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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에 저항하라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10. 17. 06:45
(소말리아 인권 문제 등에 관여하고 있는 비영리단체 ‘억셉트 인터내셔널’ 대표 나가이 요스케永井陽右 씨는 1991년 생, 와세다 대학 출신, 2021년 7월 저서 <공감이라는 병共感という病> 출간. - 옮긴이)
처음으로 나가이 요스케 군과 만난 것은 아사히 신문 온라인판에서의 대담이었다. 거의 3, 4년전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청년’이라 할 만한 이와 만난 느낌이 들었었다. 온라인판이었므로 1시간 반 정도의 대담 내용이 그대로 게재되었다. 그것을 다시 실어둔다.
나가이: 저는 직업으로서 테러 조직에서 손을 씻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 케어와 사회 복귀 지원 등을 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제 지원 분야에서의 대상자나 대상지에 관한 편향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난민이라든가 어린이 등, 그러한 문제가 되면 정서적인 공감을 이끌 수 있는 데 반해, ‘어른이면서 전직 테러리스트로 사람을 죽였다’ 고 말할라치면, 이게 참으로 정반대 반응이 나옵니다. 떠안고 있는 문제는 똑같은데도, ‘어째서 이런 놈이 아직 버젓이 살아있는가?’ 하는 여론이 형성되고 맙니다. 그것을 예전부터 문제의식으로써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지금 일본 사회를 보면, 공감이 굉장히 장려되고 있고, 저는 이 상황에 위화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시에, ‘공감’이 가진 결점을 고민해보면서, ‘애초에 공감할지 안할지의 여부는 자유이지 않은가’ 라는 데에도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공감하지 않을 자유’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가 내면의 숙제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공감하지 않을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공감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겨나게 된다면, 그때 일어나는 문제들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저는 ‘공감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인권은 있는 것이니, 테러리스트로서 살인을 범한 사람이라도 지원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명제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칸트 윤리학을 연구하고 있는 미코시바 요시유키 선생과 대화했을 적에, 미코시바 선생은 “이성과 개개인이 갖고 있는 윤리, 도덕은 별개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렇구나, 하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 뒤로 로버트 캠벨 교수(미국 출신 와세다대 일문학자로 방송에도 다수 출연 - 옮긴이)와 대화했습니다만, “나가이 씨는 <공감 받지 못함>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만, 도리어 저같이 게이임을 공언하는 인간에 대해, 당사자도 아니면서 <공감합니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그렇게 안이한 공감 자체도 문제를 일으킵니다”라고 지적을 받은 뒤, 이 또한 일리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우치다 선생님께, 이 ‘공감하지 않을 자유’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여쭈어 보고자 합니다.
우치다: 대단히 본질적인 질문을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나가이 군 같이 젊은 분들은, 그런 식으로 문제의식을 품으면서 괴로워하게 되는 일이 왕왕 있습니다. 사물을 원리의 문제로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나가이 군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이념상으로는 모든 사람들을 대등하게 지원해야만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사람은 지원하겠지만 이 사람은 안된다>고 선별한다. 무엇이 정의인가?’ 하는 식으로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니라는 겁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짜임새를 만들 적에, 우리는 우선 극단적인 원리를 양측에 두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원리라는 것은 결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작 개념인데, 말하자면 사고를 위한 장치인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양극단의 이념 사이에 있습니다. 인간 한 명이 쓸 수 있는 시간이나 체력, 돈, 사회망에는 개인적인 한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중의 자원 이외에는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디에 투입할까 하는 우선 순위를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분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원 분배의 우선순위의 문제에서는, 만인에게 온당하며 만인이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분배해도 반드시 불만이 남습니다. ‘해야 할 것을, 해야 할 순서로 행했으므로 퍼펙트하다’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래도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구상 70억 명의 사람에게 균등하게 존경심을 갖는다든지, 균등하게 지원할 수는 없습니다. 우선 손 닿는 곳부터 지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손 닿는 곳부터 지원한다’는 것은 올바름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밖에는 도와주지 않는다. 싫어하는 사람은 무시한다’고 공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뭐가 어찌 되었든 비상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한테 ‘당신은 틀렸다’고 비난하는 일을 저는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비상식이며,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고 생각은 하지만, ‘틀렸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어쩔 수 없다고 여깁니다. 인정머리가 없다든가 국량이 좁다는 것은 분명히 사람이 덜 된 것이지만, 질타나 처벌의 대상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동시에 지원할 정도의 힘이 없고, 가까이 있는 사람만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는 것에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래도 그걸로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00% 잘되었던 일도 아니고, 100% 실패였던 일도 아닙니다. 양극단 사이에 펼쳐진 회색지대 속에 있으면서, 자신의 역량에 부합하는 일을 해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가이: 으음, 그렇군요. 이성이나 인권이라는 ‘원리’가 아니라, ‘인정머리’나 ‘상식’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는 말씀이군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를테면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공 차러 나가자’고 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으로는, ‘자리에서 수다를 떨자’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두가 자유 의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교실에서 외톨이가 되는 사람이 남는 경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그 외톨이가 ‘외롭지만 아무와도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문제의 해결은 어느 측에서 해야 하는 걸까요? 모두가 ‘공감하지 않을 자유’를 갖고 있는 가운데 문제가 홀연 돌출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우치다: 그 ‘외톨박이’란 것은, 나가이 군의 경우 누구도 동정해주거나 공감해주지 않는 전직 테러리스트 같은 것이겠군요. 확실히 ‘테러리스트에게는 공감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정상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외톨이같이 힘들어 보이는 사람을 보면 손을 내밀어주어버리는 사람도 또한 인정상 똑같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금세 손을 뻗어 잡아주고 마는 것’이 윤리의 가장 기초가 되는 요소라고 봅니다. ‘측은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가이: 측은지심 말씀이시죠.
우치다: 측은(惻隱)이란, 이를테면 어린 아기가 엉금엉금 기어가다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에, 재빨리 손을 내밀어 도와주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아기를 구해준다면 나중에 그 부모로부터 감사받을 수 있다든가, 아니면 도와주지 않을 시 주위로부터 ‘몰인정하다’고 손가락질 받을지도 모른다든가, 그러한 계산을 하기에 앞서 생각할 틈새도 없이 손을 뻗게 되었다는 게 측은입니다. 어느 이해 관계도 고려하지 않고서, 지원을 요청하는 타자의 호소에 신체가 자동적으로 반응해버리고 맙니다. 그것이 사람으로써의 기본이라고 <맹자>에 쓰여져 있습니다.
이때, 재빨리 손이 나간 것은 상대가 무력한 아기이기 때문이지요. 만약 뻣뻣한 신체를 가진 어른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자연스럽게 손을 뻗을 수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물에 빠지다니 바보같은 놈이군. 어이 누가 한가한 놈이 저기 가서 좀 구해줘라, 정도의 리액션을 취할지도 모릅니다. 측은지심이 발동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조건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자신이 보았을 때 약자일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힘이 닿는 범위 내에서 구할 수 있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갖춰지면 측은지심은 자동적으로 발동합니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보다 강자라든가, 아무래도 자신의 힘으로는 구해줄 수 없을 만한 상황에는 ‘멋모르게 손이 나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가이: 그것은 ‘본능적인 반응’ 같은 것입니까? 그렇게 순간적으로 머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재빨리 몸이 움직이는 일은 확실히 있을 법합니다.
우치다: 나가이 군의 경우로 보면, 눈 앞에 있는 테러 조직 탈퇴 청년을 보았을 때, 그가 ‘우물에 빠지기 일보 직전의 아기’로 보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손을 뻗어 내밀어줍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눈 앞에 있는 사람을 지원하고자 하는 동기가 일어날지 말지의 여부는, 그가 ‘우물에 빠지기 일보 직전인 아이’로 보이느냐 아니냐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나가이 군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높은 능력으로 인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합니다. 소말리아 해적이 갑자기 손에 총을 들고 나타난다면, 공포나 혐오감이 먼저 들게 됩니다. 그것이 ‘우물에 빠지기 직전의 어린아이’로 보인다는 것은, 상당히 예외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가이: 그렇다면 만약에, 교실에 외톨이로 남아있는 사람이, 자신이 보았을 때 약자도 아니고, 자신의 힘이 닿는 범위 내에서 구해줄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닌데, 정말 만약에 그가 거짓말쟁이이고, 좀도둑질도 하며, 사람도 죽이고 해서 누구도 ‘공감’을 해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측은지심’은 발동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신가요. 거꾸로 말하면, 자신이 보았을 때 약자이기도 하고 자신의 힘이 닿는 범위 내에서 구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점점 들게 되면, 측은지심은 좀 더 많이 발동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우치다: 그것은 ‘감정의 그릇’의 크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한 명이 삐죽 하고 튀어나와 있는 걸 보아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 사람이 있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람은 공리적인 계산을 배제하고서, 문득 ‘같이 놀지 않을래?’ 라든가 ‘너는 어째서 맨날 혼자 있어?’ 하고 말을 겁니다. 그런 것들은 상대방에게 금세 전해질 겁니다. 작위적인 것이 아니니까요. 외톨이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품고 있는 아주 사소한 작위성이나 계산속을 느끼고서 마음을 닫아버리니까 말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꾸밈 하나 없이 손을 내밀어 주면, 바로 허를 찔리고 맙니다.
사람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자는, 상대방이 아무리 괄괄한 겉모습의 공격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 마음 속에 ‘허약한 아기’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 ‘허약한 아기’가 겁을 먹고 있다면, 선뜻 손을 내밀게 됩니다. 그것이 ‘사람을 보는 눈’이라고 생각합니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상처입거나 무너지기 쉽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음은, 그 사람이 가진 감정의 그릇 크기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정다감은 선천적인 것입니다. 시력이 좋다든가, 키가 크다든가, 후각이 예민하다든가 하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선천적인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감정의 국량이 넓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슥 손을 내밀 때의 심정이란, 소위 ‘공감’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가이: 그게 공감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치다: ‘감정의 그릇이 크다’는 말로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요. 노력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고, 의무감 때문에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따르다 보니, 선뜻 손을 내밀게 되는 거니까요. 감정의 그릇에는 크고 작음이 있어서, 날 때부터 거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감정의 그릇이 작은 사람한테 ‘그릇을 키우라’고 말해도 무리이고, 그릇이 큰 사람에게 ‘그릇을 작게 하라’고 해도 무리입니다. 한 명 한 명, 자신의 감정의 그릇에 따라, 상응하는 바를 행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가이: 그러면 만약에, 절망적으로 보이는 홈리스 분과 조우해 도덕심을 시험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자기가 만약 감정의 그릇이 작다면 그 자리에서 반응도 없이 지나치고 만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냥 지나쳐버려서 조금 찝찝하지만, 실제로 행동해서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고민이 듭니다. 자신의 감정의 그릇이 작으니 어쩔 수 없다, 감정의 그릇이 큰 사람이 뭔가 해주면 된다, 정도의 기분으로 가면 될까요. 생득적인 것이므로 작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넘기는 것도 뭔가 석연찮습니다.
우치다: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 가운데 솟아오르는 내발적인 것이므로 머리로 제어할 수는 없습니다. 머리로 생각한 것은 ‘이러이러한 일을 해야만 한다’는 문형을 취합니다만, 감정의 움직임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이 들고 보면 이미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감정의 그릇으로 결정됩니다. 이를 통해 개개인이 가진 윤리성의 우열을 논해도 소용없습니다. 누구나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그 능력의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싫고, 무슨 일이 있든지간에 바로 행동에 옮길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면, ‘어려운 사람을 보면 바로 도와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기성품의 윤리를 겉에 두르는 방편도 있습니다. 종교나 정치 이데올로기같은 시중의 것들을 겉에 두르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교도가 된다든지, 인권 운동을 한다든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든지... 하는 ‘이타적인 행위’를 당위로 내건 구조체 속에 투신합니다. 그런 구조체에는 사람을 구제하기 위한 윤리나 작법(作法)이 정해져 있습니다. 주의나 신념의 근거가 되는 체계적인 윤리가 있고, 구체적인 규칙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충분한 성공 사례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외부 장착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많고 효과가 있기도 합니다.
다만, ‘외부로부터 끌어온 측은지심’에는 여러가지 무리가 따릅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교도 애초에는 약자를 향한 사랑에서 시작했지만, 그리스도교의 이름 아래 이제까지 많은 사람이 살해당했습니다. 순교한 사람도 있고, 배교자, 이교도로서 살해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역사적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주의도 그렇습니다. 피억압자에 대한 연민과 공감에서 시작한 정치사상임에도, 마르크스주의의 이름 아래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습니다.
‘만인을 사랑한다’는 윤리는 개인이 내발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성품’을 차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외부로부터 가져온 윤리는 점점 녹이 슬게 됩니다. 내발적인 윤리는 ‘사람으로서’라는 구속이 있지만, 겉으로 두른 윤리는 감정이나 신체에 의한 규제를 받지 않고서 폭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가이: 제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은, 전 인류에게 ‘인권 침해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주지시키고, 어떻게든 그것이 실현될 수 있도록 공적 영역도 포함하여 함께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인권 교육이라는 말은 뭐랄까 굉장히 피상적입니다만, 외장 부품을 딸칵 하고 장착하는 케이스로서의 ‘인권 교육을 철저히 하기’는 적합할까요?
우치다: 지금 나가이 군이 말한 ‘교육’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상정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인생이란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권 교육을 학교에서 가르치라고 요구하는 부모가 혹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곤란합니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자녀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가풍’이니까요. 자녀는 부모가 하는 것을 따라하며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을 배웁니다. 그것은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습니다.
예전에 ‘자유와 민주를 위한 학생 긴급행동’에서 활동했었던 오쿠다 아키 군과 만나서 이야기했는데, 거의 절반 정도는 그의 아버지 이야기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오쿠다 도모시 씨라는 목사인데, 홈리스 지원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입니다. 부친이 집에 얼굴도 모르는 아저씨를 데려와서는 ‘이 사람, 저기 공원에서 노숙하고 있던 사람인데,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묵기로 했다’ 는 상황이 일상이었던 집에서 그는 자랐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사람을 지원하는 것이 당연했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어떤 이론적인 기반이라든가, 이데올로기를 동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가이 군도 가풍 덕을 본 것은 아닐까요?
나가이: 가풍 말씀이시죠... 말하자면 저는 정 반대로, 어렸을 때부터 모친에게 곧잘 맞았고, 물건도 많이 날아다녔는데요, 그때 ‘이 집구석에서는 힘을 가진 녀석이라면 사람을 막 팬다든가 물건을 집어던져도 되는구나’ 하고 생각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어서 맞게 되자니 ‘잘 살펴보면 몸집도 작고 딱히 싸움을 잘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모친을 때리게 되었습니다. 어쩔 때는 온통 멍투성이이기도 했어요. 부친은 단신 부임이었구요.
우치다: 제 예상, 완전히 빗나갔네요(웃음).
나가이: 부친이 단신 부임지에서 돌아오게 되면 모친이 없던 일까지 지어내서 전부 일러바치고, 그 보고를 기반으로 부친이 호통을 치는 겁니다. 물론 저도 거기에 반항합니다. ‘이런 어른이 되면 끝장이다’ 는 식의, 뭐 반면교사로 치는 거지요. ‘누가 돈을 벌어서 널 먹여살려주냐!’ 는 말을 끝없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문제아인 것은 확실했습니다만.
우치다: ‘누가 널 먹여주고 재워주는 줄 아느냐’ 라는 말은 부모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예요. 저 자신은 부모님과 싸워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왠지 이 사람들과의 사고방식이나 생활 태도에 맞출 수 없겠다는 직감이 들어 잽싸게 가출해버렸으니까요.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설득당하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서로 얼굴 붉히면 곤란하게 되니, 집을 나간 겁니다.
윤리를 몸에 익힌다는 것은, 실제로는, 그 규범에 따라 자연스레 살고 있는 사람을 아주 가까이에서, 그 헛기침 소리까지 들으며 배우지 않고서는 안 될지도 모르겠어요.
작금의 학교 교육 현장에서는 ‘도덕’이 과목화되어 있는데, 가르치는 선생 자신이 도덕적인 사람이고, 그 일거수일투족으로부터 ’사람이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가 배어나온다면, 도덕 교육도 확립이 될 것입니다만, 가르치는 선생 자신이 특단적으로 도덕적인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교과서를 통해 도덕을 가르치는 일은 불가능하겠지요.
나가이: 그러니까 ‘테레사 수녀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라고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도덕이나 윤리를 가르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시군요. 확실히 테레사 수녀를 아무리 흠모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의 도덕성의 정도와는 크게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치다: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뭐, 개중에는 미담을 읽고 나서 스위치가 켜지는 사람도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요. 인륜이란 역시 살아 있는 사람을 목도하고서, 거기에 감화되는 것이니까요.
나가이: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정말로 ‘인권’이라는 개념을 바깥으로부터 끌어들여 온 타입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 1,2학년 때, 평화학 수업 비슷한 것을 들었습니다만, 그 시간에 생각하기를 무엇이 행복인가, 타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같은 것들은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진부한 얘기지만, 정의나 올바름에는 각자 개개인의 상대적인 차이가 있다고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원천으로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았는데, ‘아 맞다 맞다. 인권이란 게 있구나, 모두 찬동해 줄 뿐 아니라 보편성도 높지 않은가’ 하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보편성이 높다는 게 무슨 얘기냐면, ‘인권을 현저하게 침해받고 있다면, 이는 문제다!’ 라고 당당히 모두에게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저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인권이랄까, 권리를 중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만, 이는 명백히 ‘외부 장착’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치다: 인권 원리주의가 되어버린 거군요.
나가이: 그래서 홈리스 분이 실제로 눈앞에서 힘들어하고 있을 때, ‘일시적인 케어만으로 해결이 되는 걸까’ 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장기적인 케어를 하려고 보니, 500명 정도의 홈리스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데 생각이 미쳐, 결국 도망치듯 자리를 뜨고 맙니다. 저는 이것이 부끄럽습니다.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하고 말예요.
우치다: 그런 경우에 ‘홈리스를 지원하는 것은 정부의 일이지. 그래서 세금을 내는 거고’ 라고 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이것 참 난감하군. 자신이 뭐라도 해주어야 맞는 것이기는 하는데, 바빠서 그만...’ 하며 내심 갈등을 품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요. 저는 그래도 괜찮다고 봅니다. 그 자리에서 지원하는 일은 하지 못했지만, 잘 생각해 보면 만사 제쳐 두고 지원할 만한 일은 아니잖은가... 하고 갈등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며, 인간은 그렇게 윤리적으로 성숙해 나가는 것이니까요.
제 철학 스승은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분인데요, 레비나스는 사회적 공정의 실현을 목적으로 그것을 정부에 전면 위탁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스탈린주의 하의 소련을 예로 들자면, 사회적 정의를 실현할 책임과 권한이 전부 국가에게 부여되었습니다.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할 의무를 면제받았으며, 주체적 판단으로 사회 정의를 실현할 권리 또한 박탈당했습니다. 그래서 눈 앞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정부에 고하기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하기만 하면 됩니다. 자신이 희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탈린주의는 선의에 기반했지만, 윤리적으로는 퇴폐했다고 레비나스는 말합니다. 정의나 평등의 실현을 국가가 떠맡는 시스템 안에서는 시민들이 도덕적으로 처신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세상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세계와 같습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굽어보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포상을,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처벌을 틀림 없이 부여하는 시스템에서는, 인간은 선행을 한다든가, 악행을 벌하려는 인센티브가 사라지게 됩니다. 굶는 사람이 눈 앞에 있어도 ‘하느님이 어떻게든 해 주니 괜찮다’가 되고, 눈 앞에서 어떠한 부정이 행해져도 ‘악인은 곧장 하느님이 벌하므로,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가 되어버리니까요. 공적인 구조체나 초월적인 존재가 개인을 대신하여 정의와 자애를 실현시켜주는 사회에서는, 인간은 그것을 자신이 떠맡아야 할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인권이 지켜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만, 공적 기관에 의해 인권이 완전히 지켜지는 사회에서는, 개인은 타인의 인권을 배려할 의무를 면제받습니다. 인권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어져버립니다. 그 역설 또한 염두에 두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나가이: 확실히 저도 ‘갈등하고 있는 편이 더 진지하지 않나’ 하는 것은 아무튼 이해하는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아무리 갈등하더라도 문제는 계속 그 자리에 남아있습니다. 그 문제를, 저는 어떻게 다스려야 좋을지 생각해도 역부족입니다. 백년 천년이 걸려도 잘 풀릴까 말까 하는 거죠. ‘한 걸음씩 나아지기만 해도 좋지 않은가’ 하는 소리도 듣습니다. 대단히 이해하기 쉬운 반면, 사회가 진보하는 데에는 천년이 걸리는 판국에,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어’ 라고 마무리짓게 되는데, 저는 그게 납득이 안됩니다. 뭐가 괜찮은 거냐? 는 생각이 솔직히 듭니다.
우치다: 아니아니, 마무리지어서는 좋지 않습니다. 갈등이라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의미이니까요.
나가이: 하지만 아무리 갈등한다고 해도 실제로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합니다. 지금 여기서, 그 문제를 해결할 방도를 모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치다: 이건 소크라테스가 말한 건데요, 우리는 그 해법을 알고 있는 것은 ‘문제’로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해법이 아무리 생각이 안 나는 것도 ‘문제’로서 의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해법을 아직 모르지만, 앞으로 시간을 들여 씨름해 나가면 언젠가 해법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나가이 군이 어떤 것을 ‘문제’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해법에 손끝이 닿을 것 같다는 실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해야 풀 수 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경험을 쌓아나가면, 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가이 군이 홈리스를 보고서 갈등하는 것은 ‘자신이 가진 힘의 범위 안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해결의 실마리가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해결의 가능성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애초에 시야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정말로 무력한 인간은 자신을 ‘무력’하다고조차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다소간 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가이 군이 앞으로 힘을 키워나간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감적으로는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떤 힘을 기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나가이: 소말리아는 당시, ‘유례가 없는 인류의 비극’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동시에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로도 알려졌습니다. 따라서 특히 일본 같은 곳에서는 소말리아 문제 같은 건 역부족이라고 하면서, 이 문제에 관해 상담을 하러 간 어른들에게 ‘영어를 배워라, 전문 지식을 배워라, 10년 정도는 경험을 쌓아라’ 등의 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내심 ‘그럼 나는 10년 동안 소말리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애초에 어른들은 위험하다, 돈이 안된다 등 말만 앞서니까요. 그래서 결국 얻은 대답은 태도 문제 뿐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이른 것입니다.
우치다: 개인의 역량에는 한계가 있으니, 어느 부분에서는 절충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목숨을 잃으면 애초에 다 허사로 돌아가니까요. 만약 나가이 군이 이 세상에 작게나마 적선을 하고 싶다면, ‘오래 사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일이랍니다.
나가이: 갈등을 겪어가며, 좌우지간 매 순간 베스트를 다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문자 그대로의 베스트 말이예요. 그래도 실제로는 이게 말이 되겠는데 싶기도 합니다. ’그럼 지금 이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권 침해와 분쟁을 없애보아라’는 말을 들어도, 현실의 장벽에 부끄러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부끄러워하면서도 조금씩 앞을 바라보며 베스트를 다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까 하신 얘기 말씀인데요, 우치다 선생께서 말씀하신 ‘감정의 그릇’이란, ‘사람을 보는 눈’, ‘사물을 보는 눈’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는데요, 그것은 이성과는 다른 것입니까?
우치다: 이성과는 달라요. 역시 ‘감정의 그릇’이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신체 조건 같은 것이니까요.
나가이: ‘감정의 그릇’의 크기란, ‘외부 장착’이나 가풍 이외에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까? 외부 장착이 싫다든가 맞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가정이 붕괴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만.
우치다: ‘이 사람 무지하게 그릇이 크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 곁에 가서, 제자로 들어간다든가 친구가 되면 되지 않을까요. 자신의 그릇을 조금이라도 키우고 싶다면, 실제로 그릇이 큰 사람과 친해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릇이 큰 사람은 이런 호흡법으로 호흡하는구나’라든가 ‘이렇게 코를 푸는구나’ 라든가 말예요. 가까이에서, 그 사람의 행동거지나 말버릇을 아주 가까이에서 느끼고서 모방하는 겁니다. 그것은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거예요.
나가이: 그럼 우치다 선생님은 어떻게 배우셨을까요.
우치다: 아이키도 스승 다다 히로시 선생과 철학 스승 에마뉘엘 레비나스 선생에게 사사해서 그리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두 분 모두 스케일이 큰 분입니다.
나가이: 그럼 이번에는, 집단적인 지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치다: 캐주얼로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웃음). 이 세상에는 감정의 그릇이 이렇게 큰 사람이 있구나 하는 것을 나가이 군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사람을 보고 나서 ‘나도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니까요.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육상 경기에서도 예전에는 100미터를 9초대에 주파하는 것은 인간한테는 무리라고 했습니다만, 한 사람이 9초대를 내면, 그런 기록을 내는 사람이 속속 등장하잖아요. 높은 기량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량(最良)한 일은 ‘인간은 여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서 ‘그럼 나도 할 수 있겠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나가이 군이 하고 있는 일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가이 군을 보고서, 이제 아프리카나 아시아 지원에 나서는 젊은 사람들이 하나둘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가이 군이 ‘해냈다’는 것을 봤으니까요. ‘이런 일을 해도 성공할 수 있구나. 하니까 되는구나’ 하는 걸 알게 되면, 추종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나가이: 다시 말씀드리지만, ‘공감’과 ‘측은지심’의 다른 점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몇 년 전 터키 해안에서, 3살 시리아 난민 남아가 사체로 떠오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전 세계가 충격을 받았습니다만, 이는 측은지심이었습니까?
우치다: 어느 정도는 그렇지요. 어린 아이였으니까요. 머리칼이 얼마 없는 대머리 아저씨였다면 아마 그 정도까지의 반향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포유류로서 우리에게는 본능적으로 ‘동종의 유생(幼生)을 보면 지원하라’는 지시가 각인되어 있습니다. 사자조차 새끼고양이가 다가오면 젖을 물린다지요. 아기는 귀엽습니다만 그것은 귀엽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귀여우니 주위에서 지원을 받습니다. 아기를 보고서 모두가 ‘뭔가 해주고 싶다’고 느끼는 것은 본능적인 것이예요. ‘측은지심’이란, 상대가 고양이나 개여도 발동합니다. 그 점이 ‘공감’과는 다릅니다.
나가이: 공감이라는 것에는 ‘의식’같은 것이 들어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본능이나 조건반사같은 게 아니라요.
우치다: 그렇다고 봅니다. 공감은 본능이나 조건반사가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과 공감하고 싶다’는 것은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로 타자와 마음이 통했는지의 여부는, 자신이나 상대 아무도 확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감이나 이해를 베이스로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일은 위험하다고 저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공감도 이해도 할 수 없지만, 눈 앞에 쩔쩔 매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도와준다’는 것을 규칙으로 채용하는 것이 아무래도 범용성이 높고, 일을 그르칠 확률이 적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으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공정한 사회, 폭력에 굴한다든가 굴욕감을 맛보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고 보면, 확실하게 ‘측은지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맹자 역시 ‘측은지심은 인의 단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출발점인 것입니다. 거기서 끝내면 안됩니다. ‘아기처럼 귀엽지 않은’ 타자를 지원하는 일은 본능에만 맡길 수 없습니다. 좀 더 이론적인 것, 제도적인 것으로 보강해서 만들어나가야만 합니다. 발판을 마련해야 해요.
나가이: 발판을 마련하려고 이런저런 것들로 보강함에 있어서도, 가장 밑바탕에 있는 것은...
우치다: 측은지심이지요.
나가이: 그렇지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기능적인 점으로 말하자면, 기분적인 ‘공감’이라는 것은, ‘불쌍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정도 선에서 끝난달까. 우치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측은지심’은, 액션까지 포함한 개념이라고 생각됩니다.
우치다: 그렇습니다. 집단은 ‘약한 자’를 서포트해주고 도와주는 구조를 하고 있을 때 가장 높은 기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강자만으로 연합을 만들어, 약자를 배제해보면 알게 됩니다. 그런 집단은 바로 소멸합니다. 누구든지 때로는 병이 들고, 상처입으며, 나이를 먹으면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거치적거린다’라며 찬밥 취급하면, 집단은 점점 빈약해지고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집단이건 개인이건 약자를 지원하는 시스템을 빌트인하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습니다. 약자를 지원하는 시스템을 착실히 정비하고 있는 집단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강합니다.
나가이: 원리로서 ‘측은지심’이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선상에서,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치다: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가까운 주위밖에는 공감을 갖지 못하는 상태로부터, 다른 지역의 멤버가 된다든지, 국민국가의 성원이 되는 등, ‘동포’의 범위를 점점 넓혀 나갑니다. 시간을 들여 그것을 조금씩 키워나가면 됩니다. 최종적으로는 ‘생명이 있는 것 모든 것이 동포’라 하는 지점까지 나아가면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까지는 힘듭니다. 하지만 목표는 그렇지요. 계속 걸어나가다가 목숨이 다한다 해도 상관 없지 않겠습니까.
나가이: 우치다 선생님께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우리는 ‘공감’을 잘하지 못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측은지심은 오늘 처음 알게 되었지만, 공감은 상당한 사회적 키워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치다: 저는 ‘공감’이라는 단어에 경계심을 품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 사회는 ‘공감 과잉’ 사회가 되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견고하고 동질적이며 집합적인 공감 같은 것을 만들어놓아서, 외부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나가이: 말하자면 ‘에코 챔버’, ‘필터 버블’로 일컬어지는 현상이군요. 저도 완전히 동감하는데, 이건 확실히 기분이 나쁩니다. ‘공감에 저항하라’ 연재를 쓰며 다다른 또 한가지의 문제의식이기도 했습니다.
우치다: 공감을 강제해버린 탓에, 오히려 개인이 원자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에 대학에서 학생에게 레포트를 쓰게 하니까, 두세 명이 ‘저는 커뮤장애 입니다’라고 썼습니다. ‘커뮤장애’라는 말은 젊은 세대들이 많이 쓰는 말 같아 보이는데, 말하자면 다른 학생에게 높은 수준의 공감을 느끼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학생들이란 곧장 ‘꺄-! 맞아맞아!’ 라면서 격하게 끄덕끄덕하고, 뛸 듯이 하이터치하지요. 옷이 예쁘다든가, 어느 케이크점이 맛있다든가 하는 정도만으로도요. 과잉 공감을 하는 척합니다. 아무래도 위에서 말한 자칭 ‘커뮤 장애’ 학생들은, 그것의 불가능함을 자신의 사회적 능력의 결여로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높은 수준의 공감은 자신에게는 불가능하다. 공감의 서클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즉, 꺄-! 와 폴짝폴짝을 ‘공감하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위적인 공감의 서클 안에 들어가 있는 학생들도 한 사람 한 사람은 상당히 고독하지 않겠나 합니다. 이러저러한 연기를 하지 않으면 동료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말입니다.
제 친구가 대학에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의 비밀’이라는 테마로 학생들에게 익명 설문조사를 했는데, 100명 중 15명 정도가, ‘지금 사귀고 있는 친구가 싫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왠지 알 것 같다는 기분이 듭니다. 작은 집단 속에서 ‘연기적인 행동’을 강제받고, 어떤 화제가 되더라도 ‘그래그래 하고 수긍하며, 100% 공감과 이해를 표해야만 껴준다면 심리적으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겠다고 봅니다.
여대생들만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아저씨 아줌마들도 거의 똑같지 않나 해요. 내심 깔본다든지, 싫어할지라도 표면적으로는 공감을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한 무리에서 소외되는 상황은 꽤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때때로 ‘저기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라든가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를 말할 수 있는 게 커뮤니케이션으로서는 건전하지 않겠습니까. 딱히 온갖 것에 동의하지는 않아도 상관 없지 않습니까. 중요한 점만 대체로 일치한다면, 충분히 일은 돌아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이해나 공감은 불가능하지만, 이 사람은 약속은 지키고 정해진 규칙은 따른다면, 함께 팀을 이뤄 상당히 커다란 작업도 협력할 수 있습니다. 100% 공감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안하겠다 하는 것보다, 말끔히 공감하지는 못해도 함께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쪽이 저는 좋습니다. ‘이런 룰로 합시다’ 라는 컨트랙트(계약)를 체결하면 그것에 확실히 따르는 사회성이라는 게, 끈적끈적한 공감보다도, 집단으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감이나 이해는 타자와 협동하기 위한 절대 조건은 아니예요.
결혼도 그래요. 결혼이 100% 공감과 이해 위에 구축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한번 사소하게 삐끗해버리면 ‘아, 우리 이런 사이 아니었나 봐’ 라는 생각이 들면서 바로 이혼해버리니까요. 그런 사이가 있을 리가 있겠어요! 저는, 부부간에 체결한 계약은 지킬 것을 배우자에게 요구하지만, 아내에게 ‘전면적인 공감’따위는 바라지 않아요. 저같이 이상한 남자를 ‘이해해 주시게’ 라고 말하는 건 후안무치하니까요(웃음).
나가이: 컨트랙트로 합의를 형성하고,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생각합시다, 라는 말씀이시군요. 저는 애초에, 집단 내부의 합의 형성은 ‘공감하지 않을 자유’가 있는 이상, 법적인 규범 내에서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를테면 ‘인권은 권리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의무적으로 모두가 잘 존중합시다’ 라는 식으로요,
그래도 역시, 정도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 함은, 시민 사이에서의 바텀업으로 합의형성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라는 식으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바텀업 식으로 합의형성하기 위한 열쇠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치다: 그게 가능하다면 인류는 완성의 영역에 도달한 거겠지요. 그렇게 일찍 뭐가 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단지, ‘합의형성을 해두는 게 낫다’에 대해서는 합의형성을 취하는 게 좋습니다. 대화가 불가능한 것보다는 대화할 수 있는 게 좋습니다.
각자의 입장은 있겠지만, 합의나 대화를 위해서는 일단 자신의 입장을 벗어나봅니다. ‘집단 전체로서는 무엇이 가장 좋은가’에 관해, 모두의 지혜를 짜냅니다. 그러한 합의형성 훈련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합의형성이란 ‘누군가 올바른 의견을 말하고 주위의 인간을 설득해 그 의견에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모두가 똑같은 정도로 불만족스러운 답을 내는’ 것입니다. 전 구성원이 동등한 정도로 불만스러운 것이 ‘탄착 지점’입니다. 그것을 착각하고서는, 합의형성이란 것을 ‘전원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Win-Win’은 무리예요. 그런 기적적인 해답은 보통은 없습니다. 합의형성이 우선 목표로 하는 것은 ‘모두가 가지는 불만의 정도를 갈무리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정답을 말하니 설득을 하고 다수결로 강제하여 그 정답에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모두가 ‘내가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다른 모두도 이상하지 않은가’ 하는 점에서 출발하여, 누군가가 현저한 손해를 입는 일이 없는 답을 찾아냅니다. 그것이 합의형성이예요.
법사회학자인 가와시마 다케요시가 <일본인의 법의식>이라는 흥미로운 책을 썼는데요, 거기에 일본의 전통적인 합의형성 방법 중 한 가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가부키에 <세 기치사>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낭자 키치사라는 나쁜놈이 창부를 죽이고 백 냥을 손에 넣습니다. 그것을 본 애송이 키치사라는 나쁜놈이 ‘내놓으라’며 나쁜놈들끼리 죽이네 사네를 시작합니다. 그 자리에서 승려 키치사가 중재에 나섭니다. 이때 트러블을 어떻게 매듭짓느냐 하면, ‘백 냥을 둘로 나눠 오십 냥 쯤 내게 주게. 그걸로는 부족할 테니까, 그 대신 내 양 팔을 잘라 한 개씩 가지면, 모두 기분을 가라앉힐 수 있잖겠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제안에 감동하여 세 사람은 의형제를 맺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합의 형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전원이 동등한 정도로 불만족스러운 해답을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합의의 매듭을 주도하는 인간에게는 가장 큰 ‘지출’을 할 각오가 요구됩니다. <삼방 일량손>에서 오오카 에치젠이 낸 한 냥도, <세 키치사>에서 승려 키치사가 낸 양팔도, 원래대로라면 그들에게는 그런 것을 낼 의무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지출할’ 각오를 내비치는 것으로 합의협성을 주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현대인은 그러한 합의 형성의 요체를 망각하고서는 ‘가장 옳은 의견에 모두가 따라야 한다’고 여깁니다. 합의형성은 ‘Lose-Lose-Lose’의 ‘삼방 일량손’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가 없군. 그럼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지’ 라며 혀를 차며 끝나면 아주 잘된 것인데, 마지막에 모두가 만세를 부르는 것은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나가이: 정말 납득이 됩니다. 의견의 우열을 경쟁한다는 게 아니군요. 그 대신 플러스를 지우고 마이너스를 평등하게 한다는 말씀이군요.
우치다: 우열을 논하는 방식이 아니예요. 실제로 의견이 대립하고 있는 이상, 거기에는 그러한 의견을 가지기에 이른 개인의 역사가 있고, 거기에 이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만 합니다. 나가이 군도 분쟁 조정을 업으로 삼고 있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경험적으로 이해하는 바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나가이: 오늘 말씀, ‘개인의 감정의 그릇에는 한계가 있지만, 모두가 똑같은 정도로 파워업하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파워업하는 쪽으로 가는 게 좋다’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우치다: 한 사람만 하게 되면 항상 무력감에 잠식되게 되겠지요. 자기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혼자서만 뭘 하려고 하면 절망적인 느낌이 듭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연대하면 좋습니다. 하지만, ‘공감’이라든가 ‘키즈나’라든가 ‘원 팀’같은 게 아닙니다. ‘각자의 장소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과업을 다하는 것’입니다.
야음을 틈타 단 한 명이서 적진에 총을 쏘고 있을 때, 멀리서 누군가가 똑같이 적진을 향해 쏘고 있는 화구가 보입니다. ‘싸우고 있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라는 생각이 들면 계속 싸워나갈 힘이 납니다. 그것은 공감도 아니고, 상호 이해도 아니며, 동지적 연대같은 것도 아닙니다. ‘나도 화이팅하고 있지만, 저 멀리서도 누군가가 화이팅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인간은 상당히 강해집니다.
물론 자기 한 사람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면 거기에 대적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원리주의적으로 모두를 향해 ’아주머니께 자리를 양보하라!’고 말하게 되지요. 중학생이라면 주의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야쿠자라면 발을 뺍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럴 때는, ‘더욱 강해지고자 한다’고 다짐합니다. 그런 방향을 향해 앞으로 노력을 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나가이: 너무 원리주의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조금만 더 편안하게 맘을 먹고, 마음을 넓게 가지라는 말씀이군요.
우치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조건’을 내거는 일은 결코 좋지 않습니다. ‘인간의 조건’을 갖출 사람을 점차 줄일 수밖에 없는 얘기이니까요.
나가이: 저도 미코시바 요시유키 선생에게 들은 것인데요, ‘머리로는 알겠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예요’라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같은 것을 따지게 되고 맙니다. 너도 인간 아니냐, 하는 식으로 하니까 오히려 때로는 배타적으로 나오기도 하고 공격적으로도 나오게도 된다는 것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어요.
우치다: 작업을 길게 진행하고 싶다면, 호흡이 가능하게끔 여유를 두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목표는 내걸지 않습니다. 밥을 세 끼 먹고, 목욕을 하며, 8시간 자고, 가족을 갖고서, 생계를 유지하고, 때로는 쉬면서 놀러다니고... 하는 일을 해나가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매일 착실히 계속할 수 있는 일은 어느샌가 가장 멀리 우리를 데려다주는 것입니다.
(2022-08-14 09:29)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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