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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먼의 재생> 서문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8. 4. 08:16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이번에는 <GQ JAPAN>에 연재중인 에세이를 단행본으로 내게 되었습니다.

    이 연재는 담당 편집자인 이마오 나오키 씨가 매월 여러가지 테마에 관련해 질문하신 내용을 내가 답한다는 얘기입니다. 전에 한 번, 2016년에 지유고쿠민샤로부터 <우치다 타츠루의 생존전략> 이라는 타이틀로 한데 묶어 단행본으로 낸 적이 있습니다. <커먼의 재생>은 그 이후에 기고한 것을 문예춘추사에서 내게 된 책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GQ>는 상당히 화려한 잡지입니다. 어쨌든 <VOGUE>의 자매지이니까요. 광고란에 나오는 시계라든가 옷이라든가 신발, 자동차 같은 브랜드를 보면 나같이 멋을 부리지 않는 인간은 다시 태어나도 인연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물건들뿐입니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스즈키 마사후미 편집장은 나의 반시대적인 글을 마음에 들어해 꽤 오랫동안 <GQ>에 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칼럼은 내가 이제까지 써 오던 것과는 제법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데, 담당인 이마오 씨와 스즈키 편집장이 고베에 있는 내 집까지 찾아와 주셔서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마이 씨가 준비해 오신 질문에 그 자리에서 대답합니다 (소재가 부족할 때는 나와 만나기 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지금 우치다 씨 만나러 가는데, 물어보고 싶은 것 있어? 뭐든 괜찮아~’ 라는 말들을 모아 오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꽤나 개인적인 질문이 많습니다).

    그 질문에 나와 스즈키 편집장 둘이서 답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두 명이서 답하는 것입니다.

    대채로 항상 스즈키 편집장이 질문을 듣고, 쾌도난마로 싹둑 잘라 대답합니다. 그걸 들은 나는 흥미가 동해 지지 않고 폭주적 대답을 한다… 고 하는 방식인데 질문과 전혀 관계 없는 방향으로 일탈하고 맙니다. 그것을 전부 녹음해 둬서, 이마오 씨가 스즈키 씨의 발언 부분을 잘라내 내가 말한 것만을 남겨 문자화합니다. 그것을 내가 원형이 남지 않을 때까지 리터치해 완성한다, 는 프로세스입니다.

    스즈키 편집장의 말에 영감을 받아 그 자리에서 생각난 것을 말하는 것이 많은데, 이렇게 해서 나온 교정쇄를 다시 읽어보자면, 어째서 ‘이런 것’ 을 말했는가 잘 모를 내용을 쓰게 됩니다만 ‘나라면 얼마든지 말했을 듯한 것’ 이어서 그대로 채록해 둡니다.

    주제는 정치경제부터 결혼이나 독서감상까지 여러 갈래에 이릅니다. 1회분 전부를 써서 대답하는 중요한 토픽이 있을 때도 있고, 쌀쌀맞게 몇 줄 대답하고 끝내버리는 것들도 있습니다.

     

    타이틀은 최종적으로 <커먼의 재생> 으로 정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타이틀 안이 제시되었지만, 전체를 통해 내가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역시 ‘그것’ 이 아닐까 생각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커먼(common)’ 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형용사로서는 ‘공통의, 공동의, 공공의, 보통의, 예사로운’ 이라는 의미이지만, 명사로는 ‘마을의 공유지, 공적 소유지, 울타리 없는 목초지 혹은 황무지’ 의 뜻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유럽에도, 일본에도 촌락 공동체가 그런 ‘공유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관리했습니다. 초원에서 목축을 한다든가, 숲에서 과일이나 버섯을 채취한다든가, 호수나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커먼의 관리를 위해서는 ‘모두가, 언제나, 언제까지고 쓸 수 있도록’ 신경 쓸 필요가 있습니다.

    커먼의 가치라는 것은, 거기서 산출되는 물품의 시장가치에 관한 산술적 결산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거기서 풀을 뜯는 소의 고기라든가, 채집한 과일이나 버섯, 혹은 잡은 물고기가 만들어 낸 시장적 가치를 보탠 것이 커먼의 만들어 낸 가치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모두가, 언제나, 언제까지나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할 수 있는 주체를 일깨우는 것, 이 자체를 추구하는 것에 커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말이라서 죄송합니다. 잠시 질문의 방향을 바꿔보겠습니다.

    ‘모두가, 언제든, 언제까지나 쓸 수 있도록’ 배려하는 주체란 ‘누구’ 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들’ 입니다. 그렇지요? ‘우리들이 공유하는 이 커먼을, 우리들이 소중히 가꿉시다’ 라는 언명을 발하는 것이 가능한 주체는 ‘우리들’ 입니다. 즉, 커먼의 가치는 ‘우리들’ 이라는 공동 주관적인 존재를 만드는 데 있습니다. ‘우리들’ 이라는 말에 고유의 무게나 실감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써 커먼은 존재한다. 그렇게 나는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적으로 생각하면, 딱히 토지 같은 것은 공유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공유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공유해서 공동관리한다는 것은 품이 드는 일이니까요. 관리 방향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집단적 합의 형성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동의해 주지 않으면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 건 까다롭다고 하는 사람이 ‘공유하니까 불편하잖아. 그보다는 모두에게 균등히 분할해서 각자가 좋을 대로 쓰게 하자’ 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실제로 영국에서 근대가 도래했을 때 일어난 ‘울타리 치기(enclosure)’ 라는 것은, 이 ‘커먼의 사유화’ 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영국 곳곳에서 행해졌습니다. 그 결과, 사유지에서는 토지 생산성이 올라갔습니다. 뭐, 그런 겁니다. ‘내 땅’ 이니까요, 필사적으로 밭을 갈고, 필사적으로 작물을 재배하고, 비용 대비 효과가 높은 사용법을 궁리했습니다.

    자본주의적으로는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들’ 이라고 언명하는 공동 주관적 주체가 소멸했습니다. 애초에 공동 환상이었으므로 ‘그런 것’ 이 사라져도 딱히 누구도 곤란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저 정신이 들고 보니 촌락 공동체라는 것이 소멸해 버린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돈벌이에 푹 빠진 사이에, 지금까지 집단이 공유 유지해 온 제례나 의식, 전통예능이나 생활문화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상호부조 조직도 없어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생산성이 높은 농업으로의 이전을 하지 못한 자영농들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도시의 프롤레타리아가 되어 유민화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영국에서의 농업혁명, 산업혁명이 달성된 것입니다. 자본주의적으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겠습니다만, 어쨌든 그렇게 커먼은 소멸했어요.

    그 후, ‘족쇄밖에는 잃을 것이 없는’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참상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커먼의 재생’ 을 제언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공동체주의’ 즉 ‘커뮤니즘’ 입니다.

    ‘공산주의’ 라는 번역을 마주할라치면 우리들에게 확 와닿지가 않습니다(일상생활에서 ‘공산’ 같은 것은 보통명사가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커뮤니즘(Communism)’ 이라는 술어를 택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영국의 ‘커먼’, 프랑스 이탈리아의 ‘코뮨(Commune)’ 등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제도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정이 있으므로 만약 처음 마르크스를 번역한 사람들이 ‘커뮤니즘’을 ‘공유주의’ 라든가 ‘공동체주의’ 같은 것으로 ‘의역’ 해 주었더라면, 그 이후의 일본 좌익사도 조금 양상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 책에서 당부드리고 있는 ‘커먼의 재생’은, ‘울타리 치기’ 에 대한 마르크스의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는 사상적인 호소와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글로벌 자본주의 말기에 다다라, 시민의 원자화 콩가루화, 혈연 지연공동체의 와해, 상호부조 시스템의 부재라는 삭막한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우리들’ 에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다만, 나는 마르크스정도로 스케일이 큰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재생을 목표로 하고 있는 커먼은 제법 소박한 것입니다. 예전부터 촌락공동체가 공유해 온 초원이나 숲, 혹은 코뮨을 구성했던 교회나 광장같은, 그런 정도의 규모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웃’ 공동체입니다.

    그런 구상에 현 시대의 역사적 긴급성이 부여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읽어보고 판단해 주십시오.

    그러면, ‘후기’에서 다시 만납시다.

     

    (2020-07-20 15:20)

     

    출처: blog.tatsuru.com/2020/07/20_15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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