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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인과 직능인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1. 1. 28. 19:41

    2020년 10월 14일 '안보관련법에 반대하는 학자의 모임' 주최, 임명거부 문제에 대한 항의성명 발표 기자회견장의 모습.

    사토 마나부, 우에노 지즈코 두 분과 공동 편자로서 <학문의 자유가 위험하다> 라는 책을 냈다. 스가 정권의 일본학술회의 신규회원 임명 거부를 논한 책에 학자, 저널리스트들이 쾌히 기고의뢰에 응해주었다.

    이미 1400여 개의 학회가 항의성명을 발표한 바 있으며 이 건에 대해서는 앞으로, 얼마나 장기전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어떤 정치적 위협이 가해지더라도, 일본의 학자들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어찌하여 관저가 그러잖아도 코로나로 아주 바쁜 가운데 이런 귀찮은 문제를 끌어들였는가 하는 점이다.

    추리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정도 일' 이 귀찮은 트러블을 일으킬 리가 없다며 우습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6명의 신규 회원은 모두 과거에 아베 정권에 대해 비판적으로 발언한 사람들이다. 스가 정권은, 발족 시점부터 '정권을 비판하는 학자에게는 어떠한 공적지원도 하지 않는다' 고 선언함으로써, 일본의 학자들에게 '네 보스는 나다' 라는 것을 가르쳐주려고 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어떠한 긴급함도 요하지 않는 임명 거부를 정권 발족 직후에 일부러 행한 것은 그것이 효과적인 '마운팅' 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값싼 비용으로 발군의 선전효과를 내는 정치적인 '불꽃놀이' 를 시작하려고 했던 것이다.

    학자는 일갈 한 마디에 위축되며, 돈을 준다고 하면 꼬리를 흔든다. 이것이 아베 정권에서의 '성공 체험' 으로 알 수 있었던 그들의 경험지이다.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이것은 상당한 정도로 사실이다. 실제로 과거 사반세기 동안 교육행정은 대학 교원에게 굴욕감을 안겨주는 일에 지극히 열심이었는데, 거기에 대해 교원들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표하지 않고, 잠자코 따랐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대학에게 가해진 '주식회사화' 압력에는 참혹한 데가 있었다. 대학설치기준 대강화(大綱化) 에 수반되는 시장원리의 도입, 평가에 의한 연구교육자원의 차등분배, 상호평가(이것은 '어떻게 하면 연구교육의 성과를 높일 수 있는가' 를 의논하기 위해 애초에 연구교육에 들였어야 했을 시간과 노력을 희생시키는 지극히 도착적인 업무였다), 국립대학의 법인화 등등... 가장 악명 높았던 것은 2015년에 있었던 대학 거버넌스에 관한 학교교육법 개정이었다.

    이로써 대학교수회는 의사결정권을 박탈당하고, 단순한 학장의 자문기관으로 격하되었다. 입시판정이나 졸업판정같이 형식적인 의식 정도만 허락되었을 뿐, 학장이 '필요 없음' 으로 판단하는 안건에 대해서는 교원회가 자문하는 것조차 사라지게 되었다. 한 가지 행정명령에 의해 대학 자치의 근간이 되는 교수민주주의가 파괴되고 말았지만, 그때, 일본의 대학 관계자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18만 명의 대학 교원은 시위도 파업도 하지 않은 채 잠자코 굴욕적인 권한박탈을 받아들였다. 그것을 본 정치가들이, 대학 교원이란 대부분 근성 없는 무리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일본의 학자들은 대학 교원 전원에게 있어서 사활적 가치를 지니는 자치권을 빼앗겼을 때조차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6명이라는 적은 학자들로부터 그 공적 자격의 일부를 박탈하는 정도로 모두가 저항해올 리는 없다고 총리 관저는 믿었다. 그것은 과거의 '성공 체험' 에서 귀납적으로 추론해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의외이지만, 학자들은 분연히 관저에 적의를 표명했다. 이와 같은 격한 반항을 관저가 예측했을 리는 없다. 어째서 예측을 그르쳤는가?

    왜냐하면 학자는 '조직인' 임과 동시에 '직인' 이기도 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관저가 간과했기 때문이다.

    조직인으로서의 대학인은 잠자코 상급자의 명령에 따른다. 이 점에서는 일반적인 샐러리맨과 같다. 회사에서는 CEO의 어젠다에 찬동하는 예스맨이 중용되고 반대하는 자는 좌천•배제된다. 당연한 일이다. 윗선의 경영 방침이 적절한지 아닌지 판단을 내리는 것은 종업원이 아니다. 시장이다. 모든 종업원이 반대하는 사업이라도 CEO가 단행한 결과 시장이 호의적으로 반응해 매출이 신장되고 이익이 늘며 주가가 올라간다면, 그것은 '바람직했던' 일이 된다.

    대학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되었다. 행정시책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시장' 은 국정선거라고 일본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고 있다. 선거에서 한 정권이나 정당이 다수를 점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펼쳐온 교육행정이 올바른 것이었다고 '시장' 이 판단을 내렸다, 그렇게 해석된다. 그래서, 교육행정의 수장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학자가 중용되고, 반대하는 학자는 소외당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식으로 주식회사의 논리에 준거한 대학 본연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에 아주 익숙해진 교원들이 이제 보니 이미 어느 대학이든 과반수를 넘었다. 과거 사반세기에 걸친 '대학의 주식회사화' 를 추진해 온 것이다. 이것이 성공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마 스가 총리는 자신이 회사의 사장이고, 일본학술회의는 관저 별관 구석에 위치한 '사사(社史) 편수실' 같은 것으로 생각한 듯 하다. 푼돈으로 그저 거둬주고 있는 부서라고는 하지만, 스가 본인이 월급을 주면서 먹고 살게 해주는 것이다. 그곳에서 일부러 상부를 거스르는 인간을 등용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그는 생각했다.

    관저가 간과한 것이란, 학자는 상위자에게 부림받는 것에 익숙해진 조직인인 한편 동시에 다른 일면에서는, 자신의 전문적 기능을 뽐낼만한 독립성 높은 직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조직인으로서의 대학 교원은 한편으로 행정명령 앞에 잠자코 고개를 떨군다. 그런데, 직인은 다르다. 직인으로서의 학자는 전근대적인 도제관계 가운데 자라난다. 스승의 목소리를 직접 가까이에서 듣고, 긴 수업을 통해 스승의 방법을 익히며, 그 학통을 잇는다. 그 점에서는 무도가나 일본도 만드는 장인, 전통 예능 수련자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대학 교원은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의 학장을 비민주적인 절차로 '윗선' 에서 정해버려도 조용히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속한 직능단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 평가를 비전문가가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장인들이 자기 자신의 작품이나 기술을 초보에게 평가받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본학술회의는 학자의 '길드' 다. 누가 길드의 '장로' 로 임용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직인들의 전관사항이라, 그 가부의 결정에 직능 이외의 기준은 적용되지 않는다. 허나, 스가 총리는 직인들을 향해 길드의 입회기준으로써의 '관저 충성도' 를 적용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터무니없는 요구다.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당대의 권력자에게 아첨하는 자가 대학 내에서 출세하는 것을 '당연한 것' 으로 잠자코 받아들이는 대학교원들도, 어떤 직인의 '솜씨' 가 과연 확실한가를 판정하는 권한을 그 분야의 문외한인 정치가에게 맡기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한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제 학문은 끝장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긍지' 문제 혹은 그 이상으로, 자신 직업의 존재이유를, 자신들이 각고의 노력을 다 해온 의미를 부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직인으로서의 학자' 는 이 건에 대해 한 치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

    이번 일본학술회의 문제에서도 1400에 달하는 학회가 상당히 열띤 목소리로 항의성명을 냈다. 다만, 대학으로서 공식적으로 항의성명을 내는 경우는 한 건도 없다(항의성명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유지들의 협의회' 다). 그 사실이 학자가 '직인' 으로서 행세할 때의 의연한 자세와, '대학인' 으로서 조직적으로 행세할 때의 저자세 사이의 대비를 썩 잘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관저에 제언하는 바는 이렇다. 어떠한 경계심도 갖지 않은 채 시작해버린 이 '마운팅' 은 실패였다. 그러므로, 깨끗이 실패를 인정하는 편이 좋다는 말이다. 일본학술회의의 신규 회원에 대해서는 원안대로 임명하고, 깨끗이 매듭짓는 게 낫다. 그래야 일이 더 커지지 않는다. 아무리 무리를 한다고 해도 학자들로부터 양보를 받아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반복해 말하지만, 협박이나 인센티브는 '대학인' 상대로는 유효할 수 있겠지만, '학자' 상대로는 약발이 듣지 않는다.

    (2021-01-22 12:15)

    출처: http://blog.tatsuru.com/2021/01/22_1215.html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1950년생.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원숭이화하는 세상> <길거리의 한일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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