聯邦을 쓸 때 邦자 앞에 聯자만 붙이면 되는 즉 ‘잇닿은 나라/지역들’이라는 뜻을 동시에 직관적으로 알게 될 수 있습니다.

     

    ‘국’이라는 번역이 어색하셨다면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립니다.

     

    그건 그렇고 글쓴이 우치다 선생님의 지력 앞에 후학은 삼가 옷깃을 여밀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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