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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이야기를 복잡하게 놔두는 것에 관해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9. 14. 22:19
‘복잡한 현실은 있는 그대로 복잡하게 다루며, 성급히 단순화하지 않을 것’ 이라는 명제는 필자가 경험적으로 학습한 신념 중 하나다. ‘그러는 게 이야기의 결론이 빨리 나오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복잡하게 해야 결론이 빨리 나온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은 수상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복잡한 게 나은 것이다. 다소 복잡한 논리이므로, 그 전모를 밝히고자 한다.
필자는 누구나 다 아는 병적인 ‘이라치イラチ’이다. ‘이라치’라는 말은 간사이 지방 사투리로 ‘안달복달’을 의미한다. 어디 나갈 때, 일행이 모두 집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시가 되면 내버려 둔 채 가버린다. 파티장에서 시간이 되면 내빈이 오지 않아도 ‘자, 건배 연습을 합시다’ 하고 모두에게 화답케 한다(내빈이 도착하면 ‘건배 의례에 흠결이 생기면 안되겠기에, 거듭 리허설을 해두었습니다’ 라고 양해를 구한다).
그렇게 매사 안달이 난 인간임으로, 당연히 말을 할 때도 최우선시하는 것은 ‘말을 진행시키는 것’이다. 꾸물꾸물 이야기가 정체되는 것도, 한번 논해놓고 나서 끝난 이야기를 재탕하는 것도 매우 싫어한다. 그런 인간이 긴 세월동안 대화와 설득의 경험을 쌓아나가며 내린 결론이 ‘이야기는 복잡하게 해야 결론이 빨리 나온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를 간단히 하는 것’과 ‘이야기의 결론을 빨리 내는 것’을 같은 뜻으로 여기고 있는데, 그것은 틀렸다. 말은 간단해지겠지만, 그 대가로 현실에 줄줄이 손 쓸 도리가 없게 되는 일이 차츰차츰 일어난다. 현실 그 자체가 복잡한 마당에 무리하게 서사를 간단히 바꿔놓으면, 서사와 현실 사이의 틈이 벌어질 뿐이다. 그 자리에서 일컫는 말이 아무리 깔끔하고 심플할 지라도, 현실과의 접점을 잃는다면, 그 ‘간단한 이야기’에는 참된 의미에서의 현실을 변성(變成)시킬 힘이 없다.
이렇게 써놓고 곧바로 전언 철회(前言撤回)하는 것도 좀 겸연쩍지만, 사실 ‘간단한 이야기’에 기반해야 현실은 변성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간단한 이야기’에 매료되고, 거기에 고착(固着)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간단히 한다는 것에는, 단순히 지적 부하를 경감해주는 차원을 넘어서, 확실히 어떤 종류의 실효성이 있다. 다만, 복잡한 현실을 간단한 이야기로 환원한 결과로 출현한 ‘현실’은 말하자면 온 힘을 쥐어짜내 무리하게 창출해낸 것이다. 그러한 ‘무리하게 바꿔낸 현실’에는 ‘현실 그 자체’일 필요성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유지력이 없다. 그 사이에 ‘무리함’이 화를 불러와, 내측에서부터 현실을 파괴해간다. 그리고, 형상 기억 합금과도 같이, 본래의 ‘복잡한 현실’이라는 본태(本態)로 돌아가버린다.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이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도적이 나온다. 그는 도로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오고가는 길손에게 그의 침대에서 쉬고 가라며 말을 건다. 그리고는 침대에 눕혀서, 상대의 몸이 침대 바깥으로 삐져나오면 그 부분을 절단하고, 반대로 침대 길이에 닿지 않으면 다리를 무리하게 침대 길이에 맞을 때까지 잡아늘였다.
복잡한 현실을 간단한 이야기로 전락시키는 사람을 보고있자면, 필자는 이 프로크루스테스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짓을 하는 자는 천벌을 받는다. 신화에 의하면, 영웅 테세우스가 등장해 프로크루스테스를 그의 침대에 눕혀 삐져나온 머리와 다리를 절단해버리고 말았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란 ‘무리하게 미리 정해놓은 스킴으로 몰아넣는 것’을 의미하는 비유로써 지금도 쓰이고 있는데, 그러한 무리한 짓을 한 대가로 자신의 머리와 다리를 절단당하고 절명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현실을 축소 왜곡하는 것도, 현실에 없었던 일을 덧붙이는 것도 모두 그만두는 게 낫다. 현실은 될 수 있는 한 현실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크기와 깊이, 난해함을 모두 수용해 다룬다. 분명히 까다롭기는 하다. 게다가 누가 하든지 간에 조금씩은 ‘더하거나 제하는’ 작위적 행위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하게 행하는가, 거리낌을 느끼며 행하는가 사이에는 천리의 경정(逕庭)이 있다.
‘이야기를 간단히 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간단한 것은 ‘문제를 없애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데도 ‘문제가 없다’고 잡아떼는 것이다.
이를테면 북방영토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의 의견은 상당히 엇갈려 있지만, 가장 틀어져 있는 점은, 러시아가 ‘북방 영토는 애초에 러시아 고유의 영토였으므로, 일본과의 영토 문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당사자 쌍방이 인지하고 있음으로 하여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지만, 당사자 중 한 쪽이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꺼내면, 문제는 미래 영겁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다.
나치는 기원전부터 계속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the final solution)’은 유대인을 ‘없애는’ 것이라는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문제의 당사자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문제는 없어진다.
제 3제국의 선전 부장이었던 요제프 괴벨스는 1941년에 ‘유대인 문제에 관해, 총통은 문제를 간단히 하기로 하였다’고 일기에 썼는데, 이는 ‘문제를 간단히 한다’는 구호 가운데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용례로써 기억해도 좋으리라 본다. 하지만, 역사의 교훈은 ‘최종 해결책’에 따라 이야기를 간단히 하려고 했던 탓에, 독일 국민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떠안아버렸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좀 과격한 사례였기는 하나, 문제를 간단히 하는 데에는 보통 ‘음모론’이 채용된다. 어찌나 찰떡같이 써먹을 수 있는지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정치적 난제에 이것을 준용하였다.
‘음모론’은 뭔가 ‘안 좋은 상황’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사악한 것의 간섭’으로 설명하는 태도를 이른다. 어떤 집단이 예로부터 ‘본래의 순양純良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대단히 풍요롭고 생산적이며 효율적이었지만, 외부로부터 이물(異物)이 혼입되었을 때에는 그것이 집단을 ‘오염’시켰기에, ‘본래의 모습’을 잃고 말았다. 따라서, 혼입된 이물을 특정짓고, 이것을 척결, 배제하면 집단은 원초의 청정함과 활력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하는 것이 ‘음모론’의 기본적인 화형(話型)이다.
우리 집단 어딘가에 ‘악의 장본인(author)’이 있다. 그것을 지명한 시점에서 작업은 거의 끝난다. 이제는 모두가 힘을 합쳐 그 ‘장본인’을 박해하고, 괴롭히면 된다. ‘누가 장본인인가’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범인 색출’에 조금은 머리를 써야만 하지만, 장본인의 지명이 끝나고 나면 행동대장만 나서면 되어서, 지적 부하는 제로가 된다. 따라서 전 세계 사람들이 이 ‘간단한 이야기’를 편애한다. 정치적 카리스마는 있으나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은 정치적 지도자는 거의 100퍼센트 이 서사로 정책을 실현시키려 든다.
이 경우, ‘장본인’은 반드시 ‘비밀 조직’이어야만 한다. 그 논리에 따르자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프랑스 경찰은 이러한 거대한 운동을 일사불란한 솜씨로 통제할 만한 실력을 갖춘 ‘조직’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어둠의 조직’이라는 것이다. 뭐가 어찌 되었든 ‘비밀 조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다음 문제는 ‘누구인가?’ 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템플 기사단, 영국 해적자본, 프로테스탄트... 여러 후보가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유대인의 세계 정부’가 ‘오서author’였다는 결론이 났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대인이 피차별 신분에서 해방되고 시민권을 획득하며, 정치, 경제, 언론 각계에 눈부시게 진출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목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에두아르 드뤼몽은 이렇게 썼다. “프랑스 혁명의 유일한 수혜자는 유대인이다. 모든 것은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유대인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다.” (<유대적 프랑스>)
어떤 사건의 수혜자가 그 사건의 ‘장본인’이라는 추론은 논리적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람이 불면 통발장수가 돈을 번다’는 사실로부터 통발장수가 날씨를 컨트롤할 수 있는 수수께끼의 힘을 갖고 있다고 추론하는 것 만큼 비논리적이다. 허나 이 음모론을 프랑스 독자는 쌍수를 들고 받아들여, <유대적 프랑스>는 19세기 프랑스 최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드레퓌스 사건은 이 황당무계한 음모론이 한 유대인 장교를 파멸시킬 정도의 현실 변성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준 것이다.
(2022-08-13 09:2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
【번역 노트】
□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For I testify unto every man that heareth the words of the prophecy of this book, If any man shall add unto these things, God shall add unto him the plagues that are written in this book: and if any man shall take away from the words of the book of this prophecy, God shall take away his part out of the book of life, and out of the holy city, and from the things which are written in this book.
(요한계시록 22:18~19)
□ 경정(逕庭): 정도의 매우 심한 차이, 출전은 장자 소요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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