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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간 『무지의 즐거움』 이메일 인터뷰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12. 20. 15:54
외국 출판사 기획으로 ‘무지의 즐거움’이라는 책이 나왔다. 한국에 있는 편집자와 옮긴이 박동섭 선생이 필자에게 묻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책이 한 권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가운데 이메일로 긴 분량의 인터뷰에 응했음으로 수록해 둔다. 우치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의 작가이자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정지우라고 합니다. 이번에 우치다 선생님을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얼마 전 한국에 출간된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를 읽고 난 뒤에 우치다 선생님의 ‘광팬’이 되었고, 선생님이 쓰신 책을 몇 권이나 집에 쌓아 두고서 차례차례 읽고 있는 참입니다. 거기서 다양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책이란 죽기 직전까지도 다 읽지 못할 만큼 사서 쌓아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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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스 레터) 이상한 애들이 올 거야인용 2024. 12. 14. 12:26
선생님께 들은 또 다른 인상적인 말씀은 “제가 도장을 열면서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것이 있으면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들었습니다. 이때도 빙긋 웃으시면서 “이상한 녀석이 올 거야”라고만 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도 저는 오랫동안 알지 못했습니다. 물론 선생님이시라면 “이상한 녀석이 올 테니까 방범과 안전 대책을 철저히 해라”라든지 “면접을 제대로 봐서 이상한 녀석이 입문하려고 하면 거절하라”라는 말은 하실 리 없었을 테지만요. 계속해서 그 말씀이 신경 쓰였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인가 지나고 나서 문하생들과 환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각자 입문한 동기를 밝힌 때가 있었습니다. 문하생 태반이 “사는 방식을 바꾸려고” 문을 두드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집에 있는 것이 괴로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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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읽기) 휘낭시에 비긴즈인용 2024. 12. 14. 12:12
역사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때면, 간혹 선견지명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 이제 막 동트려는 시대의 함축적 의미를 예견한다. 이 장을 바로 그런 인물이 남긴 글로 마무리하고 싶다. 1540년대 어느 시점에 파리에서, 신앙심 잃은 수도사이자 의사이며 법학자였던 프랑수아 라블레(François Labelais)는 조롱 섞인 찬미의 글로 유명해질 글을 하나 썼다. 그는 그것을 걸작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Gargantua and Pantagruel)』의 제3권에 끼워 넣었다. ‘부채 예찬’으로 알려지게 되는 작품이다. 라블레는 파뉘르주라는 인물의 입을 통해 부채에 대한 찬사를 쏟아낸다. 파뉘르주는 떠돌이 학자로, 고전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고, 또 “돈을 버는 방법을 63가지나 아는” 인물이다. 그가 아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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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전의 쿠데타 (日 아사히신문 천성인어)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La miseria y el esplendor 2024. 12. 13. 20:12
역사는 반복되는 대신, 압운을 남긴다고들 한다. 45년 전 어제, 한국의 전두환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공수부대 등을 출동시켜 주요 인물들을 구속하고 불과 하룻밤 만에 실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 『서울의 봄』은 작년 한국에서 크게 흥행한 바 있다. 계획을 성공시킨 장군의 파안대소로 영화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끝날 수만은 없었다. 전씨는 내란수괴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법정에 섰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영광과 영락, 그리고 광채와 그늘의 대비. 한국 대통령이란 존재는 대대로 그렇게 강력한 인상을 남겨왔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똑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인가? 비상계엄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어제는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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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 한국 민주주의의 잠재력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12. 6. 15:14
깊이 잠들었다 아침에 깨보니 '한국에서 계엄령이 발령되었다가 몇 시간 만에 해제' 소식을 접하며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어 트위터에서 입수할 수 있는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한국의 국회의원과 언론, 그리고 시민들의 순발력에 감탄했다. 눈앞에서 정치적인 격변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곧바로 이해하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할 일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무도에는 '기(機)를 보다'라는 말이 있다. 이 기(機)라는 것을 소홀히 했다가는 역사가 다른 차원의 궤적으로 흘러가는 경우도 있다. 계엄령 해제가 한나절만 늦었어도 시민과 군인 사이에 유혈 참사가 일어났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과거 44년에 걸쳐 쌓아 올린 한국의 민주주의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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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 성숙이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12. 4. 23:18
선거 전, ‘정치판에 이의제기를 무효표로 표명하자’는 캠페인을 목격했다. 일부러 무효표를 던짐으로써, ‘현행 선거 제도로는 우리가 스스로 흡족히 찬성의 뜻을 맡길 만한 대표를 뽑을 수 없다. 나는 지금 입후보해 있는 어떠한 후보자에게도 투표할 의사가 없다. 각 정당은 내가 투표하고 싶어질 만한 후보자를 우선 찾아내고 나서 대령하도록’ 하고 분노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무효표는 그냥 ‘사표(死票)’다. ‘현상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의사 표시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이건 그냥 ‘현상 긍정’을 표하는 것밖에는 의미하는 게 없다. ‘무효표를 던지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집권 여당의 ‘숨은 지지자’든지, 아니면 민주정에서의 선거라는 게 뭘 의미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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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물) 청년이여 비틀즈를 듣자인용 2024. 12. 4. 23:06
“너는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저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서 지금 20년이나 되었답니다. 오늘 아침나절에 밖을 나왔다가 홀연 천지 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기에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길은 여러 갈래요, 대문들이 서로 어슷비슷 같아 저희 집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 지금 울고 있습지요.” 선생은, “네게 집에 돌아가는 방법을 깨우쳐 주겠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곧 너의 집이 있을 것이다.” 라고 일러주었답니다. 그렇게 소경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은 걸음걸이로 걸어서 곧장 집에 돌아갈 수 있었더랍니다. (박연암) 정치적 판단이라는 개념에 관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첫째,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대신, 이성과 감정을 구사해 스스로 판단 내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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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민주정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4. 12. 2. 18:32
일본의 국회의원 선거가 마무리됨에 따라, 오랜 기간에 걸쳐 이어진 ‘자민당 독식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선거 결과는 이제 일본에 어떠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인가. 우선 우리에게 매우 익숙해진 ‘주요 법안 강행 채결’ 관행이 사라질 것이다. 국가의 향배를 결정지을 정책이 충분한 국회 심의를 거치지 않고 단지 ‘국무회의 결정’만으로 정해지는 일도 사라진다. 이는 도넛화되어 있던 일본의 민주정 입장에서는 기뻐해야 할 사태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독식’ 체제를 바람직하게 여겨왔다. 다른 정당과의 교섭이나 타협 없이, 여당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식회사라는 것은 틀림없이 그렇다. 경영자가 발령한 지시에 부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