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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받는 마인드를 해제하기: 합기도의 오의(奧義)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9. 16. 22:19
아이키도라는 무도(武道)를 가르치고 있다. 수련을 시작한지 반세기가 흘렀고, 가르친 지 30년이 지났다. 수백 명의 문인을 기르며 알게 된 사실은, 오늘날의 일본 사회가 ‘비(非) 무도적인 인간’을 양산하는 구조체라는 것이었다. 알아듣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조금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무도는 승패, 강약, 교졸(巧拙)을 겨루는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은 무도란 경기장에서 라이벌과 대치하여 승패를 다투고, 기량을 평가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축구나 복싱, 피겨스케이팅은 그렇다. 하지만, 무도는 본래 그런 것이 아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심사’받는다는 것은 ‘기선을 제압당하는後手に回る’ 것이기 때문이다.
‘기선을 제압당한다’ 함은 무도적으로 ‘뒤처진다’는 것인데, 그것은 승패를 다투기 이전에 ‘이미 지고 있음’을 뜻한다.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무도 수업의 최종 목표는 ‘천하 무적’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장(場)을 주재(主宰)’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작문(作問)한 난문에 답할 제, 그 옳고 그름에 대해 누군가에게 점수로 평가받는 입장에 서는 한, 우리는 계속 ‘기선을 제압’당하기만 하게 됨으로써, 이제 영원히 ‘공간을 다스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사람들은 각 개인이 결코 장을 주재할 수 없게 만드는 성장 과정을 거친다. 태어나자마자 줄기차게 자녀들은 상대적인 우열을 경쟁하면서 심사받는 데 익숙해져 있다.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자라왔다. 그래서, 문제에 답하고 채점을 기다리며, 그 점수에 따라 자원을 차등 분배하는 데 일조하는 삶의 방식 이외의 것이 이 세상에는 있다는 것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가에 기초한 분배’를 지구 탄생 이래 유일한 자연계의 법칙으로써 굳게 믿고 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아이키도 수련은 우선 ‘평가받는 마인드’를 해제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것이 참으로 어렵다. 발상의 근본적인 전환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초심자는 와자(技)를 걸 때, 상대의 반응을 순간 의식하고 만다. ‘이거 통한 게 맞습니까?’ 하고 상대에게 물어보고 만다. ‘5단계 평가로 치면 몇 점 정도입니까?’ 하고 상대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심사자’의 입장을 양도하고서, 상대의 ‘채점’을 기다리고 만다. 상대가 ‘시험 감독관’이고 자신이 ‘수험생’인 결정적으로 불리한 입장을 당연하다는 듯 스스로 나서서 채용해버리고 만다. 그 정도까지 그들은 ‘평가받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사실은 ‘와자가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여부 같은 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눈 앞에 문이 있고, ‘내 동선을 막고 있는 적이 있다’고 판단한 나머지, 어떻게 벽 너머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와자’를 곰곰이 사안(思案)해보는 인간은 없다. 단지 뚜벅뚜벅 걸어가 문손잡이를 비틀기만 하면 된다. 수련 때에 ‘이거 통했습니까?’ 하고 상대의 반응을 아뢰는 자는 ‘문손잡이 돌리는 법’의 교졸(巧拙)에 대해 문손잡이한테 ‘이렇게 꺾으면 몇 점이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요는 벽 너머로 넘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툇마루를 통해 빙 둘러 가도 되고, 벽을 무너뜨려도 되며, ‘벽타기’의 비술(秘術)을 구사해도 된다. 좋을 대로 하면 된다. 그것이 ‘선수 쓰기 / 장을 주재하기’이다. 이렇게 설명해도, 자못 알아주지를 않는다.
아무도 당신을 심사하지 않는다. 다른 문인(門人)과의 상대적인 강약이나 교졸(巧拙)을 논하는 일은 이곳에 발 붙일 수 없다. 자신의 신체를 적절히 기능케 하기 위한 판단은 오로지 당신의 신체만이 내릴 수 있다. 정 물어보고 싶다면 자신의 신체에게 물어보도록 하라. 필자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지만, 대다수의 입문자로서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인 것이다. 병이 깊다.
(2022-08-13 09:33)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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