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려읽기) 나무를 심은 사람들인용 2024. 9. 29. 22:27
3년 전에는 자택 가까이에,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있어 진귀한 것이 되어버린 ‘달마 가마’를 한 달에 한 번 꼴로 불을 지펴 기와를 굽고 있습니다. 기와를 굽는 일은 대단한 육체노동입니다. 1000장이나 되는 기와를 가마 속에 가지런히 놓고 최대 900도의 열이 고르게 퍼져가도록 합니다. 장작을 지펴서 불을 일으켜 밤낮없이 24시간 내내 가마를 지켜보면서 기와를 굽습니다.
이렇게 구워진 기와는 기계로 구운 것과 비교해서 아무래도 정밀도는 떨어집니다. 흙은 늘었다 줄었다 하고 연기로 그을리는 방식 때문에 얼룩이 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크기가 몇 밀리미터 달라지는 것이나 그을린 정도에 따라 얼룩이 생기는 것은 기와의 성능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손맛이 있어서 무척 아름답습니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공산품 기와는 정밀도가 가장 중요한 과제이므로 크기가 정확하게 똑같이 규격화된 기와를 대량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극단적인 품질 관리는 대량의 불량품을 쏟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유통될 수 없는 쓰레기 기와입니다. 야마다 씨는 기계화된 합리주의와 확연히 선을 긋고 인간미 있는 기와를 구워서 수많은 건축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삼나무 묘목을 산에 심으면 1년에 몇 밀리미터씩 나이테가 늘고, 나무는 대지에 뿌리를 뻗으면서 느릿느릿 자랍니다. 그 나무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솎아내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합니다. 나무가 적당한 크기로 자라면 때 맞춰 벌채하고 통나무를 자연건조시킨 후 제재소에 운반하여 건축자재로 가공한 뒤 팔게 됩니다.
이렇게 몇 단계의 공정을 거쳐서 드디어 삼나무는 자연 속의 큰 나무에서 건축에 사용할 수 있는 목재로 변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완성된 목재를 시장에 출하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고바야시 씨는 푸념합니다.
국산 목재 가격이 계속 떨어져서 공정을 거친 목재를 생산해도 산림청에서 나오는 보조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이 가격 붕괴는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외국에서 값싼 수입 목재가 들어오고, 주택 건설에 목재가 사용되지 않게 된 자재의 변화(일본식 가옥 건축이 줄어든 결과), 점점 목재를 사용하지 않게 된 것 등의 사정으로 국산 목재는 건축 시장에서 급속히 경쟁력을 잃었습니다.
예전에는 통나무 한 그루당 1만 엔(약 10만 원 정도 - 원주)이었던 것이 지금은 3000엔으로 떨어졌다고 고바야시 씨는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는 나무를 벌채해서 재목으로 만드는 비용마저도 메꿀 수 없어서 적자를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바야시 씨의 동업자들도 대부분 폐업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일본의 산림 대부분이 방치되어 황폐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고바야시 씨처럼 가장 앞장서서 있는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 건전하게 돈이 흘러 들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미야마초에서 실제로 고바야시 씨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절실히 느꼈습니다.
일본은 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산으로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일본의 풍요롭고 아름다운 풍광은 조상 대대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지혜의 소산입니다. 고바야시 씨는 말합니다. 요시노(일본 임업의 대가 - 원주) 임업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산림 기술의 예지가 만들어낸 결정체라고. 즉 1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땀과 노력이 축적되어 일본의 다채로운 자연이 지켜졌던 것입니다.
그랬던 것이 값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외국의 수입 목재를 대량 소비하면서 일본의 임업과 산림은 점차 쇠약해졌습니다. 고바야시 씨의 경우에서 그러한 임업의 실정을 알게 된 우치다 선생님은 장차 언젠가 “내 집을 짓게 된다면 미야마(美山)의 삼나무를 쓰겠다”고 고바야시 씨와 굳게 약속했던 것입니다. 우치다 선생님은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가이후칸의 설계가 시작될 무렵부터 ‘건물의 구조는 목조’라고 결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가이후칸을 짓는 데 아무리 삼나무를 많이 쓴다고 해도 겨우 집 한 채뿐이니까 일본 임업에게는 ‘언 발에 오줌 누기’가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산 목재를 쓰는 것이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이후칸’이 건축주나 시공자 나아가 건축계 전체에 확산시킴으로써 국산 목재의 수요가 느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하고, 마음속 깊이 바라고 있습니다.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바닥까지 밝고 투명하며 관대한 인품, 게다가 목소리도 우렁차고 밥을 먹는 모습도 시원스러웠습니다. 고봉으로 담은 밥을 뚝딱 먹어치웠습니다. 어쨌든 동작 하나하나가 에너지가 넘치고, 어디에서나 몸을 기대고 눈을 붙였다 하면 잠들어버립니다. 놀라운 생명력을 가진 분이지요.
단지 원기가 넘쳐서 친구가 많다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나카지마 사장은 절대 무뎌지지 않을 신념을 가지고 집짓기에 신명을 바치고 있습니다. 나카지마 공무점이 지은 집은 애착이 가서 오래 살고 싶어지는 집이어야 한다는 것, 반드시 국산 자재를 사용할 것, 일꾼은 가시모 마을 사람들을 고용할 것 그리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공동체를 실천한다는 것 등을 신조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객의 만족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집을 만드는 장인과 일꾼 한 사람 한 사람이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항상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앞에서 임업에 종사하는 고바야시 나오토 씨의 장에서도 말했습니다만 현재 일본의 집짓기에서 국산재는 괴멸 직전의 상황에 있습니다. 외국 수입재가 값싸게 유통되어 국산재는 외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나카지마 사장은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강한 위기감을 느끼면서 가시모 마을 사람들을 필사적으로 묶어세워 삼나무 집짓기를 줄곧 추진해 왔습니다.
사장의 강한 의지는 건축에 그치지 않고 지역의 토산품을 유통시키기 위한 농원이나 시장을 만드는 사업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 문제를 안고 있는 지역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밝은 얼굴로 계속 모색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시에 비하면 시골에 산다는 것은 자연과 직접 관계가 있고, 생활의 질에도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일찍 자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전기를 사용하는 에어컨은 쓰지 않기로 합니다. (대안 참조 - 인용) 추운 겨울에는 내의를 껴입고 더울 때에는 옷을 얇게 입습니다. 주택은 단열이 잘 되도록 하며, 여름에는 일광을 차단하고 바람이 잘 통하게 하여 쾌적하게 만듭니다.
사장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비교해볼 때 여름의 최고기온과 겨울의 최저기온도 몇 도씩 높아졌는데, 이 기후 변화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각자가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하기 위해서도 먼저 의식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장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메시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이후칸은 바로 이러한 나카지마 공무점의 고베 지점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가시모 마을에서 대목 등 많은 장인과 일꾼이 왔습니다. 나카지마 사장이 바라는, 가시모 마을 자체의 자급자족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연의 혜택 속에서 길러진 편백나무로 집짓기를 하는 데 마을 사람들이 힘써 참여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기술 전수에 중점을 두면서, 동시에 현대를 살아가기 위한 열쇠라고 직감하면서 국산재 사용을 고집하며 이에 대해 자긍심을 가진 장인들이 날마다 땀 흘려 일하고 있습니다.
가이후칸의 공사에서는 방화 규제의 문제 때문에 불에 타기 쉬운 삼나무로 외벽 처리를 하지 않고 흙벽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때도 나카지마 공무점이 문화재 보존 공사에 실적을 가진 이노우에(井上)라는 훌륭한 장인을 초빙하여 함께 흙벽을 만들도록 제안하고, 내부 마무리를 갑작스럽게 변경할 때도 신속히 대응해 주었습니다. 서가나 긴 의자, 계단마저도 정말로 합당한 가격으로 밀도 높고 멋지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높은 수준으로 전체 집짓기 공정이 가능했던 것은 열린 감수성을 가진 다재다능한 집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건축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카지마 공무점의 강점은 가시모 마을의 자연 보존과 장인의 생활기반을 지탱해주는 공동체 형성과 발전을 의식의 중심에 놓고 일한다는 것 그리고 책임 있는 일을 전원이 협력하여 착실하게 밀고 나간다는 데 있습니다.
고시마 유스케, 박성준 옮김, 『모든 이의 집 : 건축가 1년생의 첫 작업』, 서해문집, 2014.
나의 고향집은 지은 지가 근 7, 80년이나 되는 고가(古家)였다. 어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 집은 그 당시에 상당히 이름을 떨쳤던 도편수가 지은 집이라고 한다.
바로 그 도편수의 이야기다.
그 집을 짓고 8년째 되는 가을에 어쩌다 우리 집 부근을 다시 지나게 된 도편수는 사랑방으로 찾아 들어왔더란다. 그런데 그는 주인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곧 두루마기를 벗어 던지더니 추에다 실을 매어 들고 집 모퉁이로 돌아가더라는 것이다.
무엇을 하는가 따라가 보았더니, 어떤가!
그 도편수는 한 눈을 지긋이 감고 추로 하여 드리워진 실을 한 손에 높이 쳐들고 서서 집 기둥을 바라보고 있더라는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 기둥이 혹 그동안 8년에 기울어지지나 않았는가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둥을 검사하고 난 도편수는 실을 거두며,
“그럼 그렇지! 끄떡 있을 리가 있나.”
하면서 그 늙은 얼굴에 만족한 웃음을 띄우고 기둥을 슬슬 쓸어 보더라는 것이다.
어려서 할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다. 나는 그 도편수의 이야기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자기 일에 대한 그 성실성, 그 책임감, 그리고 그 긍지!
부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 시대에는 그렇게 한가하게도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하고 말하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정신의 문제이지 바쁘고 한가한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이범선)
'인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디터스 레터) 드뷔시, 모네, 레비스트로스 (0) 2024.10.07 (유인물) 좋은 나라 운동 본부 (0) 2024.10.07 (가려읽기) 젊고 유식한 남성 동지들에게 (0) 2024.09.25 (유인물) 도모에 학원, 좋은 학교! (0) 2024.09.18 (가려읽기)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 (0) 2024.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