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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려읽기) 인생活着
    인용 2024. 10. 25. 23:04

    나란 인간, 꽤 괜찮은 인간이군!’

     

    결혼하면 ‘이게 바로 나의 본모습이야’라고 믿고 있던 자신의 자기동일성이 상당히 깨지기 쉬운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결혼생활에서는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할 만한 ‘최후의 보루’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한집에서 같이 살아야 하므로 계속해서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엔 전부 양보하고 나서도 무언가 남는 게 있을 겁니다. 그것이 자기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남는 것이 꽤 ‘의외의 것’이라는 겁니다. ‘나만의 고집’이라거나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선’이라던 것들은 전부 양보하게 되고 오히려 ‘아, 내게 이런 면모가 있을 줄이야!’ 하는 부분에 자기 존재를 의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큰 건물을 부수고 보니 작은 돌 위에 검은 기둥이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을 뿐, 그것이 전체를 지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것과 비슷한 심정입니다.

     

    정체성이란 일종의 ‘균형 잡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실체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넘어질 것 같은 상황에서 무심코 “아차차” 하며 균형을 잡으려 하잖아요? 그 순간의 “아차차”라는 목소리나 표정, 손발의 움직임에는 자연발생적인 리얼리티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느낌입니다.

     

    결혼생활을 통해 저는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한곳에 머무르며 버틸지가 아니라 어떻게 흔들리는지, 어떻게 균형을 잡는지, 어떤 식으로 그때마다 나타나는 곤란한 상황에 적응해 나가는지에 대한 ‘작법’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나란 인간이 꽤 괜찮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점입니다. 이건 자식이 태어났을 때 알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오랫동안 저는 스스로 에고이스트로서, 정 없고 배려심 없는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실제로 사귀었던 여자친구들 모두가 제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 자신도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일시적으로 사랑이 불타는 순간도 있고 애정이 식은 후에도 애정이 식지 않은 척 하는 정도의 연기력은 있었지만요. 하지만 결국 상대가 금방 눈치채고 ‘이 남자는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구나’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다는 걸 저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사실은 별로 귀엽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분만실에서 간호사들이 한번 안아보라고 해서 안아봤는데도 ‘여기서 애를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진짜 많이 혼나겠지?’ 하는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귀엽다고 생각할 마음의 여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두 시간 간격으로 깨서 우유를 먹이거나 기저귀를 갈아줘야만 했으므로 처음 몇 주간은 그저 ‘졸립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안 들더군요.

     

    그러더니 생후 6주째 정도부터 갓난아기를 안고 있자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 귀엽구나!’라는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겁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불가항력적이고도 주체하기 어려운 애정이었습니다. ‘이 애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 애의 목숨과 자네의 목숨 어느 쪽을 택할 거냐”는 말을 들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예, 제가 죽을래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누군가 한 번쯤 그렇게 물어봐줬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지요. 이와 동시에 이 애를 지켜주기 위해선 어떤 일이 있어도 ‘죽을 순 없다’는 각오도 다져지더군요. 서로 모순된 감정이 동시에 태어난 셈이지요. ‘이 애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와 ‘이 애를 위해서라도 절대 죽을 수 없다’는 건 사실 같은 말입니다.

     

    이와 같은 갈등은 자식을 낳아보지 않으면 좀처럼 경험하기 힘듭니다. 자신이 정말 지켜야 할 것을 가져보지 않으면 자기 안에 어떤 인간적 자질이 잠들어 있는지 발견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지요.

     

     

    곤란한 결혼

    누구와 결혼하든 진짜의 나를 만난다. 결혼생활을 애정과 이해 위에 구축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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