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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스비 사코(Oussouby SACKO) 선생에 부쳐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0. 8. 3. 18:21

     

     

    교토 세이카 대학의 학장(이라고 함은 제 상사) 인 우스비 사코 선생의 <사코 학장, 일본을 말하다> 라는 책이 아사히신문출판사에서 나왔다. 의뢰받은 해설을 썼다. 아래에 기록해 둔다.


    사코 선생에 대해 떠올려 가며 글을 쓰다 보니, 의뢰 받은 분량을 두 배 이상을 넘겨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첫 만남' 이라든가 다른 에피소드는 전부 생략하겠습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아프리카계 무슬림 학장이 탄생한 것의 교육사적 의의에 대해서도 다른 분께서 잘 정리해 두셨을 것일 테니 양보하겠습니다. '사코 선생은 어째서 일본 대학의 선생이 되려고 하셨나?' 라는 질문으로만 한정해 쓰겠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일본에 사는 외국인을 많이 만나봤습니다만, 사코 선생만큼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학 교원으로서 미국이나 유럽 사람 가운데는 때때로 '오기로라도 일본어를 말하지 않겠다' 라는 사람이 있으니, 정말로 예외적입니다. 어째서일까요?

    물론, 사코 선생이 어학의 천재라는 것이 첫 번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 년간 중국어를 마스터해 대학에 들어가고, 1년 만에 일본어를 마스터해 대학원에 들어간 사람이니까요.

    그렇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만으로는 그렇게 잘 할 수 없어요. 사코 선생에게는 일본 사회와 일본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목표문화' 와 '목표언어' 로 말하고 있습니다만, 어떤 외국어를 학습할 때의 인센티브는 보통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사코 선생이 어느 순간 일본인과 일본 문화를 이해해 보고 싶다는 강한 탐구심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계기였을까요?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인 여성을 좋아하게 되어서' 라고 생각합니다(이 책에는 그렇게 적혀 있지 않지만, 아마도요).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그 나라의 대학 학장이 될 정도까지 깊이 사회에 뿌리를 내린다는 일은 보통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 이외의 이유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중국에서 유학하고 있던 사코 선생은 "나에게 있어서 <일본>은 수수께끼의 존재였다" (45쪽) 라고 쓰고 있습니다. 일본인 유학생들이 '전자제품을 잔뜩 가지고서 항상 간편식 카레를 먹고 있는' 생활 태도를 보고 '어쨌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즐겨 사용하는 일본인. 분명 합리적, 기능적으로 만들어진 인공 제품에 둘러 싸여 살아가는 것이리라' 고 생각했어요. 그다지 호의적인 기술은 아니군요. 그런데, 1990년 여름에 일본을 방문하고 나서 사코 선생이 갖고 있던 일본의 인상은 일변하게 됩니다.

    잠방이 차림으로 '칠칠치 못하게 살고 있는' 아버지나, 맥주를 마시며 '영문 모를 내용의 티비' 를 보며 폭소하고 있는 어머니를 보며, 사코 선생은 '이거 좋네' 라고 생각합니다.
    "패턴이 다양하잖아. 재밌네. 일본에도 이런 밝은 사회가 있어서, 사회성이나 지역성, 커뮤니티 감각이 있는, 사람 사는 정이 있는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47쪽)

    사코 선생에게 있어서 '일본에서 살아보고 싶다' 라는 욕망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이때였습니다. 사코 선생의 관심을 일본으로 돌리게 한 것은 정말이지 이 '재미있음' 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코 선생을 두근거리게 한 '재미있음' 은 '칠칠치 못함' 과 '영문을 모를 대상'이었습니다. 나는 여기에 사코 선생의 진면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매력을 말할 때 이런 것들을 손에 꼽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사코 선생이 처음이었으니까요.

    교육을 논하는 장에서도, 사코 선생은 '칠칠치 못함' 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학교 이외의 누구에게도 제약받지 않는 시간이나 단정치 못한 시간을 사용해, 생각이나 가정에서의 경험과 싱크로해 자신 가운데에 쌓여 나간다, 라는 프로세스도 필요하다. 개성은 그렇게 해서 자라는 것이며, 여가 시간을 확실히 사용한다는 것에 의해서만 자기 자신은 성장하는 게 아닐까." (140쪽)

    교과목 이외의 것에도 아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편이 좋다는 말은 누구나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슬렁슬렁하는 시간' 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짐짓 미온적인 말투를 쓸 뿐이죠. 특히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은 다음 부분입니다. 조금 길지만, 사코 선생이 드물게 화를 내는 장면이므로 전부 인용합니다.


    "취미를 말할 때 마치 전문가같이 나와서 놀랐다. <영화를 보는 게 취미다> 라고 말하려니까, 영화 오타쿠가 찾아와서는 어떤 감독의 그 작품의 저 앵글이, 촬영 방식이... 라며 박식을 드러내 보인다.

    완전 뭐래니!


    코스프레에 대해 그다지 잘 알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가볍게 발언했을 때도 연구실에 방문한 학생에게 코스프레에 대해 장장 두 시간 설교를 들었다. 코스플레이어가 어떻게 캐릭터에 대해 지식과 경의를 갖고 있는가, 라는 것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아, 그렇구나. 옷 입고 노는 거구나> 라고 하면, 옷을 손수 만드는 것, 거기에 드는 시간과 캐릭터와의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이라든가에 대해 굉장히 자세히 들려주었다.

    <아이고, 얘야. 힘좀 뺄 수 없겠니?> 라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163~4쪽)

    일본의 학교 교육에는 다양한 결점이 있습니다. 나도 거기에 대해서는 많이 써 왔습니다. 그렇지만, 사코 선생처럼 아이들이 충분히 '슬렁슬렁 하지 않는 것' 에 이정도로 놀라며 애석해 하는 논자를 나는 달리 알지 못합니다. '좀 더 공부하라' 는 선생은 얼마든지 있습니다만, '좀 더 슬렁슬렁 해 보라고!' 라며 진심으로 화를 내는 선생은 매우 드뭅니다.

    영화 오타쿠도, 코스플레이어도 딱히 사회적으로 유용한 존재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자신 주변적인, 불요불급한 문화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자각하고 있을 터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혹은 그렇기 때문이야말로 그들은 자신들의 '전문 영역' 에 대해, 사소해 보이는 정보와 깊은 기술적 사항을 대단히 진지하게 체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영역에서만큼은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여러 분야에 대해 조금이라도 흥미가 있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일본 사회에서 '선무당' '반편이' '냄비' 취급받고, 경시받으며, 여러 차례 매도의 대상이 됩니다. 어슬렁거리며 영화를 본다든지, 반 쯤은 장난스레 옷을 입는다든지 하는 일은 안 됩니다. 똑소리나는 원칙이 있지 않으면, 깊은 이론적 배경이 있지 않으면, 헌신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과목 이외의 것에도 될 수 있는 한 고지식하게, 철저하게, 편집증적으로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어설프게 관심을 가질 거면 안 갖는 게 낫습니다.

    혹시, 많은 일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어쨌든 부모나 선생이 그렇게 단언하는 것을 보고 기가 죽어 '아, 그렇구나' 라며 수긍하고 마는 사람이 상당히 많은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잠깐만요. 간단히 수긍해 버리고 마는 겁니까? 정말 그걸 인정해도 되는 것인가요? 어설픈 관심은 안 가지는 편이 낫다. 잘 알지 못하겠거든 입을 다무는 편이 좋다라는 것 말이죠, 그게 정말로 세계 공통의 진리일까요? 뭐가 어떻든, 사코 선생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코 선생의 눈에는, 이런 신봉이야말로 일본인이 사로잡혀 있는 일종의 민족지적 기습으로 보이는 겁니다. 
    사코 선생에게서 나는 그것을 배웠습니다.

    사실 예전부터 '좀 이상한데' 라고 생각했습니다. 나 자신이 그런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가지 것들에 대해 살짝 흥미가 있어요. 그렇지만 어느 한 가지도 '궁극에 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조금이라도 흥미가 있는 것에 눈길을 돌리고, 조금 찍어 맛보면서, 이런 저런 장소에서 떠오르는 것을 말하면 전문가가 경멸의 눈빛을 보낸다... 나는 이제까지 줄곧 그래왔습니다. 그런 성격인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삶의 방식을 '옳다' 라고 말해 준 사람은 지금껏 한 번도 만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사코 선생의 "알게 뭐람!" 이라는 말에 무릎을 치게 되었습니다.

    사코 선생, 그래요! 그렇게 목숨 걸면서 언제 마음이 편할 수 있겠냐고요. 정말로 사코 선생의 말씀대로입니다.

    예전에 학회에 얼굴을 내밀었을 적에, 발표자에 대해 던지는 고약한 질문의 전형으로써 '당신은 ... 도 안 읽었군' 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발표자가 솔직하게 '읽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하면, 우쭐해하며 '...도 읽지 않은 인간이 이 논건으로 학회 발표에 나설 자격은 없다' 고 잘라 말합니다. 그 '...' 라는 것이 이 안건을 취급하는 모든 연구자에게 있어 필독해야 할 사항이라는 것에 대한 입증 책임은 회피한 채, 일방적으로 그렇게 선고하는 겁니다.

    옆에서 듣자니, 이렇게 연구자가 되기 위한 허들을 점점 높여가며 '살짝 흥미가 있는' 정도의 젊은 사람이 이 분야에 진입하려고 하는 일을 방해하면서 그 사람들은 여하한 '정의' 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해서 조용히 있었습니다. 그러자니 어느샌가 이런 일에 완전히 질려버려서 학회는 거의 나가게 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유일한 예외는 일본유대학회로서, 이 학회는 '유대' 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어느 것이든 연구해도 좋고, 연구 성과에 대해서 시끄럽게 값을 매기지 않아 정말이지 편안한 학회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학회만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영화나 코스프레같은 서브컬처도 마찬가지이며, 스포츠도 그렇습니다. '냄비' 는, 축구나 럭비의 월드컵 같은 축제적 이벤트 때 급히 선수 명단이나 규칙을 알아보는 사람을 이릅니다. 그런 사람을 '고참 팬' 이 타박하면서 '너희들에게는 구기 종목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어' 라고 말하고 입을 틀어막습니다. 음악만 해도 그렇습니다. 아티스트가 라이브 하우스에서 무명으로 몇 명밖에 손님을 모으지 못할 적부터 따라다닌 오래된 팬이, 이제 메이저 데뷔 이후에 팬덤에 입문한 사람을 깔보며 '뭣도 모르는 주제에' 라고 차가운 시선을 보냅니다.

    이런 태도가 정말이지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와중에 금세 무감각해져 '사람 사는 곳 어디든 다 그렇잖아?' 라고 생각하게 되겠지만,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적잖이 이것은 일본의 '풍토병' 인 듯합니다. 아니, 잘 모릅니다. 사코 선생이 일본의 교육에 대해 가장 신경 쓰고 있던 것은 '이런 것'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현상입니다.

    사회적 유용성만을 기준으로 해서 아이들을 평가하는 것의 폐단은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생산성이라든가 실용성을 떠들어대지 않았으면 하고 나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사회적 유용성이 없는 영역마저 전문 지식에 대한 자격을 시끄럽게 논합니다. 지극히 마이너한 영역에 대해서도 엄밀한 자격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뒤늦게 참가한 사람에 대해 굴욕감을 선사하고, 발언권을 빼앗는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누구도 '이상하다' 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본 학생들을 인터뷰한 미국의 잡지 Foreign Affairs 는 몇 년 전 기사를 통해, 학생들이 자신들의 대학 생활에 대한 인상을 어떻게 말하는지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trapped, stuck, suffocating 이었습니다 (참 인상적이라고 생각해서 메모해 뒀습니다). '좁은 곳에 갇혀 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숨쉴 수 없다'. 이것이 현대 일본 학생들의 신체적 실감인 것입니다. 유감스럽다고는 생각하지만, 혹시 학생들 자신이 나서서 '좁은 곳' 에 뛰어들어 자승자박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사코 선생이 말하는 '슬렁슬렁' 이라는 것은 '검증받고 싶지 않다' '평가받고 싶지 않다' '나 자신이 생각하고 싶다' 라는 적극적인 의지가 아닐까 하고 나는 이해합니다. 그리고, 사코 선생의 어휘로 치면 그것은 아마 '자유' 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인용도 사코 선생의 분노가 폭발하는 지점입니다.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니, 이런 대답이 나온다.
<스쿨 버스 대수를 늘렸으면 한다>
    <휴식시간을 늘렸으면 한다>
    <수업을 줄였으면 한다>
    뭐든지 <하고 싶다> 인 것이다.
    아무래도 <타자가, 누군가가 자신의 자유를 부여하는 것> 이라고, 학생들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
    <누군가가 나를 자유롭게 해줘> 라니, 뭐라는 거야!" (127~8쪽)


    드디어 나왔네요. "뭐래!"
    스쿨버스의 대수도 휴게시간의 연장도 수업시수도 모두 수직적으로 계측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학생들은 자유라는 것조차 수직적으로 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줬다 뺏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건 확실히 병적입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두루 닿는 곳에서 가동 영역을 넓히며 선택지가 잔뜩 있어서 심호흡이 가능한 것입니다. 신체 감각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좁은 곳에서 선택지를 빼앗기고 목이 졸리면서도 '이게 자유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마 학생들은 자유에도 외형적인 조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수업도 아르바이트도 없는 시간' 이라든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 이라든가 '거칠 것 없이 대하는 친구' 라든가 '무엇을 말해도 들어주는 애인' 이라든가... 이런 항목에서 높은 스코어를 딴 사람은 '자유' 이고, 스코어가 낮은 사람은 '자유롭지 않음'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틀린 얘기입니다.

    수직적으로 값어치가 정해지는 것은 그 자체가 '좁은 곳에 갇혀 있다' 는 것이예요. 타인이 갖고 있는 기성품의 '잣대' 로 측정받고, 평가받고, '네 위치는 여기니까 벗어나지 않도록 해' 라는 명령에 '예' 라고 대답하는 것이라구요. '평가받는 것' 과 '자유로운 것' 은 절대로 양립하지 않습니다. 물론, 현실 사회에서는 어떠한 평가도 거부하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평가받는 것' 과 '자유로운 것' 사이에 예민한 긴장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대학생 정도씩이나 되었다면 자각해야만 해요. 금세 흥분해버렸습니다만, 사코 선생의 '자유론'을 읽고, 이런저런 것이 머릿속에서 활개를 치고 말아버렸네요.

    아차차. 정신이 들고 보니 결국 지면 한도를 엄청 넘겨버렸네요. 여기서 끝내고자 합니다.
    사코 선생, 앞으로도 일본 대학과 젊은이를 위해 때때로 '뭐시여!' 라고 날벼락을 내려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2020년 6월
    우치다 타츠루


    (2020-07-20 13:52)

     

    출처: blog.tatsuru.com/2020/07/20_13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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