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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스 레터) 드뷔시, 모네, 레비스트로스인용 2024. 10. 7. 22:54
‘부드럽게 연결해서 치라’는 레가토는 내가 학생일 때 선생님께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이기도 하고, 선생님이 되고 나서 나도 무척 자주 쓰는 단어이다. 다른 악기 연주자나 노래하는 사람보다 피아노 치는 사람들이 유난히 이 단어를 많이 쓰는데, 피아노에서 부드럽게 연결해서 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테크닉이기 때문이다.
피아노의 특성상 어떤 음을 아무리 오래 누르고 있더라도 처음 건반을 누른 그 순간에 가장 큰 소리가 나고, 이후 소리가 점점 줄어들다가 결국 아예 없어져 버린다.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는 같은 음을 끌면서 활에 힘을 주면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이 가능하고, 이는 노래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피아노에서는 같은 음 안에서 소리가 커지는 것도, 같은 볼륨으로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피아노라도 안 된다. 바로 이 특성 때문에 피아노에서 ‘레가토’로 부드럽게 치기란 정말 어렵다. 특히 템포가 느리면 느릴수록 더 어렵다. 음과 음 사이의 시간이 길기 때문에 두 번째 음을 칠 때쯤에는 첫 번째 음의 소리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부드럽게, 긴 프레이즈로, 노래하는 것처럼, ‘레가토’로 들릴까? 그리고 내 연주는 왜 딱딱하게, 뚝뚝 끊어지게 들릴까? 같은 특성을 가진 악기로 치는데도 말이다.
이 문제는 음과 음 사이에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렸다. A음을 치고 B음을 치기 직전까지 하는 생각이 B음의 소리를 바꾸고, 이런 음들이 모여 부드럽고 긴 호흡의 프레이즈가 완성된다.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하나는 리듬과, 또 다른 하나는 음정과 관련이 있다.
임정연 『피아노 시작하는 법』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음악은 일상생활의 일부로 기능한다. 그렇지만 언어로서의 음악은 너무도 알쏭달쏭한 것이어서 연주가 일정 수준의 신비감을 품지 못한다면 결코 완벽한 연주로 인정할 수 없다. 개성적인 독해나 감정이 결여된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이상과 같은 ‘재료’를 고루 아우른 연주라야 비로소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또한 어린 시절 스승님들께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신 말씀이 있다. “바이올린으로 노래를 해야 한다.” 바이올린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악기 교습 과정에 툭하면 등장하는 표현이 바로 ‘벨칸토’, 즉 ‘노래하듯이’다.
‘남다른 개성’과 독특한 목소리를 가진 연주자, 뭔가 중요한 것을 말하고 나누려는 뚜렷한 충동을 가진 연주자의 ‘당연한 몫’으로 돌아가야 할 무대가 있다는 점에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니다. 아이작 스턴(1920-2001)이 젊은 음악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입버릇처럼 한 이야기가 바로 이 말하고 나누고자 하는 충동에 대해서였다. 스턴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커리어’를 쌓는 게 아니라 음악에 봉사하려는 자세였다. (이와 관련해서 좀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독자는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 원주)
기돈 크레머 『젊은 예술가에게』첫 해에 그가 나에게 과제로 내준 또 다른 작품은 리스트의 소나타였다. 이 걸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 그리고 그가 나에게 가르쳤던 것은 침묵이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침묵이 울림을 갖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 그렇게 청중이 당혹감에 휩싸여 있을 때 비로소 G음을 친다. 그러면 이 음은 내가 바라던 대로 완전히 색다르게 울린다. 물론 여기에는 일종의 연극 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런 연극적인 요소가 음악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뜻밖의 울림을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은 음악에서 꼭 필요한 일이다.
내가 아는 피아니스트들 중에는 연주는 훌륭하나 마치 접시에 모든 요리를 한꺼번에 담아 대접하듯이 연주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식으로 하면 사람들은 식단에 무엇이 있는지 미리 알아 버린다. 요리가 맛있더라도 그런 접대에는 뜻밖의 묘미가 없다.
뜻하지 않은 것, 예상치 못한 것이 인상을 만들어낸다. 이 점이 바로 내가 네이가우스 문하에서 터득한 것이고 그가 나에게 깨우쳐준 것이다. 그는 내가 찾고 있던 것을 찾아내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
나는 언제나 휴지부, 즉 침묵을 음표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왔다. 모차르트는 심지어 침묵을 소리에 우선시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음악은 음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음표 사이의 침묵에 있다.”
휴지부는 틀린 음표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을 들인 슬라이드만큼이나 ‘부정확’할 수 있다. 콘서트홀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뜻깊은 순간은 우리 모두가 ‘숨 쉬는 것조차 잊는’ 바로 그 순간이다. 휴지부 바로 뒤 혹은 휴지부 도중에 왕왕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다. 연주회장을 뒤덮는 침묵은 작곡가와 연주자에게는 물론 관객에게도 무척 묵직한 보상을 준다. 최고의 관객은 소리만큼이나 정적 또한 즐길 줄 아는 관객이다.
내 변함없는 바람은, 걸작에 걸맞은 완벽한 해석은 뭔가 ‘예기치 못한’ 것을 발견하게 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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