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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2030의 몰락인용 2026. 8. 13. 15:27
잠자는 가능성을 깨우자
"서양 문명의 몰락은 죽은 사람을 장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작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그는 큰 절의 스님이면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이 말은 아이들에게 부모나 조부모의 임종을 보여 주지 않고, 꽃으로 장식한 관(棺)에 유해를 담은 후에 비로소 보여 주는 습관이 생기고 나서부터 서양 문명이 계속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족의 죽음에 직면한다는 것은 확실히 아이들에게는 일시적으로나마 대단한 충격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인간의 욕망을 자각하는 데 큰 힘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전쟁 중 학도 동원으로 야마구치 현 히카리 시에 있는 해군 공창(工廠)의 탄환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거기서 공습을 맞았을 때를 대비한 훈련을 가끔 받았는데, 동급생인 친구와 나는 뛰기 싫어서 늘 숨어서 훈련을 안 받고 게으름을 피웠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진짜 공습을 받았다. 굉장한 폭음이 들리면서 소나기 같은 폭탄이 쏟아졌다. 평소 훈련을 안 받고 놀던 우리는 "도망쳐라!" 하는 말을 듣지도 않았는데 필사적으로 방공호를 향해 뛰었다. 나는 뛰는 도중 수많은 시체를 뛰어넘었다. 본능적으로 얼른 머리를 숨겼을 그들 시체 대부분은 엉덩이에 폭탄을 맞아서 비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죽음이 없으면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삶이 존재한다. 그 철학자가 말했듯이 장식된 관만을 보게 되는 서양의 아이들은 확실히 삶과 그 뒷면에 존재하는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삶의 가치를 인식할 기회를 빼앗겼다고 말할 수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그 값진 삶을 보다 멋지게 사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특권이다. 그 특권을 포기하는 것은 어떤 뜻에서는 죽은 사람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책에서 보다 멋지게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나의 보잘것없는 체험을 통하여 모색해 왔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보다 멋진 인생을 살기 위하여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씀으로써 이 책을 끝내고자 한다.
현재 일본의 시대상을 표현하는 데 '다이내믹(dynamic)'이라는 말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다. '다이내믹'이란 '동적'이라는 뜻으로 이해되는데, 나는 거기에 '대단히'라는 부사를 붙이고 싶다.
격렬한 다이내미즘을 내포한 지금과 같은 시대는 과거의 일본에도 있었다. 예를 들면 에도 시대 말기이다. 그러나 에도 시대 말기의 격심한 변동과 현 일본의 그것과 비교할 때 전자는 두 개 또는 세 개의 명확한 입장이 각각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서로 부딪친 결과 생긴 격동기이다. 이에 반해 지금 일본은 다양한 가치관이 서로 충돌하면서 복잡한 변동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학에는 '고전 해석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이 분야의 기본 이념은 원리와 출발점에서의 조건만 밝혀지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고전 해석학적 방법은 에도 시대 말기의 격변에는 통용되었는지 모르지만 현재 일본에는 적용할 수 없다.
따라서 불과 10년 후에 맞이하게 될 21세기의 일본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현재의 변동이 앞을 내다보기 힘든 변동이기 때문에 쉽게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이 특이한 다이내미즘에 계속 박차가 가해져서 변동이 보다 커지고, 빨라지고, 복잡해져서 개개인의 가치관이 지금보다 더 다양화될 것이라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젊은 사람은 물론 나도 그러한 21세기에 돌입하여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와 같은 격동의 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앞으로 가장 많이 요구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판단력(다양한 인생을 살아가는 선택의 지혜)과 생각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원리나 원칙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있어서는 다양성이나 변동에 대처할 수 없다. 변동과 다양성에 대처하기 위한 교과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신이 소심(素心)으로 돌아가고, 깊이 생각하고, 그 결과 제일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이 마치 험난한 시대같이 들리지만 나는 오히려 좋은 시대라고 생각한다. 변동하고 다양화되는 시대야말로 개인이 자기의 가능성을 발휘하기 좋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십인십색이라고 말하듯이 사람은 태어났을 때 이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르다.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자질 같은 눈에 안 보이는 부분도 모두 다르다. 따라서 사람 각자의 가능성은 당연히 다종다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끔 이 다양성을 보지 않으려 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안주하고 싶고, 고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일류 대학에 들어가 일류 기업에 취직하는 소위 엘리트 코스에 들어가면 고민할 것도 없고 불안에 쫓길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에 대하여 눈을 감고 싶어하는 것이다.
변동은 위는 위, 아래는 아래라고 하는 정해진 진행을 바꾸므로 이제 더 이상 다양성에 대하여 눈을 감을 수 없게 되었다.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열심히 찾아서 독자적인 인생의 보람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회도 또한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될 것이다. 독자적인 인생의 보람을 창조하지 못함으로써 변동에 방치되고, 다양화에서 낙오되고 절망하게 되는 사람의 비중이 커지면, 사회는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잘못하면 전복되기 때문이다.
자기 나름대로 보람을 창조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 속에 잠자는 가능성을 찾아내야만 한다. 아무리 어렵고 고생이 뒤따른다 할지라도 시대를 살아나가기 위하여는 그것이 필요하다.
일본은 교육 입국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확실히 전후 일본의 교육 수준이 상당히 향상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교부가 중심이 되어 학습지도 요령이나 검정으로 교과서의 내용이 제약, 통일되는 등 일본 학교 교육의 일반적인 교육 방식에는 큰 차이가 없다. 더 나아가 일반적인 국민 감정으로서 소위 교육의 기회 평등주의, 즉 "차별을 없애자, 학교 격차를 없애자, 그것이 공평하다."라는 사고 방식이 서양에 비하여 강하다. 그것이 교육 수준을 높인 원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에서는 성적의 우열로 인간의 평가가 결정되어 버리는 폐단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중학교 동창생 중에 식당을 경영하고, 연쇄점을 운영하는 등 비즈니스에서 대단히 성공한 친구가 있다. 그와 둘이서 은사를 찾아갔을 때 은사가 그에게 "히로나카는 수학을 잘했지만, 자네는 수학을 잘 못했지. 더하기는 괜찮았는데 빼기를 자주 틀렸어. 그런 자네가 장사의 천재가 되다니!"라며 감탄하셨다. 그때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즉 "저는 돈을 벌기만 하기 때문에 더하기만 하고 빼기는 전혀 안 씁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장사에 성공하는 것도 하나의 재능이다. 나 같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와 같은 재능도 있다. 사람의 재능이란 어느 쪽이 위다 아래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각자의 개성이나 재능을 잘 키우는 것이 다양하게 사는 방식이다. (히로나카 헤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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