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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
    인용 2020. 10. 3. 12:34


    나는 왜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판 프루스트를 샀을까? 그리고 왜 라 베르마에 관한 대목을 인용했을까? 내 의도가 무엇이든 그것이 리흐테르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문제, 즉 해석의 행위인 연주의 핵심적인 문제와 맥락이 닿았던 것은 분명하다. 해석자란 무엇일까? 그는 이미 존재하는 텍스트에 무언가를 더 보탤 수 있을까? 리흐테르가 보기에 해석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서 해석자, 즉 연주자란 악보를 반사하는 거울일 뿐이고 광신적이다 싶을 정도로 정확하고 세심하게 악보를 읽는 사람이다. 이것은 물론 비현실적인 견해다. 리흐테르 자신은 개성이 너무나 강해서 첫 음만 들어도 그의 연주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희귀한 피아니스트들 중의 하나이니 말이다. 굴드와 리흐테르는 그런 피아니스트인 것이다. (15쪽)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음악을 주어야 해요. 무료 연주회를 열고 싶어요. 그게 바로 해결책입니다.”

    내가 동조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조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생각에 반대할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누군지 알아요? 주최자들이지요. 그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죠.”

    천진함과 냉철함, 리흐테르는 그 두 가지를 아울러 지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문제 해결의 비책을 알고 있어요. 커다란 검은 모자를 무대에 놓아두는 겁니다. 기부를 원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돈을 넣을 수 있게 말이죠.” (23쪽)

     

    그는 정규적인 음악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오데사에서 피아노와 음악을 독습하며 거의 야생마처럼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보내고 나서 (…)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한 것은 1937년이다. 대부분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이 전문 연주자로 데뷔할 나이에 학생이 된 것이다. (…)

    그는 당대 소비예트의 위대한 솔리스트들 중에서 공산당에 소속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것은 결연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철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반역자가 아니라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외국에 나가지 못하고 오로지 소비예트 연방 안에서만 활동하게 되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그에게 겁을 줄 수 없다. 그는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지닌 크나큰 힘이다. (32~33쪽)

     

    첫 해에 그가 나에게 과제로 내준 또 다른 작품은 리스트의 소나타였다. 이 걸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 그리고 그가 나에게 가르쳤던 것은 침묵이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침묵이 울림을 갖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 그렇게 청중이 당혹감에 휩싸여 있을 때 비로소 G음을 친다. 그러면 이 음은 내가 바라던 대로 완전히 색다르게 울린다. 물론 여기에는 일종의 연극 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런 연극적인 요소가 음악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뜻밖의 울림을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은 음악에서 꼭 필요한 일이다.

    내가 아는 피아니스트들 중에는 연주는 훌륭하나 마치 접시에 모든 요리를 한꺼번에 담아 대접하듯이 연주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식으로 하면 사람들은 식단에 무엇이 있는지 미리 알아 버린다. 요리가 맛있더라도 그런 접대에는 뜻밖의 묘미가 없다.

    뜻하지 않은 것, 예상치 못한 것이 인상을 만들어낸다. 이 점이 바로 내가 네이가우스 문하에서 터득한 것이고 그가 나에게 깨우쳐준 것이다. 그는 내가 찾고 있던 것을 찾아내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85~86쪽)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수첩 / 브뤼노 몽생종 편저; 이세욱 옮김 / 정원출판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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