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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보이스를 찾아내기 위한 엑서사이즈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2. 9. 5. 23:56
상당히 예전 일인데, 자신의 보이스를 아직 찾지 못한 청년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보이스를 통해 자신에 대해 말하는 일이 시급한 상황이었으므로, 거의 3년에 걸친 ‘개인 작문 과외’를 했다. 맨 마지막 과제 무렵에는 상대편의 답장이 없어 서신 교환이 중단되었지만, 그것은 아마 그가 이제는 ‘엑서사이즈’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자신의 문체를 확실히 손에 넣었기 때문이리라. 혹은 최후의 과제가 쓰기 상당히 어려웠기에 그랬을는지도 모른다.
작문 모임이라는 곳에 ‘자신의 보이스를 찾기’라는 강연 주제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으므로, 하드디스크 밑바닥에서 옛날에 주고받았던 글들을 발굴해내어 읽어보았다. 그가 제출한 과제 ‘답안’은 제외하고서, 필자가 낸 과제만을 여기에 리스트화해둔다.
이를 통해 작문 교육에 일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O가와 씨께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오늘은 멀리서 찾아와 주시어 고마웠습니다.
당신에게 필요로 한 것은 신체, 그리고 언어의 신체(그런 게 있습니다)의 수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신의 voice를 발견할 때까지, 오래도록 즐겁게 수업에 임하도록 합시다.
그럼 첫 과제를 내겠습니다.
주제 (1) ‘거짓말같은 진짜 이야기’
자신이 경험했던 ‘가짜같으면서도 진짜로 일어난 이야기’. 될 수 있으면, 아직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는 이야기를 써주십시오. 경험한 것만을 그대로 리얼하게, 각색 없이 기술해주십시오. 교훈이라든가, 결말은 넣지 않습니다. 사실만입니다.
주관성을 쳐낸 문장을 쓰기 위한 훈련입니다.
요는 로큰롤과 똑같습니다. Cut it, cut out 갑자기 시작해 느닷없이 끝나는 겁니다.
건승을 빕니다.
O가와 씨께
좋은 아침입니다.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과제문 곧장 제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음, 상당히 흥미 깊은 작문이었습니다.
작문 수업이라는 취지로 시작한 과제였습니다만, 이게 또한 상당히 흥미로운 O가와 군의 ‘무의식’의 표현이 된 것 같아요.
아니, 별로 신경 안 써도 됩니다.
당신의 심상 풍경이 상당히 투영되어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금지가 많은 환경’에서 시작함.
‘애정의 대상’과 마음이 통하지 않음.
‘애정의 대상’이 영문도 모른 채 사라져버림.
거북이 없어진 이야기가 ‘거짓말같으면서도 정말 일어난 이야기’로 선택되는 일은 보통은 없습니다. 그야 자주 있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O가와 군이 이 기억을 떠올렸다는 것은, 당신에게 있어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 (이라고 생각했었던) 이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인상에 남았던 이유는, 아마 이 사건이 ‘자신에 대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자신의 숙명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고 O가와 소년이 직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멋대로 제가 생각한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어째서 O가와 소년은 이 사건을 기억해냈는가, 거기서 무엇을 직감했었는가.
딱히 서두를 얘기는 아니니까, 그것을 종종,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그럼, 제 2의 과제를 내겠습니다.
제 2의 과제는 ‘내가 이제까지 만났던 사람중, 가장 취해있던 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글자수는 자유입니다. 건승을 빕니다.
O가와 씨께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과제 제출 감사합니다.
이번 글은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E구치의 취하는 방식과 K키치 군의 만족해하는 척하는 모습이 훌륭할 정도로 생생히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 앞에서는 평소에 그렇게까지 취해 있지 않습니다(말하자면 다소간은 긴장하고 있지요). 허나, 제가 자리를 비운 뒤에는 ‘좋았어, 이제 꺾어 볼꺼나’ 같은 식으로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O가와 군한테는 매주 ’신노스케’에 다니던 때가, 정서적으로는 가장 안정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 3의 과제는 ‘굉장히 역겨운 것을 먹었을 때의 이야기’ 입니다.
할 얘기가 꽤 많을지도 모르겠군요.
O가와 씨께
좋은 아침입니다.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세 번째 과제를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라멘, 진짜 정말로 역겨워 보이는군요. ‘화장실 냄새’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닭살이 돋을 만큼 역겨울 정도입니다.
역겨운 음식 이야기가 문체 수업에 있어서 쓸모 있다는 점은 말하자면, ‘맛있음’을 느낄 때는, 맛있는 것을 먹는다는 것의 종합적인 체험을 즐길 수 있습니다만, ‘역겨운 것’을 먹을 때는, 다른 맥락을 모두 분리시키고, ‘역겨움’에만 의식을 집중시키기 때문이겠지요(아마도). 그야, 가게도 더럽고, 불친절하며, 음악도 이상하고, 화장실에서 악취가 나고... 하는 식의 ‘종합적인’ 역겨움을 기술해나가면, 이제 더는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먹는 것 이외의 요소’의 간섭을 배제하고서, 순수한 ‘역겨움’에만 집중하여, ‘그것만을 견디는’ 일에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야말로 ‘역겨운 것’을 먹는 경험을 말할 때의 효능이 아닐까요. 메이비.
그런 식으로 ‘어떤 토픽의 일점’에 특화해 글을 쓴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장 수업인 것입니다.
제 4의 과제는 ‘픽션’입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나는 ... (이)가 되어있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그날의 전반부에 있었던 일을 창작해주십시오. ... 에 들어갈 내용은 무엇이든 좋습니다.
하지만, 곤충이라든가 파충류 등은 ‘나는’ 이라는 주어와는 어울리지 않기에 (되어 보지를 않았으니 모르지만요), 포유류가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저, 개미핥기라든지 팬더, 낙타 같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를 동물이 묘사하기 쉬울 겁니다. 개나 고양이는 그것이 된 자신을 어떻게든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건승을 빕니다.
O가와 씨께
안녕하세요.
취직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잘된 일입니다.
차근차근 한 걸음씩 화이팅입니다.
과제 잘 읽어보았습니다. 문장이 현격히 나아졌군요.
과제의 의미는 이미 알 것으로 생각하지만, ‘자신이 아닌 것’에 말을 시키는 것으로 하여금 인간은 사물과 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게’ 된다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물에 빙의된 문체’는 예로부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카프카 <변신>에서부터 오시마 유미코大島弓子의 <솜의 별나라綿の国星>, 사라 이네스サラ・イネス의 <아무도 잠들지 않은 채誰も寝てはならぬ>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선행 사례가 있습니다만, 문학사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이 수법을 처음 의식적으로 채용한 것은 몽테스키외라고 합니다.
몽테스키외는 <페르시아 인의 편지>라는 픽션에서, ‘파리에 처음 와본 페르시아 인’을 가장하여, ‘페르시아 인’이 보고 들었던 파리지앵들의 굉장히 신기한 생활 태도나 사고방식을 접하고 나서 놀라움을 간직한 채 고향으로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파리의 인간이 파리의 인간을 기술하자면, 아무리 중립적으로 쓰려고 해도, 어딘가 냉소적이게 되거나, 지나치게 흥분하게 됩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인’이 ‘파리 사람은 이러이러하다’고 쓰면, 그것은 그저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비평적으로 기능합니다. 그러한 구조입니다.
현대에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서 온 사람’이 현대인의 생활을 보고서 놀란다든지, 현대인은 옛날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아우라를 처음에는 비웃지만, 그러면서 차츰 그 진가를 알아나간다... 는 식의 티브이 드라마라든가 만화가 많이 있지요.
‘이방인’의 시선으로 자신들 스스로를 기술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지성적 상상력 발동 훈련이 됩니다.
그리하여 이번에 ‘소’가 본 인간 세계에 대해 쓴 글은, ‘소의 생리’ (잠결이라든가 공복, 통각 등) 에 O가와 군이 상당히 상상적으로 동화되어 있어서, 상당히 읽을 만한readable 문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쿠僕’가 자신이 암컷임을 깨달은 뒤에도 일인칭이 변하지 않은 점이 흥미로웠어요. 만약 도중에 ‘와타시私’로 바뀌어도 재미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너무 지어낸 얘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이번 과제의 포인트는 ‘이방인’의 신체가 되어 볼 수 있겠는가의 여부였습니다.
그때 ‘신체가 되어본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그 사람의 신체’에 들어가서, 같이 자고, 배고파하며, 외로워하고, 얌전히 있는다든지... 하는 신체 실감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으므로, 이번 과제는 굿잡입니다.
그럼, 다음에는 응용 문제입니다. 이번에는 반대입니다. 우리의 세계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우리가 사는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는 문장 훈련입니다.
이번에는 글감을 정해놓겠습니다. ‘축구’입니다.
축구라는 것을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동면했다든가, 우주에서 왔다든가, 그런 사람입니다. 일본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이 티브이에서 축구 시합을 보고 O가와 군에게 ‘이 사람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거야?’ 라고 물어왔습니다.
O가와 군은 함께 티브이를 보며, 그 ‘이방인’에게 22명이 축구 경기장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관객들은 어째서 저렇게 흥분해 있는가를 설명해야만 합니다. 터치라인도, 오프사이드도, 코너킥도 저언혀 모르는 사람에게 축구의 ‘즐거움’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글자 수는 제한이 없습니다만, 될 수 있는 한 ‘시합이 시작하고 나서 5분 정도 뒤에 질문을 받았기에, 하프 타임이 끝날 때까지 설명을 마친’ 정도의 시간으로 끝내주십시오.
그럼 다음 시간에~.
O가와 님께
좋은 아침입니다.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지금 나라(奈良)의 도우노미네(多武峯)라는 곳에 와있습니다. 바깥은 후두둑 비가 내리고 있으며, 동행한 사람들은 이미 산에 올라가 노(能) 공연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밤에 오르게 되므로, 지금은 텅 빈 숙소에 남아, 메일을 읽는다든가 짧은 원고를 쓰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번 과제,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토착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강점입니다.
‘토착 언어’라는 것은 언어 뿐만이 아니고, 몸짓, 표정, 톤, 복장, 직업, 때때로 가치관, 미의식, 이데올로기까지 ‘포함시켜’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롤랑 바르트는 이 ‘토착 언어’를 sociolecte 즉 ‘사회적 방언’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이언맨의 파워드 수트같이 ‘훌쩍’ 하고 그 안에 들어가면 다음에는 자동적으로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일단 학습하여 신체화시킨 뒤 ‘토착 언어’를 사용하면, 평소와는 다른 말투, 다른 시점, 다른 문맥에서 세상을 서술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어드밴티지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보이스를 찾아나서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함정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점점 넘칠 듯이 말이 솟아오르게 되는 까닭에, ‘오오, 이것이 나의 보이스인가!’ 라고 여겨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말버릇만 구사한다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마음껏 말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이었는가.
파워드 수트에 장착되어 있는 ‘즉석 언어’를 재생하는 것이며, ‘타인의 말’을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지는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면 얘기가 상당히 복잡해집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보이스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그렇게 간단히 답이 나올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느긋하게 갑시다.
게다가 ‘토착 언어’가 가지고 있는 생성력과 파괴력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그 말의 ‘적절한 구사법’을 배우는 것은 자동차의 운전 기술을 배우는 것과 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다음 과제입니다.
과제 (6)은 처음 내는 테마인데요, ‘대화’를 쓰게 됩니다. 대사만 말입니다. 연극이나 희곡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지문’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의 이름, 성별, 연령, 직업 등을 앞서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대화만 씁니다. 물론, 결말이나 교훈도 필요 없습니다. 앞선 말에 반응하여, 다음 말이 나오게 됩니다. 그저 차례차례 대화가 이어지고, 시간이 되면 뚝 하고 끊습니다.
제일 처음 대사만 정해줄게요.
‘누구 기다리고 있어?’
그럼, 파이팅!
O가와 씨께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과제 잘 받아보았습니다.
시간이 살짝 걸렸네요. 이런 글은 시간을 그다지 들이지 않는 게 좋습니다.
과제가 주어지면 즉답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공들여서 써야만 한다’는 압박이 무의식중에 들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입니다. 학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입니다.
어떤 논문을 쓴 뒤, 다음 논문까지 시간이 비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그만큼 시간을 들인 퀄리티의 것을 기대하고 있음이 틀림 없다. 그 기대에 보답해야만 한다...’ 는 식으로 그만 힘이 들어가고 맙니다(딱히 어느 누구도 기대 따위는 하고 있지 않은데 말이죠).
그리고, 힘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쓰는 것이 불가능해져서, 계속 시간만 잡아먹는 동시에, ‘세상의 기대치가 점점 올라가 있는 게 아닐까...’ (이 친구야, 올라가 있지 않다구) 하는 식으로 힘이 들어가고 맙니다.
결국 그렇게 ‘다음’을 쓰지 못하고 끝장나버린 연구자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몇 배나,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생각에 빠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과제가 부여되어도, 별로 시간이 나지 않을 수도 있는 점을 감안하여, 1주일 정도를 목표로 ‘즉답’을 꾀하시기 바랍니다.
‘즉답이니까 솜씨가 조금 어설퍼도 불평하지 마시오’ 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쓰는 게 편합니다(실제로 아무도 불평 안 합니다).
그리고 이런 글은, 대체로 그다지 생각하지 않고서 ‘즉답’해야 결과물이 좋습니다.
‘즉답’으로 써내고 난 뒤 사후에 첨삭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런 작업이 즐겁다면 하는 게 낫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마지막까지 단숨에 써버리게 됩니다.
글의 길이와 관련해 아무런 규정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과제만 해도, O가와 군이 ‘과제가 속속 들이닥치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누구 기다리고 있어?’
‘너랑은 상관 없잖아’
로 끝내버려도 아주 괜찮습니다.
‘누구 기다리고 있어?’
‘일단 너는 아니야’
‘누구 기다리고 있어?’
‘일본말 할 줄 몰라요’
라는 식으로 해도, 뭐든 잘한 겁니다.
과제의 ‘허를 찌르는’ 장난도 답하는 이에게는 허락되어 있어요(이건 테스트가 아니니까요).
보이스를 찾아내기 위한 엑서사이즈니까 말입니다.
그럼, 과제 (7)입니다.
이번에는 ‘픽션’을 쓰겠습니다.
맨 첫번째 줄은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유형의 남자였다’
입니다. 그리고 그 남자가 어떤 남자였는지를 묘사하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 남자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나’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의 모든 감각을 동원할 것.
짧아도 좋고, 길어도 좋습니다.
중요한 점은 시각 정보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상을 그려낼 수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그럼 화이팅입니다.
O가와 씨께
좋은 아침입니다.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빠른 과제 제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O가와 군의 ‘설명’이 붙은 게 저는 흥미로웠습니다.
어떠한 의도로 썼는지와, 실제로 쓰여진 것 사이에는 커다란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당연한 얘기입니다만, ‘보이스’는 ‘의도’에 따라 제어할 수 없으니까요). 그 ‘모순’이 크면 클수록 ‘보이스’가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명’은 ‘자신이 쓴 것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쓴 것을 잘 설명할 수 없는’ 정도에 따라 평가받게 됩니다(딱히 평점을 붙이는 건 아닙니다만).
다음부터는 ‘자기가 쓴 글에 대한 주석’도 부디 같이 써주십시오(짧아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는 O가와 군의 선택이 저에게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이번 글은 어째서인지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구나’ 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런지요.
그것은 ‘의도’에 따라 쓴 것이 제어 불가능해지는 징후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는 자신의 작품에 일체의 ‘후기’라든가 ‘해설’을 붙이지 않습니다만, 그것은 ‘이 글을 내가 쓴 것도 아닌데...’ 하고 어딘가 모르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쓰여진 글은 자신의 ‘소유물’처럼 다룰 수가 없습니다. 구석구석까지 모두 자신이 컨트롤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쓴 글이 자립하여, 독자적인 생명을 얻은 것으로 여기게 되면, 거기에 대한 설명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하나 더’ 새로이 쓰는 이외에는 방도가 없다... 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이번에 쓰여진 글은 그러한 점을 참작했을 때 이제까지 썼던 글들 중 가장 훌륭한 느낌으로 마무리가 지어져 있습니다.
시각 정보에 의거하지 않고, 촉각이나 후각을 동원해 묘사하면, 불가사의한 ‘리얼리티’가 발현되지요. 허구인데도 리얼리티가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O가와 군의 신체는 O가와 군이 태어나서 경험한 것을 전부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도, 그 ‘기억’의 아카이브로부터 도출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저, 한 번도 말로 꺼낸 적이 없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머리는 그것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체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보이스’라는 것은, 머리는 잊어버렸지만 신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 장치입니다. 아마 머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일억 배 정도(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더 많이 신체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부 ‘써먹어진’ 것입니다. 써먹어도 됩니다. 아니, 써먹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 다음 과제를 내드릴 건데요, 잠시 쉬도록 하겠습니다.
과제는 내드리겠습니다만, 잠시 ‘내버려’ 두십시오.
마감은 한 달 뒤로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이 과제를 ‘잊어버려’두십시오. 마감 3일 정도 전이 되어서야 ‘아, 과제가 있었구나’ 하고 떠올려내서, 그때부터 써주십시오. 그게 규칙입니다.
이번에도 ‘창작’입니다. 아무리 기묘한 이야기일지라도 상관 없습니다. 길이도 문체도 자유입니다.
첫줄은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아픔을 느끼며 잠에서 꺴다’ 입니다.
O가와 씨께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과제 고맙습니다. 답장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번 글, 재밌었습니다. 실력이 점점 늘고 있군요. 역시 ‘허구’는 쓰기에 편합니다.
‘보조선’이라는 것은, 고전(와카和歌를 말함 - 옮긴이)에서 말하는 ‘혼카 토리本歌取り’겠네요. 글을 쓸 적의 꽤나 전통적인 수법인 것입니다.
‘혼카本歌’는 무엇이 되든 좋습니다. 플롯을 따와도 좋고, 캐릭터를 따와도 좋으며, 한 장면을 따와도 좋습니다. 그러한 ‘본바탕’으로 활용한 대상이 있는 편이 오히려 자신의 오리지널리티를 발휘하기가 좋습니다.
오타키 에이이치 씨는 그것을 ‘본바탕 송’이라고 불렀습니다. 의도적으로 ‘이 곡의 이 부분을 썼다’고 생각하고서 쓰는 경우도 있지만, 알아채지 못하고서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도 그럴 법하지요. 몇 십 년동안 흡사 들이붓듯이 음악을 들어왔으니, 신체에 스며들고 맙니다.
전에 오타키 씨가 만든 ‘우나즈키 마치うなずきマーチ’라는 코믹 송은 데이브 클라크 파이브의 Wild Weekend가 본바탕이겠지요 하고 트위터에 올렸더니, 오타키 씨가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세계에서 우치다 씨가 처음입니다’ 하고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오타키 씨 자신도, 자신이 수도 없이 들어왔던 Wild Weekend를 본바탕으로 작곡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겁니다.
이것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의 오리지널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더 롱 굿바이>입니다. 오리지널의 오리지널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더 그레이트 개츠비>구요.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알랭 푸르니에의 <르 그랑 몬느>. 이 또한 자신의 선행작품이 분명 있을 겁니다.
이 작품들은 모두 플롯 구조가 동일합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작가라 할지라도 분명히 ‘보조선’을 이용하여 작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문체에 관해서는, 누구든지 처음에는 파스티슈(pastiche) 즉 모방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자유자재로 쓰는거지? 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의 문체를 흉내낸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문체를 흉내냈던 작가는 기타 모리오입니다(의사 출신의 기타 모리오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고등학생 정도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뒤 요시모토 다카아키, 히로마쓰 와타루, 시이나 마코토, 하시모토 오사무, 무라카미 하루키, 다카하시 겐이치로 등의 문체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썼던 글을 보면, 제가 누구의 영향 아래에 있었는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본바탕이 점점 늘어나면, 그것을 아래에 깔고 그리는 사이에,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자신만의 문체가 형성되어가는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영향을 받는 일은 될 수 있는 한 빈번하게, 될 수 있는 한 집중적으로 체험하는 게 좋습니다.
‘혼카 토리’의 진면목은 (이번 과제도 그랬습니다만), 허구의 인물로 하여금 말하게끔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했던 적 없는 것을 마치 경험한 것처럼 말함으로써, 우리의 경험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다음 과제도 허구로 이어집니다.
이어지는 주제는 ‘미스테리한 직업을 가진 사람’ 입니다.
설정을 정해두겠습니다. 첫 줄은 이렇습니다.
‘참으로 느낌이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는 전혀 미루어볼 수가 없다.’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자유롭게 씁니다.
그럼, 화이팅입니다.
O가와 씨께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이번 과제도 흥미로웠습니다. ‘참으로 느낌이 좋은 사람’이라는 조건과,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조건을 모두 클리어하는 캐릭터란, 상당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떠올려낼 수 없는 거니까요.
이번에 조형해냈던 홈리스에는 상당한 깊이가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맨종일 인간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해요.
글을 쓴다는 것의 가장 큰 이점은, ‘이것을 언젠가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싶고, 어떤 형태가 있는 것으로 써서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수수께끼의 느낌이 드는 사건을 만날 찬스가 늘어난다는 점입니다. 이것 자체가 수수께끼죠.
자신이 경험했던 것을 말할 상대가 아무도 없는 사람은, 눈 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도리어, 인간이 가진 관찰이나 기억의 힘은, 그것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그것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기대가 있을 때 강화됩니다.
그런 겁니다.
자, 다음 과제는 살짝 취지를 바꿔서 ‘고민 상담’입니다.
O가와 군은 젊기 때문에 ‘고민 상담을 요청하는 측’에 서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상담을 들어주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인생 경험이 풍부한 어른’을 가장하여 (그러니까, 50세 정도가 되었다고 치고), 방황하는 연소자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주십시오.
질문은 이렇습니다.
‘저는 곧 30이 됩니다만, 지금까지 인생을 살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달성해 봤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이대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그 무엇도 없이 30살을 넘겨버린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이제부터 무엇을 하면 좋을지요. 조언 부탁드립니다 (29세, 여)’
이것 참 곤란하군요. 열심히 고민해보고 답장 주십시오.
O가와 씨께
좋은 아침입니다.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과제 제출 고맙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인생 상담’이므로, 신문의 고민상담 코너처럼 상담자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식의 패턴을 상정해뒀었습니다만, 대화 형식으로 하셨네요.
아, 이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옳거니.
인생 상담을 맡게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상담에 응해줄 수 있는 사람은, ‘듣기의 달인’인 건데요, O가와 군이 말한 것처럼 ‘상대에게 반론하지 않고’ ‘일반론에 함몰되지 않는’ 것을 배려하는 사람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는데, 그것은 ‘이야기를 마친 후 상대가 조금은 개운해하는’ 실효성입니다. O가와 군이 ‘마지막에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 그것이겠네요.
고민 상담을 하러 오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남한테 얘기를 들어보았자 소용 없다’는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남한테 얘기를 하러 오는 것은, ‘정답’을 바라서가 아니라 ‘자신으로서는 해결할 만한 체력이나 정신력이 없으므로, 그 점을 어떻게 보충해 주시오...’ 하며 읍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흠흠 하고 들어주고서는 ‘조금 쉬는 게 어때?’ 하며 어깨를 두드려준다든가 자양강장제를 한 개 사들고 온다든가, 그 정도만 해도 고민 상담을 한 ‘값어치가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인생의 난문은 최종적으로는 본인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난문에 직면해 있는 사람의 거의 대부분은 너무나 지쳐있고, 막다른 처지에 놓여 있어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릴만한 여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역점은 ‘일단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 데 두어야 합니다.
‘물을 많이 마시고 푹 잔다’든가 ‘방 청소를 해 보자’ 라든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자’ 라든가 하는 조언이 애초의 질문과는 전혀 상관 없음에도 불구하고 써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수면, 일찍 일어나기, 방 청소 모두 ‘피와 땀과 눈물’을 조금씩 늘려가게 하니까요. 조금이라도 ‘피와 땀과 눈물’이 몸에 붇게 되면, 사람은 ‘피와 땀과 눈물’이라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렇구나, 이것을 비축해 두면 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정답은 뭐가 됐든 상관 없습니다. 기운을 낼 수 있게 된다면, 대부분의 일들은 어떻게든 되니까 말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다음 과제를 내겠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희곡 시리즈’입니다. 쓰기 쉬울 겁니다.
첫부분은
어머니 “애가 어제 저녁에 이층에 뻔히 있으면서도 내 휴대폰에 전화해서 ‘저녁 언제 돼’ 라고 말하는 거야!’
입니다. 대화 상대는 ‘아버지’입니다.
화이팅입니다.
O가와 씨께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이번에는 빨리 보내셨군요.
그래요, ‘애’는 여자애로 했네요. 옳거니.
그리고 ‘아버지’는, 마땅한 지시가 있다는 걸 모르고 읽는다면 ‘아들’과 어머니의 대화로 들리네요. ‘애’ 보다 2, 3살 연상인 자식과 어머니의 대화 말예요.
부친의 어법이나 논리같은 게 아직 O가와 군에게는 내면화되지 않은 걸까요.
그럴 지도 모르겠군요(이는 대단히 흥미로운 논건입니다만).
그리고 O가와 군이 조형해내는 사람들은 (특히 남자가) 모두 ‘묘한 분별력’이 있군요. 자신의 원칙을 고집하며 ‘누가 뭐라고 하든 나는 나다’ 는 식의 인물은 아직 등장한 일이 없지 않나요.
그러니까 이게 좋고 나쁘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고집, 자존심, 피해자 의식’은 마음이 병든 남자들의 공통점이니까요. 그런 걸 배제하라는 조건을 단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O가와 군이 허구로 조형해 낸 남자들에게마저도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점은 약간 흥미롭습니다.
그런 고로, 이번에도 O가와 군에게 ‘부친’을 상상적으로 조형해 내어 보게 하겠습니다.
이 과제, 상당히 재미있네요. 인물을 마음대로 조형해도 좋다는 조건 아래에서는 글쓴이의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프레임이 드러나게 되니 말입니다.
이번에도 기본 골격만 정해드리겠습니다.
이번 과제는 ‘결혼식 신랑 부친의 연설’입니다. 어떤 조건 하에서의 결혼인지는 좋을 대로 해 주십시오.
결혼식 피로연이 끝나고 부친이 약간 붉어진 얼굴을 띠고서 하는 인사입니다.
어떤 방식일지라도 좋습니다. 정형적이어도 좋고, 파격적이어도 좋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어도 좋습니다. 논리정연해도 좋고, 지리멸렬해도 좋습니다. 조건은 ‘리얼할 것(맞아, 정말 이런 아재 한 명씩은 꼭 있지...)’ 하나뿐입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O가와 씨께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부친 조형 시리즈, 고마웠습니다. 이번에도 또한 ‘너무나 분별력 있는 아버지’ 였네요.
분명히, 결혼 피로연에서 부친이 연설을 할 정도면 ‘사이가 좋은 가족’일 것이고, 이런 점에서는 가식일지언정 ‘사이 좋은 가족’을 연기할 것이므로, 정형적이 될 수밖에 없겠네요.
전에 제자의 피로연에 갔을 적에, 신부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감사의 편지’라는 글을 낭독했습니다.
‘아버지는, 예전부터 제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전부 ‘그러렴’ 하고 말해주셨지요. 그래서, 제가 그이를 집에 처음으로 데려 왔을 때도 ‘너 좋을 대로 하려무나’ 라고, 빙긋 웃으며 승낙해주셨습니다. 아버지,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런 내용을 듣고 있자니, 옆에서 신부의 대학 동기가 팔꿈치로 저를 찌르고서는, ‘선생님, 저거 전부 거짓말이예요. 아버님은 결혼을 엄청나게 반대해서 ‘절대로 안 돼!’ 라고 나오는 바람에, 요란한 가족 싸움까지 일어났을 정도였으니까요...’ 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전말을 알게 되자 저는 오히려 감탄해버린 겁니다.
옳다구나, ‘가족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구성원들이 작위적으로 짜맞춰가는 것이구나, 라고요.
그리고 확실히, O가와 군이 조형해 낸 아버지가, 자식에 대해 하는 말에는 어째서인지 리얼리티가 없네요. 왠지 묘하게 담백해요.
아니,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식의 ‘리얼리티의 묘한 결여’가 부친이 가족을 이를 때 구사하는 모든 말들을 둘러싼 특성이니까요.
가족에 대해 ‘리얼한 말’을 하는 부친같은 건 없습니다.
‘완고한 가부장’도 ‘이해심 넓은 부친’도 ‘무관심한 부친’도 각자 전부 정형적입니다. 정형구밖에 말하지 않아요. 개성적인 말을 하는 부친도 드물게 있습니다만, 그것은 부친으로서의 책임이나 권위를 단념하고 내팽개친 부친입니다.
부친이라는 포지션을 버린 대가가 아니고서는 ‘자녀에 대해 자유로이 말할 권리’를 남자는 손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이 계속 길어지게 되네요.
그런 의미에서 이제까지는 허구 시리즈였습니다만, 가끔은 ‘논픽션’ 과제를 내겠습니다.
‘나의 아버지’
입니다.
아마 O가와 군으로서는 쓰기 힘들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 제대로 쓰기 힘들다는 사실을 관찰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글쓰기 레슨’이니까요.
그럼, 화이팅입니다.
O가와 씨께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과제 제출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번에는 굉장히 힘들었나 보네요. 수고 많았습니다.
저번에 쓴 바와 같이, ‘부친이 하는 말’은 어째서인지 항상 정형적인 것이 됩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아들이 ‘부친에 대해 하는 말’은 그렇게까지 정형적이지 않습니다.
그건 아마도, ‘이런 식으로 말하면 되는’ 표준적인 것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한, 부친을 객관적으로, 간단명료하게 말할 수 있던 친구들은, 모두 부친과 관계가 소원했으며, 증오하고 있는 사람조차 있을 정도였습니다.
부친과 사이가 좋았다, 혹은 부친이 좋았다는 자식들은 모두 말이 적었습니다. 아마 객관적으로는 잘 설명이 안되기 때문이겠지요.
제 부친에 대해 저는, 부친이 살아계셨을 동안에는 거의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돌아가신 뒤에, 솟아오르듯 터져 나왔습니다. 이렇게 세부적인 것까지 기억하고 있구나... 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아무래도 좋을 것들을 떠올려냈습니다.
추억 얘기를 떠올려내는 게 그치지를 않는 것은, ‘도저히 한 마디로는 끝낼 수 없을’ 정도의, 하나하나 세부적인 사항의 추억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O가와 군이 하는 부친에 대한 말은 ‘한 마디로 잘라 말하는’ 부분과 ‘단편적인 기억’이 섞여있었습니다. 그것이 O가와 군과 아버님 사이의 미묘한 거리감, 친소(親疏)의 혼란을 표현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언젠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 ‘어째서 이런 아무래도 좋을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하는 추억이 떠오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때 ‘아버지를 꽤 좋아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만, 그때 부친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까다로웠던 과제 다음에는, 좀 더 연하고 기술적인 과제를 내겠습니다.
‘설명’입니다.
문장을 잘 쓰는 사람은 설명을 잘합니다. 이것은 진짜입니다.
<풍요의 바다>에서 혼다 구니오(등장인물 중 한 명)가 불교의 ‘유식론’ 가운데 ‘알라야식’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소설의 플롯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만, 이 설명이 또 대단합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무엇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게 되면 그만 ‘업’ 되어버리지요.
읽으면서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다 읽는 순간 까먹어버리지만요). 그 어떤 불교 서적보다 이해하기 쉬운 것은 틀림없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1Q84>에서 1970년대 전공투 투쟁 뒤에 패잔병으로 남은 학생들이 종교, 생태주의, 유기 농업에 빠져드는 상황을 설명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저는 제 스스로가 실시간으로 살아왔던 그 10년이라는 기간을 이렇게까지 훌륭하게 ‘설명’한 문장을 읽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 고로, 어떠한 주장이나 미사여구보다, 독자가 모르는 것을 독자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기술은 글을 쓰는 데 필수적이기도 한 동시에,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번 주제는 ‘나의 직업’입니다.
분량이 긴 소설 내용 가운데, 등장인물 중 한 명이 때때로 자신의 직업이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야만 하는 탓에, ‘그러니까 말이죠...’ 하고 사정을 잘 모르는 상대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는 식으로 써 보아 주십시오.
중요한 것은 ‘친절하게 설명하는 것’ 입니다.
그럼, 화이팅입니다.
O가와 씨께
좋은 아침입니다.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과제 제출 고맙습니다.
이번 설명문은 매우 훌륭했습니다. 일본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참으로 알기 쉽게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설명을 읽고서, O가와 군이 쓴 글에 공통되는 특징을 살짝 발견해냈습니다.
그것은 ‘신체성이 다소 결여되어 있는’ 것과 ‘실패 경험의 서술이 서툶’입니다.
의외라고 생각해서 좀 놀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두 가지는 아마 그 원점의 차원에서는 뿌리가 같다고 봅니다.
술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프로세스에 대해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만들고 있는 것의 ‘감촉’, ‘향기’, ‘맛’, ‘온도’, ‘습도’등에 대한 언급이 적습니다. 음식을 만드는 이상, 그 설명에 있어서는 후각과 미각 정보 입력이 보통은 가장 선행되어야 할 터인데, 그런 걸 그다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 지인 중에도 ‘도부로쿠’ 사케를 양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 사람의 ‘도부로쿠’ 제조 이야기를 듣는 걸 저는 좋아하는데요, 듣다 보면 목이 컬컬해져서, ‘아아, 마시고 싶다...’는 기분이 듭니다.
딱히 특급 미식가처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기술적인 설명을 하고 있을 뿐인데도, 플라스틱 통을 씻을 때의 차가운 물, 밤중에 발효될 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포 소리, 뚜껑을 열 때 놀라는 고양이의 반응같이, 그런 아무래도 상관 없을 얘기를 듣고 있으면 ‘굉장히 술이 먹고 싶’어집니다.
이는 신체의 촉각이나 미각이 발동해서겠지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장인의 작업’이란 것은 항상 실패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실패를 회피할지에 대한 기술적인 숙련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느 부분에서 ‘중요한 것’을 간과하는가에 대한 고찰이기도 합니다.
‘실패’라는 것은 사실 상당히 신체적인 것입니다. 개성적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제가 하는 실패는 ‘모두 우치다가 할 법한 실패’라는 개성의 각인이 역력히 박혀 있습니다. ‘이것은 우치다가 할 법하지도 않은 실수군’ 하는 느낌의 실패를 제가 했던 기억은 없습니다. 전부 ‘우치다 트레이드마크’가 붙어있습니다. 부주의하고, 무감각하며, 바람이 잔뜩 들어간,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을 해서 대실패한 경험을 이날 이때까지 반복하고 있습니다.
후카사와 시치로라는 작가가 쓴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이미 절판되었습니다). 오로지 매일 일어난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만이 점철된 일기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재밌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실패 그 자체가 개성적인 작품이 될 만하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직감한 것이겠지요(그런 탓에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던 사람입니다만).
자신의 실패를 말로 얼마나 잘 표현해낼 수 있는지의 여부는 자신을 얼마나 관찰할 수 있는가와 상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라는 소재는 대단히 중요한 글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반성일기’ 같은 게 아닙니다. 그렇게 위축된 문장을 써봤자 소용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목적이 아니고, 자기 관찰을 위해, 자신을 위하여 쓰는 것이니까요. 자신의 실패를 ‘유쾌하게’ 쓰고, 자신이 ‘납득’하는 프로세스를 반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과제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기’ 입니다.
이제부터 당분간 매일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을 하루에 하나 정도 찾아서 써주십시오. 달리 리뷰나 반성도 불필요합니다. 단지 하루 한 개 지극히 객관적으로 ‘오늘, 이런 장면에서, 이런 사람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 그렇게 말하지 말걸.’ 이렇게 써 주십시오. 파이팅입니다!
O가와 씨께
좋은 아침입니다.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과제 제출 고맙습니다.
자전거가 O가와 군에게 대단히 소중한 생업용 수단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에 O가와 군이 저한테 고등학생 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자전거로 통학했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O가와 군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매우 중요한 경험이겠거니 생각을 했었는데요, 그 기억이 살짝 났습니다.
문장은 크게 나눠서 ‘가로로 미끄러지는’ 것과 ‘세로로 미끄러지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속도감과 박자 등이 ‘가로로 미끄러지는’ 것의 효과입니다. 휙휙 풍경이 바뀌어 전개됩니다. 그때의 안도감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세로로 파고드는’ 글쓰기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별안간 현재 있는 장소에서 사각사각 아래로 파고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옆으로 미끄러져가는데, 어느 지점에서 ‘우물에 빠진’ 것처럼 쿵 하고 지면 아래로 파고들어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루브함, 낙하감, 부유감 등 수직 방향의 고도 변화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이상한 감각은 ‘세로로 미끄러지는’ 문장밖에는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좋은 문장은 처음에는 옆으로 미끄러져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수직 낙하하고, 다시 지표면으로 되돌아나와서, 약간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끝납니다. 그런 식으로 짜여진 문장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 느낌이 그렇습니다만.
O가와 군의 문장은 처음 무렵에 쓴 것에 비하면 (스스로 비교하며 읽어보십시오), 곳곳에서 ‘우당탕’ 수직으로 파고드는 문장이 등장하게 됩니다.
아직 구멍이 깊은 건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수직 방향으로의 ‘떨어짐(혹은 떠오름)’ 이 여기저기서 느껴집니다.
이게 엄청나게 중요한 일입니다.
전편에서 O가와 군도 썼습니다만, 현대인은 아무래도 ‘속도감’이나 ‘효율’을 너무나 중시합니다.
때로는 멈춰 서서, ‘아래로 내려감’으로 하여금 문장은 깊이를 더해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디에 구멍이 있는지를, 사전에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파고드는’ 것은 확실히 주체적인 동작입니다만, ‘구멍에 다리가 빠졌을’ 때에 ‘아아, 여기가 구멍이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이어서, 자기가 맘대로 ‘여기를 파고들자’고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전편에서 ‘훅hook’이라고 말한 것은 그러한 ‘구멍’ 얘기입니다.
이를 찾아내는 것은 문장 수업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리하여 다음 시간에도 ‘훅 하는 것’을 찾는 과제로 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절대 버릴 수 없는 것’ 입니다.
‘버린다’는 행위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선택입니다. ‘버려지는 것’과 ‘버려질 수 없는 것’을 어떠한 기준으로 결정하는가는 한 사람의 특성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절대 버릴 수 없는 것’을 한두 개 써 보고, 될 수 있으면 ‘어째서 버릴 수 없는가’에 대한 자기 분석을 행해주십시오.
조금 어려운 작업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화이팅입니다.
O가와 씨께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답장이 늦어 미안합니다. 한국 여행이 상당히 고되서, 밤이 되자 풀썩 쓰러져 콜록콜록하며 아침까지 잤는데, 이게 점심 때까지 이어져서... 책상에 앉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일본에 돌아오고 나서 간만에 조금 안정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흘이나 집을 비웠더니 원고가 쌓여버려서, 어떻게 대책이 서지를 않았습니다. 어유.
보자, ‘버릴 수 없는 것’은 책과 DVD라구요. 책 선별 기준 이야기와, DVD를 두 개 사두는 이야기가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책의 선별 기준을 생각하는 게 귀찮아서, 계속 책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만, 1995년 고베 대지진 때, 그리고 2011년에 개풍관으로 이사했을 때, 물리적으로 ‘더는 책을 둘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대량으로 처분해버렸습니다.
그때의 기준이란, 책 그 자체의 가치와는 관계가 없는데, ‘남은 인생에서 손에 들고 읽을 가능성이 있는가?’ 였습니다. 이미 읽었거나 그렇지 않았거나, 그러한 것은 어떻게든 알 수 있어요.
뭐, 그때도 ‘버린 뒤에, 역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인터넷 서점에서 돈을 내고 입수한다’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단샤리(断捨離)를 할 수 있으려면, <원한다면 또 사도 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저축액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 것입니다.
물건을 버릴 수 있으려면, 돈을 저금해라... 라니, 뭔가 출구 없는 무한 루프 같네요.
이번에는 O가와 군의 개성이 ‘버릴 수 없었던 것’에는 그다지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과제가 조금 듬성듬성했네요. 그럼, 다음 과제입니다. 좀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리가 되지 않는다’
딱 이겁니다.
자기 얘기도 되고, 남 얘기도 됩니다. 혹은 이 말에서 떠오르는 ‘이야기’도 좋습니다.
화이팅입니다.
O가와 님께
답장이 늦어 미안합니다. ‘죽음의 길’과 ‘죽음의 마감’으로 거의 죽다 살아남다시피 했습니다.
오늘이 되어서야 시간이 생겨서 일 이외의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거 원.
과제 고마웠습니다.
‘이건 정말로 가설에 불과하지만, 이 책상 위라는 건 자기 머릿속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말하자면 ‘이러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싶다’는 바람이 표현되어 있는 게 아닐까.’
이 부분, 저도 완전히 동의합니다.
제 경우에는 책장입니다. 이것은 명백히 ‘나의 머릿속을 가시화해낸 것’ 입니다.
그보다는 ‘내 머릿속을 가시화한 것이라고 남들이 봐주었으면 하는 것’ 입니다. 복잡하군요.
즉, 나의 책장이라는 것은 ‘이미 읽은 책’과 ‘앞으로 읽을 책’이 사이좋게 꽂혀있는 것입니다만, 실은 80% 정도는 ‘앞으로(아마도) 읽을 책’ 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책꽂이를 꾸며 과시하는 까닭은, 서재를 찾은 사람에게 ‘이러한 책을 읽는 사람’ 이라고 ‘오해’받고 싶다는 동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머릿 속 내용이 아니라, ‘우치다의 머릿속은 이런 식으로 되어 있구나 하고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이미지’ 겠네요.
말하자면, 실제로 우리가 사물의 적부를 판단한다든지, 호오를 말할 때의 기준이 되는 것은 상당 부분 ’우치다라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라고 타자(他者)가 저한테 갖는 이미지이기 때문입니다.
모처럼 만들어 놓은 이미지를 망칠 수는 없으니까... 라는 식으로 무리해서라도, 무의식중에서라도, ‘반드시’ 자신다운 행동을 쌓아나가는 가운데, 실제로 점점 그러한 인간이 되어갑니다.
책장이라든가, 머물고 있는 집의 인테리어라든가, 입고 있는 옷이라든가 하는 것은 그러한 규범력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꽤나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집을 정리할 수 없는 사람은, 사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에게 있어서 어떠한 배치가 ‘기분 좋은가’ 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옛날에 결혼했을 때 처제(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는 다른 방은 깔끔히 정리를 했었습니다만, 자신은 귤상자 위에 FM라디오 잡지와 휴대용 라디오, 그리고 주전자만 있는 다다미방에 작은 매트를 깔아놓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라고 물어보니, 밤중에 매트 위에 누워 FM 라디오를 듣다가 목이 마르면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마신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그녀의 생리적 욕구에 기반해 지극히 합리적으로 배치된 것이었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도 ‘자신이라는 시스템’의 ‘구멍’에 대해 고찰해봅니다.
주제는 ‘생각나지 않음’ 입니다.
‘생각나지 않음’이라는 키워드를 어딘가에 집어넣는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든 자유입니다.
그럼, 파이팅입니다.
O가와 님께
좋은 아침입니다.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과제 제출 고맙습니다.
‘생각나지 않음’이라는 주제는 어려웠나보군요. 과제의 난이도를 예측하기란 꽤 힘드네요. 미안해요.
’생각나지 않’는 것은, ‘생각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생각나지 않음’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중으로 봉인되어 있으므로 확실히 쓸모가 있는 겁니다. 딱히 O가와 군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도, ‘어째서 이 사람은 ‘그런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걸까...’ 라는 식이어도 괜찮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특정했으면 나았을 겁니다.
부서를 옮겼다는 이야기,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양조 현장 일을 하게 되어 참 잘되었다고 봅니다.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은 사람에게 분명한 자존 감정을 가져다주므로, 그만큼 여유가 생기고, 그만큼 자상해지는 것 같습니다(주위 사람들에게 ‘나를 존경하쇼’ 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가 ‘나라는 놈 꽤 괜찮은걸’ 하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주류 제조 작업에 정진해주십시오.
그럼, 이번 과제는 O가와 군의 앞날과 관련해 떠올린 ‘사내(オトコ)의 자존심’입니다.
좀 까다로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내オトコ’라는 가타카나 표기에 약간의 함의를 담아보았습니다*.
그럼, 파이팅입니다!
* (이를테면 ‘아재’ ‘꼰대’ 등을 의미하는 오야지オヤジ같은 속된 표기가 있다. - 옮긴이)
O가와 님께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과제 받아보았습니다. 답장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여러가지 용무가 불어난 탓에, 이래저래 돌려막기에 급급했습니다.
‘사내의 자존심’ 에 대한 글, 쓰기 어려우셨을까요.
자존심이라기보다는 ‘자기 규율’이라고 했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외부로부터의 규범이 효과가 없는 국면에서, 자신의 행동을 다스리는 ‘자신을 위한 룰’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어제 데라코야 세미나에서 말한 참이었습니다.
어제의 주제는 가정 폭력(자녀를 방치해 아사시킨 부모 이야기)이었습니다.
이 모친을 언론과 사법부는 지나치게 비판했습니다.
발표를 했던 여성은, 모친을 이런 상황까지 몰아간 가족들과 행정 기관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저는 그것도 그렇지만, 오늘날의 일본을(아니, 전 세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뒤덮다시피 하는 자기 규율의 완화라는 것을 깊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모친은 ‘육아는 고역이다’ ‘그보다는 술 먹고 호스트바에 다니는 게 좋다’는 ‘속내’에 어느 시점까지는 전면적으로 굴복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아니다, 어린 아이들을 돌보아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있어서, 항상 어떤 양심의 가책을 느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인간은 이러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갖게 됩니다.
저는 이 두 감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능력을 자기규율이라 일컫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사회적 규범입니다. ‘놀러 다니고 싶음’은 개인적인 욕구입니다. 그 사이에 ‘어떻게든 타협을 지어야만 한다’ 하여, 이래저래 수중의 자원을 검토해나가며,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나가는 것을 저는 ‘자기규율’로 정의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는 ‘고삐’를 죄거나 푸는 기술입니다.
‘사내의 자존심’은 사회적 규범입니다. 내적으로 판단 내린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규범을 과도하게 내면화해버리면, 삶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럼 반대로 규범 따위는 무시하고 그저 생리적 욕구에 따라 살면 자유로운 상태냐, 그것도 아닙니다. 이기적으로만 사는 인간은 어떠한 사회적 신뢰도 얻지 못합니다. 지원자도 없고 친구도 없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굉장히 자유롭지 못한 삶의 방식입니다.
규범을 따라도 부자유, 욕구를 따라도 부자유입니다. 이 모순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 ‘보통 인간’ 입니다.
이 분열 상태를 나름대로 쾌적하게 살아가기 위한 기술을 저는 ‘자기규율’이라고 부릅니다.
바꿔 말하면 ‘나’라는 다극적, 다층적인 존재를 제어하는 기술을 의미합니다.
저의 내면에는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며 게으르고 욕심쟁이인 ‘우치다’가 있고, 박애적이고 차분하며 근면한 ‘우치다’도 있습니다. 모두 진짜 ‘우치다’입니다. 어느 한 쪽으로 갈무리하라고 해도 그건 무리입니다.
그러한 여러 종류의 ‘우치다’를 어떻게든 화해시켜 공생시켜나가는 기술이 필요한 것입니다.
O가와 군이 쓴 것처럼, 오늘날의 여자들은 ‘사회적 규범’을 다소 많이 신체화하고 있으며, 남자들은 ‘생리적 쾌불쾌’에 의한 판단을 과도하게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젠더 규범의 변화에 대응한 나름대로의 개혁적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개혁 활동이란 항상 도가 지나치게 마련이지요.
‘낡은’ 타입의 성역할도, ‘새로운’ 성역할도 모두 사회적 픽션인 것은 피차 같습니다. 하지만, 몽땅 폐기시켜버린 ‘낡은’ 타입의 성역할 규범에도 나름대로의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한 규범 사이의 균형을 자신을 위해 효율적으로 조합하는 능력, 그것이 성숙해지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을 비로소 생각해보자는 차원에서 ‘사내의 자존심’이라는 과제를 낸 것인데, 어려웠나보군요.
미안해요.
그래도, 이게 꽤나 중요한 문제이므로, 조금만 더 ‘사나이’ 시리즈를 계속하겠습니다.
20번째 과제는 ‘남자가 눈물을 흘릴 때’ 입니다.
O가와 군 자신의 얘기도 좋고, 다른 사람들 얘기나 일반론도 좋습니다.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하나 넣은 문장을 써주십시오.
그럼, 화이팅입니다.
O가와 님께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남자의 눈물’ 읽어보았습니다.
아래 대목은 O가와 군이 이제까지 썼던 문장 가운데 가장 ‘보이스’가 진솔했던 문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격려하려는 의도였다고는 생각했으나, 나는 조금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한 대화 방식이 너무나 정형적인지라 반감마저 갖게 되었다.
결국, 조부는 그 뉘앙스를 솔직하게 받아들인 탓이었는지, 웃는 듯하면서도 우는 얼굴을 하며, 아주 조금 눈시울을 붉혔다.”
O가와 군 자신의 ‘감상’과, O가와 군이 본 그대로의 ‘관찰’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면서도 슬그머니 공존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보이스’라는 건요.
글쓴이가 내면으로 한 생각과 객관적인 기술이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념이 담기지 않으면 ‘살아있는’ 문장은 나오지 않습니다. 쿨하고 리얼한 관찰이 수반되지 않으면 ‘가독성 있는’ 문장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듯 ‘간 맞추기’가 어려운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착각해서, 느끼하고도 정서적인 문체를 택하거나, 감정이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하드보일드한 문체를 택하든지 해서, ‘깔끔하게’ 뭘 하려고 합니다.
보이스는 피육(皮肉)의 소리이므로, 딱 맞아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찌끼가 남고, 축 늘어지며, 삐걱거리고, 흔들거리기도 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한 문장을 써주기를 바랐기에, O가와 군에게 이런저런 난문을 부과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따라서, 올해 마지막 과제로 이렇게 최상급의 문장을 써주어서 저는 매우 기쁩니다.
그럼, 새해 벽두의 과제 (21)입니다.
‘죽은 이의 절박(切迫)’입니다.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은 이’와 ‘상당히 가까이 있음을 느끼는’ 일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 그렇게 되는지는 저도 아직 모릅니다.
유명을 달리하여 ‘벽 너머’에 있을 사람이 어째서인지 바로 옆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로 여기고 있는 것과 비현실로 여기고 있는 것 사이를 나누는 ‘벽’은 그렇게까지 견고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O가와 군이, 죽은 이가 갑자기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꼈던 경험(딱히 유령을 봤다든가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써도 상관없습니다만)이 있다면, 기억해내서 써 주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22-08-06 11:28)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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