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모니터 옆 포스트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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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스 레터)인용 2024. 10. 18. 19:47
읽을 만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저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이나 겪은 바를 적는 것만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 책의 형태를 갖춰 서점에 진열되는 모든 글의 뒷면에는 엄청난 양의 육필 원고가 켜켜이 쌓여 있다. 모든 생각과 단어, 문장과 단락을 점검해야 한다. 그러자면 파트너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내가 가진 생각과 궁합이 맞는 편집자가 필요하고, 여러 다양한 언어로 쓴 글을 현지 사정에 맞게 옮겨줄 번역자가 요구된다. 그러한 과정에 애초에 투자했던 시간의 두세 배가 소요되기도 한다. 내가 쓴 글이 타깃 독자층이 처한 언어-문화적 환경에 맞게 옮겨져 온 지금까지의 과정을 되돌아보건대, 오히려 원문의 완성도를 뛰어넘는 문장과 단락이 탄생한 경우도 있고, 내가 애초에 쓴 글이 완전히 시간 낭비로 여겨질 정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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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선생이 하신 질문 시리즈 「언어의 생성에 관하여」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2. 26. 15:45
안녕하세요.우치다 선생님이 '원리주의'에 대해 써주신 답변을 흥미롭게 정독하였습니다.그러고 보니, 선생님께서 쓰셨던 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으시지요. "따라서 '원리주의 반대'란 말을 영미(英美)형 기능주의자는 결코 하지 않는다.'원리주의 반대'를 외치는 구호 그 자체가 다름 아닌 또 하나의 원리주의이다.그도 그럴 것이 '원리주의자'는, 우리가 여기기로는 또한 '날것(なまもの)*'이기 때문이다."(p.97)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참으로 지당하기도 하거니와, 사리에 맞는 언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ー(* 이해나 공감을 하기 어려운 타자와 그럼에도 공생하고자 가용한 자원을 구사할진대 이를 자발적으로 행하자는 뜻. 소설가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시인은 날것의 언어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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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인용 2023. 12. 13. 05:58
[1] 해석자란 무엇일까? 그는 이미 존재하는 텍스트에 무언가를 더 보탤 수 있을까? 리흐테르가 보기에 해석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서 해석자, 즉 연주자란 악보를 반사하는 거울일 뿐이고 광신적이다 싶을 정도로 정확하고 세심하게 악보를 읽는 사람이다. 이것은 물론 비현실적인 견해다. 리흐테르 자신은 개성이 너무나 강해서 첫 음만 들어도 그의 연주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희귀한 피아니스트들 중의 하나이니 말이다. 굴드와 리흐테르는 그런 피아니스트인 것이다. (브뤼노 몽생종) . 나에 관한 그녀의 평은 이러했다. “리흐테르? 글쎄, 라흐마니노프가 딱 어울리는 피아니스트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면 이건 별로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다. 마리야 베냐미노브나 유디나는 정말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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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만드는 영화, 영화로 만드는 텍스트 (브뤼노 몽생종)인용 2023. 12. 13. 05:56
우리의 대담을 그냥 옮겨 적기만 해도 된다면 좋겠지만, 그건 도무지 안될 일이었다. 화제들이 두서가 없고 연속성이 전혀 없게 다루어진 데다가, 리흐테르의 대답이 단순한 감탄사이거나 내 질문의 맥락을 벗어난 요령부득의 토막 말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거의 일관성이 없는 천여 쪽의 대담 기록을 바탕으로 연속성이 있어 보이는 하나의 이야기를 재구성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영화 편집 기법이 동원되었다. 글은 비물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터라, 영화를 편집할 때에 비해서 작업에 한결 융통성이 있었다. 예컨대 몇 달 간격을 두고 녹음된 말들을 하나로 합치는 경우, 음향의 분위기에 차이가 많이 나면 영화에서는 그 둘을 연결할 수 없겠지만 나는 그 차이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분명치 않게 발음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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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다자이 오사무, 에밀 길렐스인용 2023. 11. 20. 12:17
문득 생각난 것은 '배음적 문학'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자이 오사무를 읽었을 때 확실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배음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을 받아 드는 수신자 측의 영적인 성숙도, 그 사람이 내면화하고 있는 '종족의 우주관', 사상, 미의식, 가치관 등에 의해 다양하게 분절됩니다. 그러므로 '배음적 문체'로 쓰인 문장을 읽은 독자는 거기에서 자신만을 수신인으로 하는 메시지를 수신하게 되는 것이지요. (...) 자신 안에 복수의 화자를 동시에 존재시킬 수 있고, 그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 다자이 오사무지요. 이것을 컨트롤할 수 없게 되면 다중인격이 되고 말지요. 다중인격이란 그때그때 다른 인격이 교대해서 나오는 상태인데요, 그래서는 배음은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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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개정판에 부쳐 (김욱동)인용 2023. 11. 14. 16:20
(...) 나는 이번 기회에 초판 번역본을 개정하기로 결심했다. 개정하되 부분적으로 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손을 보기로 했다. 건물에 빗대어 말하자면, 낡은 서까래를 몇 개 갈거나 지붕을 새로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집의 뼈대만을 남겨 두고 벽을 허물어 집 구석구석까지 뜯어고쳤다. 실제로 한 단락, 심지어 한 문장도 다시 손보지 않을 곳이 없다시피 하다. 이 점에서 이번 개정은 개수(改修)의 수준을 넘어 가히 구조 변경이라고 하여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나는 초판 번역본을 개정하면서 "유려하면서도 원문을 잘 살려 낸" 번역이라는 평가에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번 개정판에서 나는 특별히 다음 세 가지를 염두에 두었다. 첫째, 맞춤법과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 않은 일부 표현을 철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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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의 운영 대가로 내가 기대하는 것은 애드센스 수입이 아니다.인용 2023. 4. 14. 20:29
이 책을 번역하는 데 쏟은 노고의 대가로 내가 기대하는 것은 번역료나 인세가 아니다. 사실 다른 책이나 문학 작품을 번역했을 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엇을 번역하든 그에 바친 정신적, 육체적 노고에 대한 물질적 보상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나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을 번역하면서 이미 너무도 큰 정신적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나갈 때 느끼지 못했던 것까지 번역 과정에 깊이 느낄 수 있었고, 또 구절 하나하나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많은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나이에도 아직 타인의 정신 세계 안에 있는 너무나 오묘하고도 너무나 아름다운 사유의 "고산 지대"를 거닐면서도 숨이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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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는 인격과 관련이 있다.인용 2023. 3. 28. 07:26
(...) 가끔 나는 퇴고를 잘하는 작가는 인생도 현명하게 잘 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글의 착상이나 취재, 집필과 달리 퇴고만큼은 인격과 관련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퇴고를 잘하려면 자기감정을 잘 다스리고 냉정해져야 한다. 참을성도 있어야 하고, 자신과 자신의 작업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 타인의 조언과 비판에도 귀를 열 수 있어야 한다. (...) 그러나 몇몇 천재들을 제외한 우리 절대다수의 글은, 고칠수록 분명히 나아진다. 조금 나아지는 게 아니라 아주 확확 나아진다(사실 도스토옙스키도 퇴고를 했더라면 글이 더 나아졌을 것이다). 세 번, 네 번씩 퇴고를 해서 초고보다 얼마나 나아졌는지 깨닫는 경험을 하면 이 작업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그 힘을 믿자. 참고로 나는 요즘 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