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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테크 기업이 내놓는 '거대 서사'인용 2023. 5. 30. 21:37
최근에는 글로벌 대기업들이 거대 서사를 만드는 작업에 뛰어들었다. 이들 빅테크 기업들은 이미 물질적으로 풍요한 소비자들에게 거대 서사에 참여한다는 고객 경험을 제공해서 큰 수익을 거둔다.
애플은 현대사회가 조악하며, 더 예술적으로 세련된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거대 서사에 넘어간 사람들은 뿌듯한 마음으로 애플 스토어 앞에 줄지어 서서 새 아이폰을 밤새워 기다리게 된다.
아마존과 테슬라는 현대사회가 지적으로 게으르다고 주장한다. 인류가 달에 착륙한지 50년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화성에 가지 못했느냐고 따진다. 그들은 당위에 대한 설명 없이 끝없는 혁신과 외부 세계 정복이라는 이야기를 제시한다. 인류 대다수를 비난하는 뉘앙스라 들으면 기분이 나쁘지만, 기승전결을 제대로 갖춘 거대 서사이기는 하다. 테슬라의 전기차를 구매하는 소비자는 자신이 그 거대 서사에 참여한다고 느낀다.
구글의 거대 서사는 한층 더 괴상하다. 현대사회가 지나치게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왜 검색 결과를 인간이 분류해야 하는가. 구글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목표를 진지하게 믿는다. 그러면서 그 대답으로 의식 없는 지능을 내세운다.
구글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인 구글 플러스나, 웨어러블 기기인 구글 글래스에서 참패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구글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모자란다. 사람들이 피부, 특히 얼굴에 닿는 물건을 어떻게 여기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이들 빅테크 기업이 내놓는 거대 서사는 사상적으로 한심하고 논리적으로 형편없다. 그러나 이런 커다란 서사를, 이 정도로 호소력 있게 내는 주체는 지금 달리 없다.
이들 기업은 적어도 법률가나 행정가들과 달리, 세계를 유동적인, 점점 커져가는 거대한 사실-상상 복합체로 본다. 또 상상이라는 접착제로 자신들과 현실과 소비자들이 한데 엮일 수 있음도 안다. 그 각각의 사실-상상 복합체가 관계를 맺고 각자의 영토를 넓힐 수 있음을 이해한다.
- 장강명 장편소설 <재수사 2>에서 발췌했습니다. 주요 일간지 기자 출신 작가입니다. 저번에 소개드린 김지혜 작가님도 그렇고, 어느 정도는 이런 문체가 개인적으로 취향인 것 같습니다.
- 그런데 이 소설 인용문 마지막 문단의 '사실-상상 복합체'가 뭔지는, 저도 지금 한참 고민해보고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 소설에는 어떤 가구 공방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고객을 설계 과정에 적극 참여시키며, 그들의 이야기나 관념 즉 내러티브를 가구에 투영한다는 식의 설명이 있는데, 이게 가장 비근한 해설일 것 같습니다.
- 함께 읽어보시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거대 기업이 미국 민주주의의 과정을 그들의 논리로 찬탈하는 것에 관한 고찰이며, 실제 불과 몇년 전 나이키가 미국 내부의 첨예한 분단 속에서 인권 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던 사례연구도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런 용어는 좀 멋쩍지만, ESG에서 부쩍 부각되는 거버넌스와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깨어있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망친다>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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