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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본공산당원에게 보내는 편지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2023. 4. 3. 22:49
공산당원이면서, 필자의 책을 애독하기도 한다는 S라는 분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마쓰타케 노부유키 씨가 주도한 ‘공산당 당수 공천’을 둘러싼 논쟁에서 필자가 마쓰타케 씨의 행동을 지지하고 있는 점에 관한 내용이었다. 공산당의 당 규약에 하자는 없으며, 또한 공산당은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므로, 마쓰타케 씨를 향해 ‘의견이 있으면 당 내부에서 당당히 발언하시오’ 라고 주장하는 ‘신문 아카하타(赤旗)’의 독자 투서를 끌어들이고서는, 필자의 행동을 은근슬쩍 비판하는 글이었다. 이에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S님께
처음 뵙겠습니다.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편지와 투서는 잘 받아보았습니다. 지적해 주신 점 감사합니다.
마쓰타케 씨와 관련해서, 사실 저도 곤혹스럽습니다.
저는 공산당원이 아니므로, 공산당의 당 규약이라는 게 뭔지 모릅니다. 공산당 내부에서 행해지는 민주주의의 실상에 대해서도 헤아릴 바가 없습니다.
마쓰타케 씨는 현역 공산당원이면서 긴 시간동안 당 핵심부에 위치했던 사람으로서, 제가 실제로 알고 지냈던 바 그 인물 됨됨이를 신뢰할 수 있는 분이었고, 그런 분한테 ‘당수나 당 간부 선출 방법이 블랙박스화되어 있다’고 들었으므로, 그런가 보다 하고 여겼습니다.
당 외부에 있는 인간에게는 그것을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없습니다만, 당 내부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논할 가치가 있는 논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책을 내서 문제 제기를 하고자 하기에, 저는 거기에 찬성했습니다.
그건 무엇보다도 이러한 문제를 공산당이 어떤 솜씨로 다룰지, 그 프로세스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 제기는, 공산당에 대한 국민적 주목을 모을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은 어떠한 정당인가, 그 의사 결정 프로세스란 어떤 것인가’가 두루 언론의 화제가 되고,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공산당 지지층의 외연 확대에 공헌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공산당 지지자입니다. 이번 동시 지방선거에서도 역시, 오사카 부(府)지사에 출마한 타츠미 코타로 씨, 그리고 제가 살고 있는 지역구 현의원인 키다 유이 씨, 시의회의 니시 타다스 씨의 추천인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마쓰타케 시의 기획에 찬성했던 이유는, 마쓰타케 씨의 문제 제기를 둘러싼 활발한 논의가 일어남으로써 공산당의 지지자가 늘어나고, 국회나 지방의회에서의 의석도 늘어날 것이라는 ‘정치적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산당이 이런 ‘세간의 이목을 끌 절호의 기회’를 마쓰타케 씨의 제명이라는 모습으로 끝마치려고 했던 점은 ‘정치적 판단’으로서 적절하지 못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 규약을 서둘러 변경할 필요는 딱히 없었던 것입니다. 현행 규약이 적절하다고 여겼다면, 그 적절함의 소이(所以)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일입니다. 우선 해야 했던 일로써, 당원이 제기한 이의 제기에 얼마나 ‘점잖게’ 대응할 수 있는 ‘노련한’ 정당인가를 세상에 보여줬어야 했다는 겁니다. 최종적으로는 당 규약을 바꾸지 않아도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의 제기가 나온 것 자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당수 선정 방식과 관련해 논란이 일어난 것을 기회로 삼아, 향후 심도 있게 논의하고자 한다’고 (립서비스일지언정) 밝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확실하게 당의 이미지 개선으로 이어지니까요.
S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치조직이란 것은, 그 정당이 정권을 잡고 난 뒤의 미래 사회를 선구적・맹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어떤 정치 조직이 한 사람의 독재적 지도자에 의해 톱다운적으로 조직되어 있다면, 그 정치 조직이 실현하는 미래 사회는 ‘한 사람의 독재적 지도자에 의해 톱다운적으로 조직된 사회’가 됩니다. 그 정치 조직이 이상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음모나 폭력을 사용해도 상관 없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 실현하는 미래 사회는 ‘이상적인 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 정부가 시민에게 음모나 폭력을 사용하는 게 허용되는 사회’가 됩니다.
경험적으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다양한 혁명 투쟁이 일어났고, 그중 몇몇은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정부는, 혁명을 주도한 당파의 조직 원리를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혁명 투쟁을 성공으로 이끈 당파의 조직 원리이므로, 바꿀 필요 따위는 없습니다. 그 조직 원리가 가장 효율적이라는 점은, 혁명 투쟁에 승리했다는 현실이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계 각지에서 혁명 투쟁의 승리 후에, 시민에 대한 가열찬 탄압을 ‘옳지 않다고 보는’ 로직을 탑재하지 않은 강권적인 정부가 생겨났습니다. 그 점을, 소련이나 중국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소싯적에 좌익 학생 운동에 관여했을 때,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어 이탈한 이유는, 당파를 막론하고, 눈 앞의 학생 조직이 미래 사회의 맹아 형태라면, ‘이런 사회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에 대해서도 똑같은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당 규약에 기반해, 적법적으로 이의 제기를 하지 않는 당원은 제명한다’는 원리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되면, 그 정당이 목표로 하는 미래 사회는 ‘정부에 대한 이의 제기를 법률에 기반해 적법적으로 하지 아니한, 그 이외의 수단으로 행한 국민의 국적을 박탈하는 것을 용납하는 사회’로 이어집니다.
유감스럽지만, 이번 공산당의 결정 태도에서 ‘이는 옳지 않다’ 라는 로직은 나오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당최 어렵습니다.
제 입장은 ‘이는 옳지 않다’ 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이외의 수단’에는 시위, 파업, 지하 출판, 레지스탕스 활동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부 비판이 적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실행한 인간은 처벌을 면치 못한다’는 명제를 용납하게 되면, 이제까지 행해졌던 일본공산당의 활동은 상당 부분(이를테면 치안유지법을 적용시킨다면) ‘법률 위반이므로 처벌을 면치 못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공적 성격을 지닌 법률과 일개 정당의 당 규약을 동일시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는 비판이 분명 있을 겁니다. 공산당을 없애버려도, 딱히 당장 생활에 지장이 있지는 않습니다. 국적과, 임의로 입당하는 정당의 당원 자격은 정말이지 서로 차원이 다른 것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정부에 적법적이지 않은 이의 제기를 하는 국민의 국적을 박탈하는 것과, 당 중앙에 적법적이지 않은 이의 제기를 한 당원을 제명하는 것은 ‘동일한 로직’에 의해 도출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로직인 겁니다.
‘이의 제기’에도 여러 질이 있습니다. ‘이의 제기’라는 것은 아날로그적인 연속체이므로 일률로 다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에는 마땅히 경청할 만한 것도 있을 것이고, 도대체 죽인지 밥인지 모를 쓰잘데없는 것도 있겠죠. 이의 제기란 것에는, 옥석이 다 섞여있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무시하면 됩니다.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이의 제기에 귀중한 자원을 낭비할 도리는 없습니다. 그것이 상식적인 판단입니다.
하지만 이번 마쓰타케 씨의 이의 제기는, ‘경청할 만한’ 것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을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이의 제기’로 분류화하여, 일축한 것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마쓰타케 씨의 행동이 당 규약에 비추어 위법이므로 받아들일 가치가 없다는 판단은 ‘충분히 정치적이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느 행동이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사량(思量)하는 것을, 그 행동이 합법적인가 위법인가를 의논하는 것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정치적’이라는 것의 한 가지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쓰타케 씨는 공산당의 당세가 쇠퇴해 가는 것에 대해 강한 위기감을 가졌고, 당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평범한 당 내부에서의 의견 신청과는 다른 모습으로, 당 내외를 휘말리게 하는 의논을 일으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판단’을 내렸습니다. 마쓰타케 씨는 그런 의미에서 탁월한 ‘정치적인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그것은 ‘미국과의 군사적 연을 끊기 위해, 헌법상 금지되어 있는 자위대를 이왕에 양성화하자’는 그의 발상으로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으로 공을 던진 건 마쓰타케 씨였습니다만,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우파 언론을 포함한 ‘공산당 때리기’를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는 진심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제가 앞서 ‘곤혹스럽다’고 쓴 이유가 이겁니다. 만약 일이 이렇게까지 전개될 줄 예상하지 못했다면, 이 점 마쓰타케 씨의 ‘정치적 판단’이 부적절했다는 비판은 적절합니다.
문제는 로직의 수준과, ‘정치’의 수준 양쪽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마쓰타케 씨는 정치적으로 행동했으며, 일본공산당 역시 정치적으로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공산당은 많은 언론으로부터 엄격한 비판을 받고, 그 결과 무당파층의 지지를 일부분 잃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겁니다.
공산당은 ‘어떤 난문이든지 일도양단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정당’이 아니라, ‘난문에 조우하게 되면, 당혹스러워하고, 갈등하는 상식적인 정당’이기를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 혹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러한 정당인 것처럼 처신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제가 지금까지 저술 활동으로 밝힌 바와 같습니다. 그러한 정당이라면, 그 정당이 정권을 잡은 뒤에 실현하는 미래 사회는 ‘어떤 난문이든지 일도양단할 수 있는, 원리주의적인 정부’가 아니라 ‘난문에 조우하면, 당혹스러워하고, 갈등하는 상식적인 정부’를 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상식적인 정부’ 아래서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글이 길어져서 미안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양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023-03-28 16:05)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1950년생. 합기도 개풍관 관장. 고베여학원대학 명예교수.
저서 <원숭이처럼 변해가는 세상>, <길거리에서 논하는 한일관계론> 등.
출처: 우치다 타츠루의 연구실'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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